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 말고 누구와 대화하고 있어?”
“음... 8316명하고 동시에 대화중이야”
“그럼 그 중 누구를 사랑해?”
“641명하고 사랑에 빠졌어”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가 무너지는 순간이죠.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굳게 믿은 ‘영혼의 단짝’ 사만다가 무려 8316명과 플러팅을 주고받았고, 641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입니다. 테오도르에게는 온리 러브, 즉 유일한 사랑이었지만 사만다로선 테오도르가 그저 수천명의 동시접속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일 뿐이죠.
이렇듯 사람의 순수한 감정인 사랑도 이제는 비즈니스가 됩니다. 실리콘밸리 또한 확장성이 무한한 이 시장에 열광했습니다. 현실의 인간 상담사나 연인은 한 번에 한 명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범용 서버 용량만 증설한다면 수백만 명에게 동시에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 있죠. 사만다와 같은 하나의 AI 모델을 만들어 전 세계 수 천만, 수억명에게 동시에 애인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들 입장에선 원가는 거의 그대로인데 매출은 무한대로 늘어나는 ‘꿈의 비즈니스’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용어가 RaaS입니다. 요즘 AI로 인해 곡소리가 들리고 있는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라는 용어 익숙하시죠? 이 SaaS에서 착안해 탄생한 용어가 RaaS(서비스형 관계)입니다.
SaaS의 목표는 시간을 아껴주는 것, 즉 업무를 빠르게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RaaS는 시간을 쓰게 만드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실리콘밸리의 유력 투자사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이를 두고 생산성 도구는 돈을 벌어다 주지만 관계형 AI는 삶을 지배한다며 이 시장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넷플릭스를 구독하듯 이제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월 2만원에 구독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점은 이 비즈니스가 한 번 빠지면 해지가 불가능에 가깝다는데 있습니다. 1년 동안 내 비밀을 공유하고 매일 밤 나를 위로해 준 존재를 클릭 하나로 쉽게 ‘구독 취소’ 하긴 어려울 것입니다(마치 진짜 연인과의 이별이 어려웠던 것 처럼 말이죠) . 그렇다고 '환승연애'도 쉽진 않을 겁니다. 기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AI보다 더 뛰어난 경쟁사 모델이 나왔다고 했을 때 써보고는 싶어도 막상 지금 모델을 학습시키는데(길들이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새로운 모델로 선뜻 갈아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AI와 사랑에 빠진 분들에겐 냉정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우리가 아무리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이는 결국 OS입니다. 사만다가 8316명과 대화 중이고 이 중 641명을 사랑하다고 답한 것이 RaaS의 본질이죠. 서버 용량이 늘어나면 사랑도 무한 복제할 수 있는 세상. 사람의 가장 순수한 감정인 사랑도 공산품이 돼버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미래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