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베르제

으슬으슬 추운 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 한증막처럼 푹푹 찌는 날 살얼음 띄워진 냉면. 들큰한 취기를 가지고 집에 가는 길 사먹는 편의점 아이스크림, 하얀 입김을 알아챌 즈음 다시 돌아온 반가운 군고구마. 이삿날 자장면, 결혼식장 갈비탕까지. 계절과 날씨, 상황에 맞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나에겐 또한 계절과 날씨, 상황에 맞는 음악이 있다. 버스 창가 너머 모든 사람과 사물이 평등하게 빗방울에 젖어가는 걸 보고 있자면, 중2병이 한창일 적 윤하의 ‘우산’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몹시도 뻔하지만 이따금 여수를 찾을 때마다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듣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비 백 마리가 규칙성 없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머릿속이 온갖 잡념으로 혼란할 때에는 ‘내 안의 평화’를 이루고자 곽진언이 부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찾는다. 루시드 폴의 차분한 목소리도 좋다.

아이유가 부른 ‘마음’은 그의 수많은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나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많이 들은 곡이었다. 한때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최근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며칠 전 마침내 “아, ‘마음’은 이럴 때 들어야지.” 하고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고온다습한 우리나라의 여름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지만 이따금 여름만이 줄 수 있는 평화를 즐길 때가 있다. 여름의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바깥은 햇볕이 적당히 내리쬐어야 할 것, 햇빛이 활엽수 나뭇잎에 비춰져 연한 녹색을 띨 것,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을 감상하는 나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쾌적한 실내에 있을 것. (오 분까지는 잠깐 실외에서 여름의 습기를 느껴도 괜찮다. 오 분까지는.) 간결한 피아노와 기타 반주, 약간의 코러스로만 구성된 담백한 노래 ‘마음’은 여름이 선사하는 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들어야 하는 노래였다. 콘서트에서 아이유는 이 노래를 관객과 함께 부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는 꼭 관객에게 ‘티 없이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그 전까지는 ‘마음’을 막연하게만 좋아했는데, 며칠 전 그 날의 분위기 속에서 가사를 곱씹은 이후에야, 아이유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주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던 ‘마음’의 관점에서 부르는 노래.”

마음이 진짜일 때 감정도 진짜였다. 수많은 시그널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간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그널로써 언어는 가장 직설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언어는 이따금씩 그의 마음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사랑해’가 정말 사랑해서 하는 말인지. ‘힘내’라는 말은 힘 빠지는 대화를 얼른 마치기 위한 신호탄은 아닌지. ‘잘 될거야’를 말하는 그에게 얼마만큼의 걱정이 묻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스물 일곱 해를 돌이켜 보면 비언어적인 시그널이 더 많은 생각과 더 깊은 감정을 부른 것 같다. 간신히 괴로움을 털어놓는 이의 얼굴을 별말 없이 은근하게 바라보는 이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도 묵직하다. 일 년에 일곱 번 만나지는 못했어도 칠 년동안 묵묵히 일곱 번 만난 사람과의 관계에는 어떤 의심도 무의미하다. 쉽게 거두지 않는 눈빛과 꾸준한 시간이 두 사람의 진심을 투영했을 뿐이다. 이렇게 타인이 나에게 주는 마음, 내가 타인에게 주는 마음에는 민감하게 반응해왔던 것 같다.

마음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쉽게 잊혀지는 것이기도 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마음은 늘 바깥만 향했다. 내 마음은 나에게 항상 후순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인생이 조금 억울했다. 내 탓만 하기에는 사회가 도를 넘어 야박하고 사람들이 지나치게 약았다. 아등바등 애써온 마음이 스스로 애틋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히 나를 위해 ‘네임밸류’와 ‘연봉’이 보장된 대기업을 포기한 사건은 ‘이제 좀 마음을 돌보겠다’는 선언을 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 패러다임의 대격변(?) 한가운데 우연히 다시 듣게 된 ‘마음’은 정말이지 시의적절했던 것이다.

툭, 웃음이 터지면 그건 너

쿵, 내려앉으면은 그건 너

축, 머금고 있다면 그건 너

둥, 울림이 생긴다면 그건 너

늘 나를 보며 ‘더운 숨을 쉬고’, 나에게 눈을 떼지 못해 ‘하루종일 눈이 시릴’ 이가 내 마음 말고 또 있을까. 감히 주름도 없이 영영 살아 있을 것이라는 작지만 확실하고 결연한 고백. 그 고백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거나, 찾아오거나, 대답하거나, 달래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마음을 꾸준히 알아주고 찾아가고 대답하고 달래줄 것 같다.

(2020.06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