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 나를 돌보는 나
안녕 결, 민경이야.


네가 만약 월요일(2월 3일)에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오늘이 입춘이라는 사실을 네게 알려주고 싶어. 봄이 코앞까지 왔어. 두근두근. 봄소식을 들은 네 마음은 어떨지 궁금해.


어제 해야 할 일을 우다다 끝내고 친한 언니를 만나러 갔어. 언니를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되게 많을 줄 알았는데, 웬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 어제 언니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잘 기억이 안나..'였어. (웃음) 언니도 나랑 비슷한 상태였어서 둘 다 바보 같이 웃으며 소바와 스콘을 먹고 헤어졌지.


맞아, 일월에 나 조금 바보 같았던 것 같아. 평생 한 번도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적 없었는데, 지난 일월에만 카드를 세 번 잃어버렸어. 한 번은 무인과자가게에 두고 왔고, 두 번은 길바닥에 흘려버렸지. 금방 잃어버린 걸 깨닫고 찾아와서 재발급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참 나답지 않은 일이다 생각했어.


더불어 말도 예전만큼 똑 부러지게 못 하고, 사람들도 헐겁게 대하고, 전반적으로 허술한 느낌의 사람으로 지냈는데 그렇게 사는 게 왠지 즐거웠어. 이렇게 살아도 좋겠다 싶었지.


지금은 다시 예전의 나에 가까워진 것 같아. 하지만 그 헐거운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일까? 완전히 예전의 나 같지는 않아. 그리고 그게 참 마음에 든다.


일월에 친한 언니의 독서모임에 놀러 가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냐는 물음에 나는 '유기체라서 정체성이 계속 변하는 것 같다. 특히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대답했던 것 같아(잘 기억이 안 나).


신체의 노화로 신체적 긴장이 좀 풀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예전보다 감각들이 무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나를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여유로워진 것 같기도 하네.


예전의 나에게, 나는 평가의 대상이었어. 그러니까 늘 내부의 감시자가 있었고, 긴장했던 것 같아. 지금 그 감시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존재가 생겨난 것 같아. 그 존재에게 내가 붙여준 이름은 '나를 돌보는 나'. 이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일이 어제 하나 있었어.


어제 언니랑 잘 놀고 버스정류장에서 혼자가 된 그 순간 슬픔이 올라왔거든, 그 슬픔을 들여다보니 '오늘 충분히 온 힘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일 스터디 준비를 안 했다는 이유로 나를 조용히 비난하는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느끼는 슬픔이었어, 연민이었어.


예전 같았으면, 같은 상황에서 짜증과 불안을 느꼈을 거야. 그러니까, 내부의 감시자가 마음을 총괄하던 시절. '너 스터디 준비도 안 하고 10시까지 논 거야?'라고 말하는 감시자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어제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지. '나를 비난하는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존재가 생겼고, 그 존재가 마음을 총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 존재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나를 돌보는 방식으로 '오늘 비록 스터디 준비는 못 했지만 이만하면 좋은 하루였다고 애썼다고' 나를 달랬어. 그랬더니 마음이 평화로웠어.


참 신기하지.

그리고 참 든든하지.


*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

결정적 순간은 있었지만, 아마 그전부터 쌓여온 것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나와 화해하는 것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 그리고 친하게 지내기. 그리고 지금은 나를 돌봄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지.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고, 우연히 참가한 집단상담, 나의 애착 상담사 선생님과 다른 상담사 선생님들의 지지, 일기 쓰기, 대학원 진학, 몇몇 인연을 정리했던 일 등이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시간이 필요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


결, 지금 네 마음을 총괄하는 존재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니?


*


봄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했지만, 아직 바람이 너무 차네. 다음 편지를 보낼 즈음에는 봄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겠지?


감기 조심하고, 몸 마음 아프지 않고.

겨울에서 봄으로 나아가는 환절기 잘 보내길 바랄게.


다음에 또 만나:)



2025.02.02. 민경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89-2. 지난 편지의 답장을 나눌게, 2025년에 어떤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지 물었어.
"항상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순 없다고"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랜만에 답장을 쓴다.
이제 펼쳐질 2025년을 네 덕에 한번 생각해보게 됐어.
민경의 질문을 보고 내 답이 바로 떠올랐어. '발 붙이는 한 해'

