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전하는 글진 geulzine의 뉴스레터 03호
FEATURE STORY

탈주 스캔들 (3) 같이 놔두면 사고치는 놈


둘이 공범이 되지 않겠냐고, 방금 해진이 인하에게 한 제안을 한 줄 요약하면 그랬다. 아득해진 인하에게 그의 시선이 고정됐다.

“주 형사님께선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뭐?”

정작 인하를 선택지 앞에 몰아세우는 해진은, 무슨 점심 메뉴라도 제안하는 것처럼 침착할 뿐이었다.

“난 우리 주 형사님 꽤 잘 아는데.”

그리고 아까부터 그녀를 살살 긁어댔다.

“예를 들어 내가 형사님 쫓겨난 거냐고, 혹시 더 일하고 싶었냐고 물어볼 때마다 이렇게, 더 인상 쓰시는 거라든가.”

거기에 하나 더. 해진은 적당히 대답하는 것 같으면서도 꽤 신중했고, 완강했다. 여러모로 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긴 터널을 나와 쭉 뻗은 고가도로는 희고 거대한 교각까지 이어졌다.

대낮에도 통행량이 거의 없는 교각은 해문 교도소와 바깥세상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몇 km에 달하는 다리 위 와이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달리는 차의 앞 유리창 너머로 줄줄이 이어진 교각의 와이어가 인상을 쓴 인하의 얼굴에 연이어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왔다.

“아무리 싫으셔도 할 건 해야죠.”

그녀 이마 쪽으로 뻗어진 큼지막한 손바닥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우리 서로 알아갈 시간이 필요해요, 그쵸?”

조금만 시간을 끌면 돼, 인하는 출동한 인력과 합류할 작정이었으나 곧 차창 너머로 들이닥친 풍경에 순간 말을 잊고 얼굴이 새파래졌다.
왜 여기서 핸들을 꺾지?

“뭘 또 그렇게 놀라요.”

설마 했는데, 그럼 해문 교도소의 철통 감시망을 정면 돌파할 방법이란 게 지금.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아까부터 닳도록 말했잖아요. 나 직진 취향이라니까요.”
“아니, 야.”
“그래서 형사님의 협조가 필요하고요.”

내밀어진 이 손을 잡으면 공범이 된다.
암만 급한 불 끄려고 저지른 일이라도 나중에 깜지 시말서 몇 장 쓰는 걸로 수습하긴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자, 어떻게 하시겠어요?”

by 가넷베리_가넷베리의 숏텐츠

정신건강칼럼  


첫 번째 특별편은 ‘조현병에 대한 사실과 편견’을 주제로 준비했습니다.
왜 하필 ‘조현병’이 주제일까요? 우리는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조현병이었다'라는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 표현이 만들어내는 오해를 누구보다 자주 마주하기에 그럴 때마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조현병은 하나의 정신질환일 뿐입니다.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병행하면 일상생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미디어에서는 여전히 조현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인구의 1%가 앓고 있는 조현병. 그 안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술을 싫어하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 다양한 성향과 모습을 지닌 이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일부 사례만으로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보다, 조현병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특별편에서는 조현병에 대한 편견을 짚어보려 합니다.

by 김지혜


필름플래그 : 나비, 날다


1. 고치-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촬영에도 외장 하드가 사용되지만, 내가 한창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절엔  ‘촬영 테이프’라는 것이 있었다. 보통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60분에서 90분 짜리 테이프가 100개에서 150개 정도 쌓였다. 촬영 기간이 길어지거나 대작(大作 )인 경우엔 이 개수를 훨씬 뛰어넘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면 영상을 문자로 옮기는 ‘프리뷰 작업’에 들어간다. 촬영 영상의 내용과 현장음, 그리고 인터뷰를 기록한 프리뷰 노트는 프로그램의 뼈대를 만드는 기본 데이터다. 촬영 시간과 현장음의 밀도 그리고 인터뷰의 길이에 따라 테이프 1개당 A4 용지 30장 분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100개에서 150개의 프리뷰가 쌓이면, 두꺼운 백과사전 두세 권에 맞먹는  분량이 된다. 

