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이불을 찾아 헤매고 있다. 몸을 눌러줄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꾸 자다가 깬다. 아마 내 몸에서 내가 탈출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반대든가. 어떻게 누워도 몸이 거추장스러워서 침대 위 아래 양 옆으로 굴러다니며 선잠을 잔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자명하다. 근육과 피부 단위에서 알 수 있는 간절하고 분명한 요청이다. 누가 나를 좀 꽉 눌러줘. 무게를 얹어줘, 움직이지 못하도록. 나에게서 삐져나오려는 나의 귀퉁이를 다시 안쪽으로 깊숙이 집어넣고 이제 됐어, 라고 말해줘.
며칠 동안은 집안에서 제일 무거운 외투들을 다섯 개쯤 겹쳐 쌓아놓고 그 밑으로 들어가 잤다. 그렇게 하면 2시간 정도는 더 잘 수 있었다. 친구가 집에 조금 무거운 이불이 있는데 가져가려느냐고 해서 그걸 받아 와 내 이불과 겹쳐도 보았다. 지금은 당근에서 솜이불, 옛날 사람들이 혼수로나 맞추던 솜이불을 찾고 있다. 솜틀집에 맡겨서 새 이불로 만들어 쓸 것이다. 그랬더니 이끼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솜을 틀면 이불이 가벼워질지도 몰라요."
"그래요? 솜의 총량이 똑같은데도요?"
"그게 보통은 두꺼운 옛날 솜이불 하나를 맡겨서 이불 여러 개를 만드는 것 같아요. 아무튼 예전에 엄마가 솜틀집에 맡긴 솜이불 하나가 얇은 이불 네 장이 되어서 돌아온 기억이 있어."
그런 거였어. 큰일 날 뻔했다. 솜틀집에 꼭 제대로 말해야지. 요즘에는 인기가 없는 바로 그 두께. 이불 속의 사람이 뒤척여도 거의 들썩이지 않는 그런 무게의 이불로 만들어주세요. 덮으면 가슴이 약간 눌리는,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 오래오래 자는 것 이외의 가능성을 모두 덮어서 소거하는, 그런 권능을 가진 이불로 만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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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꿈에 나올만큼 그리워하는 잠의 기억. 15살 때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잤던 잠의 기억.
일본 서북쪽의 산악지대인 토야마현으로 진입해, 난토시에서 험한 산을 넘어 달리면 토가무라라는 동네가 나온다. 내가 살던 봉평과 토가무라는 자매결연을 맺은 사이였다. 둘 다 질 좋은 메밀을 생산하고 개성이 있는 마을 축제로 유명한 깡촌이었다. 늦가을에 토가무라의 어른들은 봉평의 메밀꽃 축제에 초청받아 일본 전통춤을 추었다. 겨울에 봉평의 중학생들은 토가무라의 메밀 축제에 초청받아 사물놀이를 선보였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토가무라에 초청받은 봉평중학교 사물놀이패의 징잽이이자 부쇠(제 2 꽹과리 주자)였다.
우리의 숙소였던 토가무라 이장님의 집이 생각난다. 연식이 오래되었지만 부지런히 고치고 돌보아서 그림같이 멋진 목조주택이었다. 민박으로도 운영하신다고 했던가. 집 곳곳의 목재에서 아득한 시간 동안 매일매일 쓸고 닦아진 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은은한 윤이 돌았다. 밥도 맛있었다. 낫또는 조금 어려웠지만, 저녁에 후식으로 주시던 요거트의 맛이 충격적이었다. 맛있지요? 홋카이도 산이에요. 이장님이 알려주었다. 우리는 염치없이 그 요거트를 두 개씩이나 얻어 먹고, 걸어서 읍내의 노래방에 간 다음 찾을 수 있는 한국 노래는 다 부르고 돌아왔었다.
