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바치는 장혜영
은빈: 얼마 전에 제가 혜정 님을 우연히 뵈었어요.
혜영: 그러셨구나!
은빈: 제가 공연을 하는데요. 엄청 피곤한 상태로 서교에 있는 무슨 연습실 로비에 들어갔었는데… 어디였지, 생활문화센터 서교였을까?
혜영: 홍대에요. 맞죠?
은빈: 네. 혜정 님이 앉아 계시더라고요. 훌라 치마 같은 걸 입고.
혜영: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은빈: 제가 너무 팬이라고, 혹시 함께 사진 찍어주실 수 있나요? 여쭤봤는데 다른 분이 오셔서 혜정 님과 소통하시고 사진까지는 조금 어렵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공연 잘 올리시라고 인사 하고 왔는데요. 혜영 님은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 혜정 님과는 어떻게 지내실까. 삶의 양상이 혹은 관계가 달라졌을까 그런 것도 새삼스럽게 궁금하더라고요.
저는 장혜영 님을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제 삶에 여러모로 큰 충격과 영향을 받았어요. 당시 저는 장애인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고, 혜영 님이 어떤 기획을 하고 삶을 재편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렇게 살지 않으면 내 삶이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혜영 님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완전히 혜정 중심으로 자기 삶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전면적으로 혜정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구나. 되게 충격을 받았어요.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이렇게 접근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혜영: 하아… 같이 지낼 시간이 너무 없어요.
하지만 아쉬워하는 건 저뿐이고요. 혜정은 전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다고 전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걸 좀 슬퍼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너무 다행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제가 아침 일찍 나가서 밤에 들어오거든요. 근데 아침에 나갈 때 혜정이 한결같이 저한테 커피 내놓으라고 해요.
처음에는 서러워했어요. 나를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대하다니, 커피 나오는 기계로 생각하는구나, 이랬는데 이제는 그 레벨은 한참 뛰어넘었어요.
요즘은 커피 주기 전에 끝까지 물어봐요. “‘잘 잤어?’라고 먼저 빨리 해줘.” “‘잘 잤어?’ 라고 해줘”이렇게 한 3~4 번 하면 “잘 잤어?” 라고 정말 씹어 뱉듯이 말해줘요.
혜정이 원하는 커피는 제가 내리는 커피가 아니라 티오피예요. 매번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나가서 그걸 사가지고 와서 갖다 바쳐야 하거든요. 그러면 혜정은 그걸 정말 0.1초 만에 다 마셔버리고, 꼭 그 캔을 제가 나갈 때 제 가방에 버려요. 볼 장 다 봤으니까 캔째로 추방해야 되는 거죠.
제가 밖에다가 그걸 버리고 와야 되는데, 너무 바빠서 그냥 도로 가지고 들어온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배신감을 느낀 거죠. 버린 줄 알았는데 가지고 오잖아!
그래서 이젠 집에 돌아오면 저를 반기는 게 아니라 가방 속에 캔이 있나 없나부터 확인해요. 혹시 밤까지 가지고 있었을까 봐. 혜정이 “한번 확인해 볼까.” 그러면 저는 “‘다녀왔어?’를 먼저 해야지”/“한번 확인해 볼까?”/“‘다녀왔어?’ 해줘.”/“다녀왔어?”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엎드려 절 받고 나서 “자, 봐, 없지?” 그러죠.
이런 루틴을 지키는 게 연결감을 유지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아침에 커피 진상하고, 그리고 나가서 제가 캔을 잘 버렸는지 가방을 확인하는 걸로 귀가 인사를 대신하고.
은빈: 저는 그런 게 궁금했어요. 제 연인의 이름은 우였는데요. 우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다. 어디 가서 아기 얘기만 하는 엄마처럼 다른 사람을 경유해서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제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혜영 님은 그런 말하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난처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혜정 님이 원하는 건 아닐 수 있잖아요. 서로 동의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
혜정: 그렇죠.
은빈: 네. 내가 사랑하는, 동시에 나의 삶에 너무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 그 사람의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오해도 사지 않을까. 저 사람은 딴 사람 얘기만 하네, 혹은 뭐 제 경우에는 '우 없으면 얘기를 못하나?' 이런 식으로. 혜영 님도 혜정 없으면 자기 얘기 못 하네 이런 말을 듣지 않았을까? 그런 게 궁금했어요. 장애인 당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관계없는 사람도 아닌 상태에서… 저는 굉장히 왔다갔다 했던 것 같거든요.
혜영: 엄청나게 감동적인 질문이네요. 왜냐면 그 질문이 엄청나게 진짜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건 혜정이 시설에 가기 전에는 자각도 못 했던 질문이었어요. 혜정이 시설에 가고 나서야 제가 혜정 없이는 자기소개를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때부터 저를 발명하게 되기까지 끝없이 곱씹었던 질문이거든요.
