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소의 문을 연 이후,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당초 아내와 함께 쓸 작업실 용도로 서촌에 공간을 구했지만, 각자의 로망을 얹어 낮에는 디자인 스토어, 저녁에는 위스키 시음실로 바뀌는 콘셉트로 운영하게 됐으니 말이다. 어쨌든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 공간을 연 셈인데, 모든 게 처음이니 어설픈 실수 연발의 나날이었다. 포스기 사용부터 메뉴판 제작, 제품 포장, 세금계산서 발행 등 소상공인의 기본부터 익혀야만 했다. 초반에는 찾아오는 방문객 대다수가 주변 지인들이었지만, 차츰 모르는 일반인들의 방문 빈도가 늘어나면서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 드문드문 찾아왔다. 신용카드 취소 방법을 몰라 쩔쩔매거나 한 번에 위스키 주문이 몰리면 손이 벌벌 떨리곤 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제법 목적에 충실하게 공간을 운영했다. 본인이 작업한 패턴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는 폴카랩을 기반으로 틈틈이 디자인을 하면서 부채꼴 선반에 제품군을 차근차근 늘려나갔다. 각 패턴은 포르투갈의 아줄레주 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는데, 리소그래프로 인쇄한 포스터, 엽서, 노트를 비롯해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패브릭, 파우치, 보틀백 등이 디자인 스토어다운 구색을 갖추게 했다. 여기에 폴카랩 제품과 어울리는 다른 작가의 디자인 굿즈도 선별해 들여놓았다.
내가 담당한 위스키 시음실은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3일만 저녁에 문을 열었다. 거리 자체가 늦은 시간까지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아 일단 테스트 차원에서 그렇게 시작을 했다. 그럼 낮에 나는 무엇을 하느냐고? 바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초짜 프리랜서 에디터라 고정적인 일이 많지도 않고 마냥 놀기도 뭣해서 낮 시간에는 융드립 커피를 메뉴에 추가해 봤다. 융드립은 커피 원두의 기름 성분까지 추출이 가능해 한층 진한 풍미를 내는데, 다만 융을 계속 소독해 줘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카페로 인식하는 바람에 낮에는 커피를 내리고 융을 삶느라 제법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위스키 시음실은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9종 정도 선별해 한두 달 간격으로 메뉴를 바꾸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위스키 바’도 아니고, 굳이 ‘시음실’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일단 전문적인 바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간 위스키 바를 갈 때면 높은 가격대도 부담스럽거니와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만든 위스키 시음실에서는 입문자들이 캐주얼하게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비교해보고 본인의 취향을 찾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3가지 위스키를 반 잔씩 마실 수 있는 테이스팅 샘플러를 메뉴에 넣은 이유도 그래서다.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흔히 제공하는 샘플러처럼 소량으로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비교해 가며 시음해 보는 샘플러는 나름 무용;소의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만 다룬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그나마 경험을 해본 주종이기도 하고, 블렌디드 위스키나 버번위스키보다 증류소마다 개성과 풍미의 편차가 커서 비교하는 재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페이사이드의 셰리 오크에 숙성시킨 글렌드로낙이나 글렌피딕과 아일라 섬의 피트 향이 가미된 라프로익이나 보모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술처럼 느껴질 것이다. 위스키의 높은 도수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하이볼이나 진토닉처럼 내가 평소에 즐겨 마시고 만들기도 간단한 칵테일도 메뉴에 넣었다.
다만 이름 때문에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위스키 시음실’이라 쓰인 입간판을 유심히 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위스키 시음이 가능한 곳인가 보죠?” 나는 메뉴판을 보여주며 샘플러를 소개해 줬다. 그 분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샘플러를 주문하고 3가지 위스키를 순서대로 꿀꺽꿀꺽 들이켰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가능하면 천천히 향까지 음미하는 게 매력인 술이라 설명해 주려는 찰나, “잘 마셨습니다.” 아저씨는 계산을 하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아뿔싸. 그는 이곳이 무료로 위스키 시음을 제공하는 이벤트 공간인 줄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위스키 메뉴를 설명할 때면 유료인 점을 한층 강조하게 됐다.
사실 무용;소 위스키 시음실의 메리트 중 하나는 저렴한 가격에 있다. 오픈을 준비하면서 위스키 메뉴판을 만들 때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로 가격대가 저렴한 엔트리급 싱글몰트 위스키들을 다루기도 하고, 기존 바들처럼 한 잔에 2~3만 원이 넘는 부담스러운 가격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앞서 소개한 적 있는 부산의 모티 바를 참고했다. 그곳은 메뉴판이 없는 대신, 계산을 할 때면 다른 바들에 비해 20~30퍼센트 많을 때는 절반 가까이 저렴한 편이었다. 나 역시 모티처럼 홀로 운영을 하니 비슷하게 가격을 책정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여기는 취미로 운영하시는 거죠?” 간혹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고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초짜의 판단 미스였다. 모티 바 사장님이 건물주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으니. 그렇게 서울에서 가장 저렴하게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시음실의 운영자가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