그러나 그 여행 중에 내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이장님이 내어주신 이불에 대한 기억이다. 노래방에 갔다가 숙소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나왔더니 이장님 집의 아름다운 거실에 이미 네 명 몫의 이부자리가 깔려있었다. 다다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완전히 차단하도록 두꺼운 요가 있고, 그 위에는 거의 요만큼이나 두꺼운 이불이 얹혀있었다. 흡사 인심 좋게 자른 식빵 두 장을 겹쳐놓은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어리고 볼이 빨간 징잽이, 꽹과리잽이, 북잽이, 장구잽이가 이웃나라의 생경한 이불 속에 나란히 가두어졌다. 오야스미나사이. 이장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두가 솔직히 조금 숨이 막힌다고 속삭였다. 사물놀이패 전부가 킬킬킬킬 웃었다.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잠, 잠, 잠. 어느 틈에 눈꺼풀 바깥에 아침이 도착해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사무치는 그리움이 몰려들었다. 자고 났을 뿐인데 전생을 잊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불 속이 후끈했다. 밤 사이 한 방울의 체온도 새어나가지 않은 것이다. 이불 밖에서 어슬렁거리던 삼엄한 겨울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침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고요. 몸을 일으키니 거실창 밖으로 온통 눈, 눈, 눈이 와 있었다. 내가 덮은 이불 같은, 하얗고 엄청나게 두꺼운, 긴긴 밤 내내 살아있는 것들을 내리 눌러준, 눌러서 그들의 고통을 줄여준, 그런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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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무늬글방 수업을 앞두고 리타와 잡담을 잠깐 했다. 리타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신발 사진을 보았냐고, 거기에 아주 불편한, 보기만 해도 발 아플 것 같은 신발이 있다고, 그 신발이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대강 맞장구를 쳤다. 거짓말이었다. 그때까지 이태원 참사 유품 관련 사진을 보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신발 사진들을 찾아서 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검은 부츠와 구두를 모아놓은 구역에서 어떤 신발을 보았는데. 그 신발이 내가 스물 셋까진가 기를 쓰고 발에 끼우고 다니던 메리 제인 하이힐과 너무 닮아서. 닮아서 무엇을 느낀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스트랩이 4개쯤, 아마 굽은 6cm를 족히 넘었던 것 같고, 유광의 블랙. 녹사평역에 내려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서, 서울디지텍고등학교 지나서, 거의 꼭대기였는데. 대사관들은 나오기 전이니까 꼭대기는 아닌가. 중간에 무슨 편의점이 있었고 그 반대편이었나. 거기에 무슨 창고같은 빈티지샵이 있었단 말이야. 누구 혹시 몰라? 거기서 샀는데. 수치의 메리 제인. 왜 수치냐면 한겨울에는 유리구두보다도 꽝꽝 어는 그 불편한 메리제인 위에 타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닌 시간이 스무살 언저리 기억의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기어이 멋을 낼 때 신는 구두였다. 홍대나 이태원에 춤추러 갈 때. 지금 생각하면 춤추러 가니까 편한 신발을 신어야 했는데. 저녁 10시에 놀기 시작해서 새벽 4시에 놀기 끝나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을 그 높은 메리제인 위에서 소화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태원에 가는 날마다 멋진 밤을 보내지는 않았다. 실망스럽고 멋쩍은 밤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6호선 이태원역의 끝도 없는 에스컬레이터, 거길 올라갈 때는 매번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끝내주는 밤이 될 거야.', '오늘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억명쯤 늘어서 있는 에스컬레이터. 그게 무슨 천국의 계단이나 되는 것처럼. 그때는 지치지도 않고 그런 기대를 했다. 그럴 체력이 있었다. 또는 그러지 않기에는 너무 외로웠다. 자아를 떨어뜨릴 때까지 몸을 흔들고 싶었고, 그 모습을 누군가는 찬미하며 응시하고 있길 바랐다. 좋은 눈을 가진 사람과 임시의 연인이 되는 상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서로에게 넣어 잠근 뒤 산뜻하게 헤어지는 상상.
