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2024년 9월 마지막주 편지

보내는 사람 : 김스피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께선 추석과 지난 주말을 잘 보내셨나요? 이번 추석 연휴 기간이 길어 해외에 다녀오신 분들도 계실텐데요. 저는 가장 좋아하는 삼색전을 먹었습니다.

 

최근엔 마치 여름 스위치에서 가을 스위치로 ‘딸깍’ 전환된 것처럼 갑자기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졌는데요. 이 때문에 지난 주말 동안은 크게 어리둥절한 채로 보냈습니다.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도서관에 갈 때 책 더미를 끙끙 지고 손선풍기에 의지해 땀을 뻘뻘 흘렸었는데, 주말엔 긴팔옷을 꺼내어 입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때보다도 후덥지근하고 힘들었던 여름이 지나고 나니 상쾌한 가을날이 조금이나마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충청, 남부 지역 일부에선 폭우로 인해 수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디 복구가 빠른 시일 내에 되고 큰 피해가 없길 기원합니다.

 

*

 

9월엔 추석 연휴 등으로 인해 어쩌다보니 9월 첫째주 편지(💌‘디지털 저장 강박’의 시대 : 잡동사니와 기억) 이후 두 번째로 보내드리는 편지가 마지막주 레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비교적 ‘쓸모’와 동떨어진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는데요.

 

다만 오래 전부터 생각한건데, 인스피아를 ‘쓰면서’ 읽는 것과 휴재 기간 동안 ‘그냥’ 읽는 것은 차이가 꽤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인스피아를 연재하면서 동시에 책을 읽을 때는 어떤 책을 읽든지간에 ‘어디에 써먹지?’라는 생각을 계속 골똘하게 하게 되고, 또 어떤 재밌는 구절을 보면 펄쩍 뛰면서 ‘바로 이걸 레터에 써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왠지 인스피아를 당장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왠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평소 책 읽기 텐션의 70~80% 정도 수준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책을 읽고 나서 항상 메모를 남기긴 하지만, 인스피아와는 달리 혼자만 보는 메모이기 때문에 조금은 쓸쓸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9월 마지막주 에세이 레터에서는 ‘써먹기 위한 메모와 읽기/관찰하기’에 대해 단상을 적어볼까 합니다. 그간 인스피아를 써오며 읽기와 ‘메모’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이야기입니다.  

그 밖에도 지난 레터의 마지막에 소개했던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에 대한 내용도 - 몇 년 전 관련 기사를 여행코너에서 읽고 나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북마크를 해두었던 것입니다(링크·‘담배꽁초를 4213개 모았다고?’). 무엇보다도, 지난 레터에서 다룬 두 권의 책 중 한권은 3년 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려 다시 읽어본 것이었죠.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연구자님께선 ‘김스피는 기억력이 참 좋거나 굉장한 메모 노하우를 가지고 있겠군’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정말로 전혀 없습니다. 저는 조르주 페렉의 위의 대목을 읽으면서 격한 공감을 했고1) 심지어 반전 있는 영화를 두 번 보고서 두 번 깜짝 놀랄 수 있는 금붕어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대신 보통 남들이 신경쓰지 않는 묘한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기억하곤 하죠.

그리고 저는, 오래전부터 어쩌면 ‘기억력’이라는 단어엔 조금은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

‘기억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기본적으로 ‘능력’ ‘유능함’ 등이 떠오릅니다.

 

높이 뛰기 ‘능력’이라든지 한 시간 안에 막대한 양의 버거를 먹어치우는 ‘능력’ 등,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측정 가능한 능력처럼요. 무대에 올라 눈을 감고서 파이 소수점 이하 막대한 양의 숫자를 줄줄 외거나 한국의 위인 백명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등 대단한 ‘기억력 차력쇼’를 보여주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과연 정말 기억력은 그런 것일까요?