얼마 전 큰 결심을 했어. 지난 몇 년 간 이민을 계획했는데, 그 계획을 철회하기로. 한국은 내게 떠나갈 곳이었는데, 다시 머무를 곳이 되었어.
다시 계획이 바뀌기 전까진 오래 정착할 둥지.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늘 그랬듯 툭, 가볍게 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작은 일은 아니었나봐. 요즘 모드가 바뀌고 있는 게 느껴져.
오래 일할 직장을 구하고, 이사를 생각하게 되고, 호흡이 긴 작업을 결심하고, 에어프라이어나 커피머신 같은 것들을 들이고 싶어지고.
올해가 저물 무렵이면 더욱 이 땅에 발 붙이고 있을 내가 그려져.
늘 모험을 추구하지만, 돌아올 집이 기반해야 모험도 있는 거겠지?
나이를 먹어가나(ㅎ ㅎ) 안정을 원하기도 하는 마음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지난 한 해 동안 받았던 상담이 막 종료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어.
항상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순 없다고. 불안과 불협화음이 늘 왔다갔다할 거라고.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 맞아.
올해도 안정과 불안, 평화와 불협화음 사이를 수차례 오가겠지.
그래도 민경의 올해에 안정과 평화가 더 많길 바라.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나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아침이 되었는데도 해는 나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는 주말이야. 어느 봄날이 되면 한껏 멋들어지게 피는 벚나무 아래를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쩐지 나무들이 벌룸벌룸 덜썩거리는 느낌이 들었어. 내일 모레가 입춘이라는데 이제 겨울에게 작별을 고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

새해가 시작되고 설날도 지난 지금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새해 결심을 1차 점검해야하는 시점인 것 같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해. 오늘은 혹은 내일은 무슨 일을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을 좋아해. 폰을 열면 달력에 일정표가 빼곡하지. 하나씩 하나씩 곶감 빼먹듯 실천하곤 해. 생각해 보면 해마다 새로운 계획들을 세웠던 것 같아.
올해는 우선 생애 최초로 토익시험에 도전해 보려고 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새해결심의 대세 중의 하나는 독서인 것 같은데 나는 독서의 여러 가지 이득 중에 올해는 독서를 통해 위로를 받고 싶어. 간접경험!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가령 중병환자라고 하더라도 끼리끼리 모여 있으면 중병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그럴 수도 있구나, 이겨낼 수 있겠구나 싶듯이, 바닷가에 알록달록 한지 미니 소원등에 쓴 대부분의 내용은 건강, 가족 건강,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이 많더라. 하지만 마모되는 신체에 건강하지 않은 생각과 습관이 보태지면 마모는 가속화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지. 올 한해 좋은 습관으로 나쁜 습관을 밀어내 보자. 새 이가 헌 이를 밀어내듯이.

하지만 너가 던진 질문은 올 한 해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은가?에 관한 내용이었으니까 이제 작명을 한 번 해보려고 해. 공식적으로 올해는 ‘푸른 뱀의 해’라는데 ‘푸른 뱀’이라니? 그럼 붉은 뱀, 황금색 뱀도 있나? 또,‘푸른’이라는 이미지는 어쩐지 ‘서슬이 퍼렀다’라는 문구가 떠올라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푸른’은 희망과 성장을 의미한다고 하니 좋게 좋게 받아들여야겠어. 지혜롭게 성장하는 한 해!
너가 작년에 시도했었던 자신과 가까워 한 해를 나도 시도해 볼까 생각도 해 본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나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착한 딸로, 순종적인 아내와 며느리로, 좋은 엄마로 살았던 삶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야.

그렇지만 나는 우선 엉크러진 실타래를 먼서 풀어놓아야 어떤 형태로든 뜨개를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 한해에 ‘용서’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어두운 감정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쉽지 않을 것 같아 시작도 하기 전에 과연 할 수 있을까 부담스러워. 하지만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내가 나로 살기 위해...라고 말하면서도 저어되는 이름 forgiveness!
***************************************************************************

연초에 가족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인생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플랜 비를 준비해야한다는 것,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쓰릴 있고 플랜비가 더 멋더러 질 수도 있다는 것.

민경에게 행운도 함께하는 2025년이 되기를 바래~~
*


그믐에게,


안녕! 우선 새해의 안녕을 빌어주어 고마워. 너의 말대로 안정과 불안정, 평화와 불협화음 사이를 오가며 올 한해를 바삐 보내게 될 것 같아. 올해 끝자락에 둘다 그런 한해를 무사히 살아내었다고 회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의 변화가 느껴지는 답장이었어. 이민을 결심했던 언젠가의 너, 그리고 한국에 발붙이기로 한 지금의 너. 어떤 마음들이었을지 내가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네 마음이 너를 위해 애쓴 결과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너의 올해를 응원할게:)


**


달래에게,


오늘 편지를 나도 봄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너도 편지에 입춘 이야기를 써주었네, 우리 둘다 봄을 기다리고 있나봐. (웃음) 편지를 읽으면서 궁금한 게 많았어. 딸도, 아내도, 며느리도, 그리고 엄마도 아닌 온전히 너인 너는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네가 올해 어떤 것들을 용서하며 지내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너와 가까워질 너의 한해를 응원할게:)


계획 세우기와 독서는 나도 참 좋아하는 활동이야. 나도 책을 읽으면서 자주 위로 받곤하는데, 혹시 어떤 간접 경험을 원하는지 알려주면 책 추천해줄게!


추신. 붉은 뱀, 황금 뱀의 해도 있어, 정사년과 기사년! 


*이 편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곳 주소를 통해 전해줘
*혹시 편지를 그만 받아보고 싶다면, 여기를 눌러줘
stibee

이 메일은 스티비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