안녕하세요, 근자람 레터지기입니다. 네 번째 자람구독에서는 ‘쓰이는’ 공간을 고민하는 15년차 공간 디자이너 혜인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공간을 검색하면 나오는 사전적 정의입니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그렇다면 텅 빈 공터도 공간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죠.


하지만 혜인님의 공간에는 항상 사람이 존재합니다. 혜인님은 공간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공간이 의미를 갖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려 노력하는 혜인님의 인터뷰, 지금 시작해 보겠습니다.

뉴스레터에 담지 못한 혜인님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싶다면?
15년차 공간 디자이너, 혜인님은 어떤 분인가요?
  • 실내 인테리어와 그래픽 디자인 전공으로, 패션, 뷰티, F&B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
  • 복합문화공간 퀸마마 마켓 프로젝트, 올리브영 명동 글로벌 타운점 등 상업 공간 포트폴리오 보유.
  • 해외 취업(상하이)을 통해 네트워킹, 커뮤니티 경험을 얻음. 중국 총칭의 라인 프렌즈 카페&스토어, 중국 선전의 아우어 베이커리 프로젝트를 진행.
  • 현재 공간디자인 스튜디오 오하이 운영 중.

인테리어 스튜디오에서 A to Z를 배우다

Q. 혜인님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첫 회사를 고민했던 기준이 궁금해요.

저는 대기업보다는 인테리어 디자인 설계, 시공 디테일 등 실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스튜디오(인테리어 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경력이 쌓인 뒤 내가 직접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후보 회사를 찾는 게 어려웠어요. 당시 인스타그램 같은 SNS가 없었거든요. 제가 찾아볼 수 있는 레퍼런스는 인테리어 잡지가 전부였어요. 그래서 제가 주로 봤던 게 지금도 출간되고 있는 인테리어스(월간 인테리어) 잡지예요. 여기에 실린 공간들을 보며 원하는 회사를 찾아 무작정 전화했죠.


전화하니 지금은 신입을 뽑을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뭔가 오기가 생겼는지 ‘그래도 나중에 혹시 생각 나시면 전화 좀 부탁드릴게요’ 한 마디를 붙였어요. 그리고 한 달 뒤 합격 전화가 와서 출근하게 됐죠.


Q. 대기업과 인테리어 스튜디오는 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요?

대기업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관리자의 느낌이 강해요. 반면 스튜디오는 필드에서 직접 일하는 기술자의 느낌이 강하죠.


물론, 대기업에서도 매장 연출을 담당하는 VMD(Visual Merchandising) 디자인은 실무자가 직접 관여하는 영역이 많긴 해요. 하지만 인테리어 디자인은 대부분 외주를 맡겨서 실무 범위가 조금 좁을 수 있죠. 한편, 대기업의 장점은 기획 또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관리자의 시선에서 운영해볼 수 있는 점이에요. 기획, 디자인, 시공까지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운영하고 관리해볼 수 있어요.


한편, 스튜디오에서는 실무의 A to Z를 경험하기 좋아요. 디자인뿐만 아니라 현장 관리, 설계, 운영 등 모든 프로세스를 담당해야 하죠. 현장 경험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요.


차원이 달랐던 클라이언트, 겸손해졌던 나

Q. 혜인님의 신입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도산공원 호림미술관 건물에 삼성 제일모직의 사무실을 만드는 위시 컴퍼니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100평 5개 층의 디자인을 단 2명이 진행했죠. 저는 고작 3년차였는데,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의 연차와 취향에 비해 너무 어렸어요.. 또, 하필이면 클라이언트 쪽 헤드 디자이너(프로젝트의 의사결정 담당자)가 정구호 씨였어요. 천재 정구호씨요! 그 분의 눈높이를 맞추려니 내 한계를 느껴 매일 허덕거렸던 기억이 나요. 디자이너로서의 자신감이 계속 떨어졌죠.


심지어 이서현 상무의 사무실에는 비트라 가구를 사용했는데, 책이나 전시장에서만 보던 가구였죠. 기스 날까봐 손도 못 대겠고.. (웃음) 포스 있는 사람들을 계속 대면하며, 혼자 생각이 많아지고 겸손해졌던 시기였어요.

  
ohhi_제일모직 위시 컴퍼니 프로젝트

Q. 너무 커다란.. 클라이언트를 만나셨네요. 그럼 클라이언트 요구사항과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가치가 충돌한 경험은 없었나요?

사실 클라이언트도 사람인지라, 처음에 본인이 주장했던 컨셉과 나중에 추가되는 요구사항이 전혀 다를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디자이너로서 초반 컨셉을 유지하게끔 설득할지, 아니면 컨셉에 안 맞더라도 최대한 클라이언트 의견을 존중할지 고민이 되긴 하죠.


근데 이건 결국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넘어간다고 생각해요.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클라이언트에게 명확하고 빠르게 응대하는 거예요. 저는 쌓아온 경험치가 있다 보니, 클라이언트 요구사항을 검토할 때 업체 한 군데가 아니라 두세 군데를 더 알아봐요. 내 마음 속에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미 정해져 있더라도, 여러 후보를 알아보고, 요구사항을 충족하기 어려울 때는 확실하게 안 된다고 얘기해 줘요. 그게 모두에게 좋아요.