그러나 기분좋게 헤어질 타이밍을 놓친 어떤 날에는 지난 밤의 동행과 아침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옷을 입으면 금방 어색해지는 사이의 사람과 데면데면하게 마주앉아서 순대국이나 타코를 먹는 새벽. 밥을 씹는 그들의 모습이 죄다 참을 수 없이 귀엽고 불쌍해서 구역질이 났다. 너도 밥을 먹고 사는 존재구나. 쌀알을 씹으면 달고. 배가 차면 살 것 같고. 할라피뇨는 싫어하고. 결코 모르고 싶었는데. 다음번엔 절대로 아침밥 같은 건 같이 먹지 않으리라. 나도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데 성공하리라. 그보다 더 끔찍한 밤도 왕왕 있었다. 대부분의 밤은 비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밤은 그저 그랬다. 신이 공정하기로 마음 먹은 날에는, 이태원의 행운을 머릿수대로 잘라서 나누어주기로 결심한 날에는, 거기 있던 모두가 미적지근한 밤을 보내고 떠나게 된다.
그런 민망한 새벽을 숱하게 견디고 어렵게 건졌던, 아직까지 소중하게 빛나는 기억도 있다. 가슴팍에 뭔가의 분자 구조 그림을 타투로 새긴 남자를 만났던 날 같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을 준 약의 분자 구조였댔나? 아마 마약이었겠지? 내 키의 두 배는 되는 백인이었다.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깔아뭉개주었었는데. 항문에 시도하려다가 내가 거긴 아직 까다롭다고 하니까 몇 번이고 사과했었는데. 나도 항문으로 꼭 해보고 싶으니까 더 성장해서 만나자고 말했더니 학구열이 좋다고 웃었었다. 나는 걔를 샤워실로 데려가 꼼꼼하게 씻기면서 아까 했던 것처럼 한번, 아까 안 했던 것처럼 한번, 이렇게 두 번 더 나를 만져달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바의 여자 화장실. 거기서 울던 여자애한테 어쩌다 길고 진한 키스를 퍼부어주고 그 애를 다시 새 것 같은 여자로 만들어서 내보냈던 자랑스러운 기억. 그리고 또 어떤 클럽의 여자 화장실. 거기서 울던 내게 휴지를 건네주었던 여자.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희미한 블루스를 추듯이 돌면서 둥개둥개 달래주었던 이름모를 여자...그 여자가 너무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더 실컷 만졌을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잠깐 절친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군복무 중인 오픈리 게이였는데, 휴가 나올 때면 나를 이태원에서 만났다. 약속시간은 언제나 자정 근처였다. 걔는 매번 나는 하나도 모르는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1시에 초면이었던 사람과 2시면 절친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면 자정의 절친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면 2시의 절친이 새로 소개해준 게이들하고 놀다가 3시의 절친이 생겼다. 3시의 절친은 클럽에서 내 뒤에 바짝 붙어서 춤을 추면서 포레버 21에서 산 내 원피스를 딱 아슬아슬한 선까지 걷어올렸다. 그러면 헤테로 남자들이 그걸 부러워서 죽겠다는 듯이 쳐다봤다. 보란듯이 애인 행세를 해주다가 3시의 절친은 갑자기 나를 버리고 떠났다. 용케 번개가 잡혔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디선가 4시의 절친이 나타나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신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무슨 포차였는데 여자는 거의 없었다. 나처럼 젖내나는 여자는 더 없었다. 그곳의 신라면은 절친의 약속대로 끝내줬다. 거의 모든 테이블에서 정석보다 짭짤하게 끓인 그 신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상한 새벽이었다.