사실 어렸을 때 혜정과 함께 사는 상황에 처했던 건 저의 선택은 아니잖아요. 그냥 저한테 주어져 있는 삶의 조건이었던 거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됐죠. 운이 좋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 혜정을 사랑하게 된 거죠. 마음속에 이 사람의 공간이 생기고, 이 사람이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그런 존재가 되었어요.
나중에 시설에 있는 혜정을 데려와 함께 살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번에는 내 발로 다시 이 사람과의 삶에 도전하고 싶다, 라는 마음이 제 안에 있다는 걸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스스로한테 시간을 줬던 것 같아요. 제가 선택했다기보다도, 모르겠어요. 그냥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아, 다시 찾아가야 되는구나, 알겠더라고요. 제가 선택하지 않은 만남과 선택하지 않은 헤어짐이 아니라, 제가 선택한 만남, 헤어지더라도 선택한 헤어짐이어야지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자유는 저의 자유이기도 하지만 혜정이라고 하는 인간의 자유이기도 하다는 윤리적 인식도 그때 분명해진 거죠.
같이 살아보니까 굉장히 많은 게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요. 예전에는 자유라든가 아니면 동의라든가 이런 개념이 정말 딱 경계선이 딱 그어지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경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흔들리는 거예요.
은빈: 맞아요.
혜영: 네, 그걸 알겠더라고요. 끝없이 물어보는데 어떤 때에는 대답이 일관되고, 어떤 때에는 대답이 달라지고…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상태인 거죠.
언어가 그 자체로 의미가 다 전달되는 게 아니잖아요. 말 안에 뭔가를 심어서 말할 수도 있죠. Yes지만 사실은 No인 경우도 있고. 같은 사람에게 수없이 동의를 구하고 수락 받고 거절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짜 Yes와 진짜 No를 느끼게 돼요. ‘이 사람은 나한테 진심이 아니구나’라든가, ‘아, 이 사람은 이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구나’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나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최초에 뭘 하고 싶었는지 잘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 행동의 동기를 잘 아는 거. 그러고 나면 나머지는 어차피 상대하고 같이 만드는 거니까. 경계 언저리에서 형태가 결정되고, 그것이 매우 편안하다. 왜냐하면 공동의 책임이라서.
혜정하고 관계를 맺을 때 동의의 문제를 진짜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이제 혜정이 2017년 여름에 탈시설하고 5년이 지났거든요. 그래서 그건 어느 정도 답을 찾았죠.
미안하지만 이런 언니를 둔 너의 죄다.
일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혜영: 예전에는 혜정아 언니하고 사는 게 좋아, 시설에서 사는 게 좋아? 라는 질문을 못 했었거든요. 그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어요. 혜정이 선택한 게 제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런 대답을 들으면 제가 쌓아 올려온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봐 되게 두려워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불쑥 물어봤는데, 또 물어보면 참 사람 마음이… 좋은 대답을 듣고 싶잖아요.
담: 맞아요. 저도 떨리네요.
혜영: 근데 혜정이 너무 선선히 언니랑 사는 게 좋지! 그러는 거예요.
유리: 하아아아아ㅠㅜㅠㅜ
혜영: 네, 그렇습니다. 그런 거죠. 살다 보면 그런 순간도 오더라고요.
유리: 진짜 큰 선물이에요.
담: 그래서 커피를 그렇게 열심히…
혜영: 맞아요. 이번 생은 저는 이제 끝났어요. 혜정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 기계로 궤도가 결정이 된 삶이고… 그런데 그게 정말 좋더라고요. 나이 먹는 게 그 전엔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궤도로 살아야 될지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잘못 정한 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살 때는 되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결정이 되어서 좋아요.
이웃집 장혜영
혜영: 아! 저 홍보할 게 있는데요. 2월에 지역 사무소를 오픈해요. 놀러 오세요.
담: 정말요? 너무 좋아요!
혜영: 네, 마포 을에 출마할 거고요. 사무소는 망원역 2번 출구에서 한 블록 걸어서 안쪽, 그러니까 망원시장 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건물 4층에 있어요.
은빈: 어머. <가원>에서 가지칠리탕수 먹고 가면 딱 되겠다.
담: 드디어 지역구 의원에 도전을 하시는군요.
혜영: 네, 그렇습니다.
담: 지역구 의원은 어떻게 될 수 있나요?