작가는 촬영테이프와 프리뷰 노트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짜기 위한 면밀한 분석에 들어간다. 나는 이 지난한 작업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하나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프리뷰 노트 가장자리에 촬영 테이프 번호에 맞춰 필름 플래그를 붙이는 일이었다. 작가들은 이 필름플래그를 ‘나비’라고 불렀다.

by서사이_도구의 사생활


정해진 모양 없이 그저 끄적이는 시간이 좋다.

손이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선을 긋다 보면,
어느새 무의식 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흐르는 쪽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고를 수 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는 선택을.
온전히 나만의 세계이기에 더 편안하다.

보이는 모든 색을 꺼내어 천천히 칠하고,
그 위에 다시 덧칠하며 조금씩 형태를 만들어 간다.
겉으로는 단순한 끄적임 같지만,
그 안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담겨있다.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히고
고치고 다시 한번 고치고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느낌 그대로의 장면이 완성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것을 조용히 꺼내어 놓는 일에 가깝다.

나는 그 시간이 좋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끄적인다.

by 이지선_햇살 좋은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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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침_명 프로젝트

"이 책의 모든 위대한 부분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책은 결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 《자유론》 헌사 中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이라 불리는 책,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하지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놀랍고도 솔직한 고백을 세상은 160년 동안 이 문장을 밀의 '과한 사랑' 혹은 '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찬사' 정도로 축소해 왔습니다. 오늘은 그 '고백'의 주인공이자, 사상의 동반자였던 해리엇 테일러 밀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운명적 만남: 1830년의 저녁 식사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였던 유니테리언 서클의 저녁 식사 자리. 스물 두 살의 해리엇은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였지만, 그곳에서 만난 24세의 청년 존 스튜어트 밀을 지성으로 압도합니다. 밀은 훗날 그녀를 "내가 만난 가장 명석한 영혼"이라 회고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었습니다. 21년간 매일같이 편지를 나누며 문장을 벼리고 논리를 다듬은 '지적 동맹'에 가까웠습니다.

세상이 무시한 밀의 '양심 고백'
1859년, 해리엇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출간된 《자유론》. 밀은 책의 헌사를 통해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 책이 사실상 해리엇과의 공동 저작이라는 고백이었죠. 그러나 이 고백은 바로 사회의 벽에 부딪힙니다.

"밀이 사랑에 눈이 멀어 죽은 아내를 과하게 칭송하고 있다.“

학자들은 해리엇을 밀의 사상을 받아 적은 '필기사'나 정서적 '뮤즈'로 축소시켰습니다.밀이 ‘신뢰받는 브랜드 였다면, 해리엇은 그 브랜드의 핵심 컨텐츠를 설계한 기획자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남성위주의 사회는 브랜드만을 기억했고, 기획자의 이름은 고의적으로 누락되었습니다. <더 보기>


by 윤명주_사적인 지각변동

나는 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나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를 지니고 산다고 하지만, 나는 페르소나를 '가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기왕에 가식을 떨거라면 위악이 아니라 위선을 떠는 게 왜 나빠?"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나마 마음의 짐은 덜었다.

페르소나가 강하면 본래 자아를 잃는다고들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억압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과정 자체도 좋다고 볼 수가 없다. 오랜 세월 억압해 온 결과로 나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오래된 질문이었다.

성격, 심리 검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끔 답을 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페르소나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타당도 항목으로 어느 정도 거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이상화 된 나 자신'에 맞는 항목을 고르고 있는 건 아닐지 의심했다. 페르소나가 전면에 나서서 사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심리 검사의 답도 그 모습에 맞는 항목에 체크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런 정도라면 페르소나가 원래 자아를 삼켜버린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은 정도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나의 사회적 자아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했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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