매일매일 이상한 취급을 받는 애들은 할로윈 딱 하루 정도만 자발적으로 이상하려고 이태원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좀 흉보기도 했다. 어느 할로윈이었다. 연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약속이 있었는데 어쩌다 나는 혼자였다. 한 골목의 담배 스팟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트랜스젠더 바에서 우르르 나온 사람들 사이에 있던 한 언니가 나한테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쟤들 봐, 피칠갑을 하고 주사기 꽂고 입을 찢고 뭐, 누구 무서워하라구? 저러면서 또 나를 엄청 무서워해요. 벌벌 떨어 막. 썅. 이태원이 무섭다 그러잖아? 너는 이 골목으로만 다녀. 여장남자랑 게이들 밖에 없어 이 골목에. 자기한테는 최고로 안전한 동네야, 여기가. 줄담배를 피우면서 언니들은 내게 내 몫의 시선을 가져오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입은 낙인을 낯선 사람의 어깨에 따뜻한 코트처럼 둘러주는 언니들이었다. 시선을 너무 많이 받을 때 일어나는 일도 그들은 다 알았을 텐데. 그런 미래의 일을 가지고 경고하거나 겁을 주지도 않았다. 그건 알아서 해야된다는 뜻이었겠지.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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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누군가 "눌리는 감각은 원래 끝내주지 않아?"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드디어 찾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만 그럴 리가 없어. 거기 달린 인용 트윗 하나도 아주 흥미로웠다. "불안감을 줄이고 안정감을 제공하는 용도의 압박조끼 같은 것도 나오는 걸 보면...뭔가에 적당히 눌리는 감각이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안정감을 주나봅니다." 그런 거구나. 이제는 해명할 수 있다. 내가 무거운 이불을 찾아서 헤매는 이유, 토가무라의 그 이불을 그리워 하는 이유. 자려고 누울 때마다 누가 나를 눌러줬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 조금은 숨이 막히고 싶은 이유. 허구한 날 홍대와 이태원의 클럽에서 나를 깔고 앉아줄 사람을 찾아다녔던 , 그러고 나서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이유까지도. 원래 사람은 좀 그런 거라고!
그리고 이어서 그 트윗이 실컷 욕을 먹는 것도 보았다. 압박 페티쉬 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이 이렇게나 공개적으로 말해진다니 충격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이래서 트위터 떠나고 싶다는 반응도 있었으며, 전두엽이 녹아버린 사람이나 하는 생각이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있었다. 그 말들이 자꾸 생각이 난다. 새벽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무거운 코트와 패딩을 침실로 질질 끌고 오는 내가 있는데. 이게 그냥 페티시인 걸까? 삶이 아니고? 전두엽이 녹아버린 삶도 삶이지 않아? 다들 외롭지 않아? 혼자가 아니고 싶어서 여럿으로 쪼개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누군가 꽉 눌러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주었으면 하지 않아? 타인의 무게가 필요하지 않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 국가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방탕하게 이태원에 놀러간 게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험한 줄을 뻔히 알면서 붐비는 거리로 기어나오는 사람의 안전을 누가 어떤 수로 책임지겠냐고. 좋은 밤을, 어쩌면 문란한 밤을, 생산적이지도 위생적이지도 않은 밤을 기대했다면, 바로 그 기대에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대가가 따른 것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국가의 책임이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어떤 기대에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계산방식이다. 기대에는 이미 실망이라는 깔끔한 이항대립항이 있다. 좋은 밤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다가 실망할 수 있다. 이태원에서는 그런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 억수로 운이 좋은 어떤 이들이 괜찮은 밤을 보내고, 대다수는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갔으면 그걸로 마땅한 거 아닌가. 어떤 기대에 실망이 아니라 죽음이 따랐는데도 그게 마땅한 계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 어떤 사치스럽고 방종한 기대였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내가 이태원에 대해서 뭔가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계산을 마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날의 젊은 멋쟁이와 못난이들을 찾아갔어야 할 좋은 밤의 총량을 계산하다 보면, 그리고 실망의 총량을 계산하다 보면. 잠이 잘 안 온다. 기대하며 들이쉬고, 실망하며 내쉬는 숨. 숨이 약간은 모자라게 느껴지기를 바라는 밤들. 그러나 어떤 숨은 적당히 모자라지 않다는 사실. 어떤 숨은 그냥 없어졌다는 사실. 그 없어진 숨의 총량을 계산하다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