공간 디자이너 vs 인테리어 디자이너

Q. 혜인님은 ‘공간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신데요. 우리가 흔히 아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직무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 부탁드려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전통적인 ‘실내 장식 디자인 영역’ 위주로 담당한다면, 공간 디자이너는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 공간이 만들어진 이후 고객 경험 단계까지 고민한다고 보시면 돼요. 디자인 영역을 좀 더 확장한 개념이랄까요.


그래서 공간 디자이너는 협업 스킬이 중요해요. 디자이너 혼자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닌, 프로젝트에 필요한 다른 디자이너들, 도급 좋은 업체들, 좋은 기획을 연결해 ‘좋은 공간’ 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최근 팝업이나 플래그십 스토어가 많이 생기며 공간의 기획력이 부각되고 있어요. 특히 공간을 만들고 난 이후 소비 외적인 경험을 고객들이 얻어가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그런 면에서, 이제는 기획과 디자인을 분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ohhi_올리브영 명동 글로벌 타운 프로젝트

'소비' 를 넘어 '찐팬' 을 얻는 공간
Q. 고객이 소비 외적인 경험을 얻어간다고 하셨는데요. 상업 공간은 상품 판매가 주 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기업은 매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이제는 너무 많은 제품들이 출시되고, 너무 많은 경쟁 업체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더 이상 단가 싸움으로 성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 소위 찐팬을 만들어내야 돼요. 제품이 비싸더라도 사줄 수 있는 찐팬이요.


찐팬을 만들기 위해, 공간 디자이너는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기획이라든지, 공간의 서비스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방법 등을 연구하게 돼요. 이 때 중요한 건 사용자를 이해하고, 사용자 관점에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죠.


Q. 사용자를 이해하는 혜인님만의 노하우가 궁금해요.

저는 ‘내가 과연 이 공간을 다시 오고 싶어질까?’ ‘나도 여기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질까?’ 를 염두에 두는 편이에요.


22년 진행했던 테니스 플레이 그라운드 프로젝트의 공간을 예시로 들어 볼게요.

  •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라면 일종의 소셜 커뮤니티에 관심이 많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둘러 앉아 얘기할 수 있는 커뮤니티 테이블을 뒀어요.
  • 테니스 치는 분들은 다른 사람 게임을 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다른 테니스장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파티션도 제작했어요.
  • 테니스 치고 나면 손을 자주 씻고 싶거든요? 라켓 그립에 땀이 묻기도 하고, 테니스 공도 계속 만지니까요. 이러한 경험을 헤아리며 공간을 디자인했어요.
  
ohhi_테니스 플레이 그라운드 프로젝트
저는 평소에도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 자주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녀요. 그래서 공간 디자이너로서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요.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순간적인 아이 캐칭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공간 디자인에는 조금 더 깊은 사유라든지, 인문학적인 해석이나 풀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Q. 최근에 ‘찐팬을 만드는 공간’을 보신 경험이 있나요?

대표적인 예시는 데스커 라운지인데요. 공간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기획자들한테도 상징적인 공간인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요즘 상업 공간 브랜드들이 찐팬을 많이 모으려고 하잖아요. 브랜드 이미지를 조금씩 쌓아 올리면서도, 상업 공간 안에서도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곳이 데스커 라운지라고 생각해요.

출처: 데스커 공식 홈페이지  

예를 들어, 데스커 라운지의 각 공간들은 따로 또 같이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요. 원하는 몰입도에 따라 책상이 분리된 듯한 개방감을 제대로 살렸어요. 자리마다 조도를 달리할 수 있는 개별 조명과 콘센트 박스가 섬세하게 준비되어 있죠. 업무에 방해가지 않는 자연스러운 동선, 수납 공간 배치, 커넥터들의 자연스럽고 적극적인 안내 등.. 공간의 기획과 기능이 심플하면서도 세심하게 배치되어, 참 좋은 공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혜인님은 앞으로 어떤 ‘자람’을 지향하시나요?

제 사업을 시작하며 정말 다양한 사람과 일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하이엔드 브랜드의 프로젝트라면, 브랜드 담당자인 클라이언트가 있고, 실제 시공을 하시는 일용직 인부도 있어요. 이렇게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조율하고 싶어요.


디자이너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천재적으로 심미적 두각을 나타내는 울트라 파워 슈퍼 솔로 디자이너가 있고, 좋은 디자인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의 빈 틈을 연결해주는 중간자 역할의 디자이너가 있어요.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재밌기도 하구요. 앞으로도 공간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디자인 커넥터가 되고 싶어요.

혜인님께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본업에 진심인 직업인의 이야기, 근자람이 전해드려요.
이번 자람구독, 어떠셨나요? 근자람은 성장하는 직업인의 직무 이야기를 더 생생히 전하고 싶습니다. 자람구독의 성장을 위해 구독자 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관심 있는 직무가 있거나, 새로운 관점의 질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근자람에 의견을 보내주세요. 솔직한 피드백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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