혜영: 7만 표 정도를 받으면 당선이죠. 마포 을은 대략 19만 유권자가 계시는 동네인데요, 이번에는 제가 도전해 보려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유리: 제가 다 떨리네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의원님이 대선에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재 한국에는 대통령 나이 제한이 있잖아요. 나이 제한을 없애고 젊은 사람이 대선에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예를 들면 장혜영이라든가. 왜냐면 2선 의원, 3선 의원이 되기 위해서 자기 텃밭을 넓히려다 보면, 자기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다 보면 사람이 계속 타협하게 될 수밖에 없어. 그런데 한 번 타협을 해본 거랑 안 해본 거랑 감각이 다르거든요. 타협 안 해본 사람이 하는 민주 정치가 궁금해요.
담: 언젠가 굉장한 타협을 한 적이 있나 본데?
유리: 지금은 은퇴하신, 존경하는 선생님을 인터뷰 한 적이 있어요. 후회되는 게 있다면 뭐냐고 제가 여쭤봤더니 타협했던 것, 이렇게 답하시더라고요. 근데 저도 그래요. 사실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사는 모든 인간이 타협을 해요. 의사결정을 할 때,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동의까지 얻어야 내가 바라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건 나 또한 특정한 조건에서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의를 표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예요.
정당 정치를 한다는 것, 정당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타협이기도 하잖아요.
혜영: 타협이죠. 맞아요.
유리: 누군가 너무 큰 타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아직 새파란 청년일 때 대통령이 된다면 어떨까? 저는 그 자리에 장혜영을 넣어서 상상해 보기도 했던 거고요. 물론 타협을 해봤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런 거 모르는 사람, 꺾여 보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어떨까?
담: 동감이에요. 그러니까 현실에 찌들고 이런 거 없이 직진하면 어떻게 되지?
예인: 그러니까! 그러면 나 여자랑 결혼할 수 있는데!
담: 전 얘기 들으면서 죄송하게도 느껴지네요. 왜냐면 저는 어떤 정당에 지지를 보낼 때 내 생애주기 내에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믿지 않거든요. 그게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서 그런 게 아니고, 어찌 보면 되게 짙은 체념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실감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하지 않은 상태로, 다만 내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수정당을 지지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보통 응원도 티 나게 하지 않죠.
그래서 저는 정치를 응원하는 방법이 궁금해요. 시민이 정치를 느낄 수 없어서 분노할 수도 있지만, 정치도 시민을 느낄 수 없어서 불안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장혜영 의원님이 말씀하신 그 소수의 청중이 어떤 방식으로 응원하면 정치인에게 닿게 되나요? 후원을 제외하고요.
유리: 저는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장혜영 의원님 SNS 게시물을 전체 공개로 공유하면서 장혜영을 대통령으로! 이런 주접 게시물 계속 쓰고 그랬어요.
혜영: 그런 게 정말 큰 힘이 돼요.
담: 그렇군요. 그게 다 닿는군요.
혜영: 엄청 잘 보여요. (유리: 보여요…?) 네. 그런 지지 발언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청중들한테 해주시는 거. '나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해'라는 얘기를 공적인 장소에서 해 주시는 게 큰 힘이 돼요. SNS 게시물 하나하나가 도움이 돼요. 예인님 트위터도 알아요. (예인: 알아요…?) 정의당 지지자분들은 진짜 부끄럼이 많으시거든요. 저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기 지지자 분들이 없다고 생각해요.
예인, 유리: 저희 잠시만 숨어 있다가 다시 올게요….
담: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이라는 딜레마가 정의당에 항상 있었죠. 당연히 커다란 응원을 받아본 경험이 적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 들리겠나 싶어서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혜영: 맞아요. 근데 진짜 잘 들려요. 정말로요. 그래서 뭐 예를 들어 공무원이다, 정치적 발언이 공적으로는 불가한 직업군에 계시다, 그런 경우에는 의원실에 응원 전화를 해 주시는 게 최고입니다.
담: 의원실에!
혜영: 의원실에 전화하시면 보통 저희 보좌진들이 받아요.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받아 내야 하는, 시달리는 전화죠. 근데 전화를 받았는데 응원 전화다? 그때 팀원들이 느끼는 힘이 어마어마 합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주고 있구나, 특히 우리가 대변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당사자분들이 ‘그 활동 정말 좋았어요’라는 얘기를 해주시면 전화받고 울기도 해요.
결국은 일을 다 팀으로 한다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한 팀의 리더이기도 하니까 의원실을 응원해 주시는 게 모두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되죠.
담: 저는 저 사람도 이웃이구나, 저기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지는 국회의원은 장혜영 의원님이 처음이에요. 저 사람도 어딘가에서 술도 마시고 가족들하고 투닥거리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국회의원이 딱 한 명. 대부분 정치인은 무슨 기표처럼 느꼈던 것 같아요. 시민들에게도 정치인을 사람으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할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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