 

저는 어쩌면 그보다는, 기억력은 ‘어떤 상황(글 등)과의 인상적인 소통 경험의 결과 남는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좀 거창한 얘기같이 보이지만, 예를 들면 KTX를 타고 졸면서 덩어리진 풍경들을 보며 여행한다면 ‘오면서 어떤 게 기억에 남았어?’라는 질문에 ‘몰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만약 오는 길에 강도를 당했거나, 고라니를 만나 함께 쇼츠를 찍었다면 그런 건 어쨌든 간에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겠죠.

 

실제로 ‘정서와 기억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많은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링크)

 

여하튼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평소에 하곤 하는 ‘잡동사니 메모’로 고스란히 끌고 와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잡동사니 메모를 해두고 또 나중에 꺼내어 쓰는 핵심 요인은 ‘우리가 평소 기사를 보거나 어떤 유튜브 댓글을 보거나 풍경을 바라봤을 때 어떤 강렬한 감정(정서)을 느꼈는지’에 대한 것일지 모릅니다. 즉 메모가 개인적이고 해찰적인(?) 내용일 수록 우리가 그것을 나중에 꺼내어 기억하기 좋다는 거죠. 위에서도 인용했던 조르주 페렉의 저 대목은, 제가 저걸 보고 깜짝 놀라고 ‘나랑 똑같네!’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어떻게든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뇌리에 남은 것이고요. 만약 억지로 제가 조르주 페렉의 생애와 그의 책의 핵심 내용을 줄줄 백과사전을 외듯 외우려고 했다면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걸 억지로 기억하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써야했겠고요.

그리고 애초에 곰곰 생각해보면 ‘억지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대체로 기억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

 

무언가를 잘 ‘써먹기’ 위해선 그것이 내게 어떤 종류의 편향적인 영감을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 다섯명 정도의 문학평론가가 쓴 글들을 모은 한 팸플릿을 사은품으로 받아 읽어보았었는데요. 재밌었던 건, 다섯명이 각기 다른 작품에 대해 쓴 다섯편의 글이 공통적으로 ‘그런데 정작...’이라는 (혹은 유사한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어떤 작품을 이야기할 때,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서두에 짧게 소개하고서 ‘그런데 정작...’이라는 말로 - 자신이 진짜 그 작품에서 주목한 해찰포인트에 집중하며 본격적인 글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것은 대체로 그 사람이 책을 읽을 때 유독 걸려넘어진 대목이고, 애초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그런 대목 하나정도만 남으면 족합니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써먹을 수 있는’ 메모가 되죠.

 

이런 관찰과 메모에선 심지어 소재나 주제보다도 ‘편향적인 감’이 주인공이 됩니다.

 

요는, ‘왠지 모르겠지만 - 느낌적인 느낌으로 - 이건 왠지 언젠가 쓸 것 같아! 잘 모르겠는데 재밌네!’ 라는 자신의 감을 따르는 것이죠. 이런 감각은 대체로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써먹을 수 있겠다”라는 느낌으로 수렴됩니다.

 

실제로 많은 작가나 창작자들은 이런 무의식적인 ‘감’에 이끌려 잡동사니적 메모를 모아왔죠. 이런 감은 대체로 엄격한 분류에 따라 나뉘지 않습니다. (이는 제가 메모의 엄격한 '분류'에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작가이자 자동차 마니아 조 메이올Joe Mayall은 시시때때로 폐차장을 그저 돌아다녔다고 하는데요. 딱히 특정한 부품을 구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돌아다니면서 영감이 될만한 것들을 모으기 위해서였죠.

저는 아래와 같은 대목을 읽으며, 평소 제가 잡동사니를 해찰하고 메모하는 과정과도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조율사로 불리는 울리히 게르하르츠는 세계 최정상급의 연주자들이 앞다투어 찾는 이입니다. 그는 공연장의 크기, 습도, 피아노의 크기 등을 세심하게 신경써서 피아노를 조율하고 피아니스트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피아노가 최고의 음을 낼 수 있도록 해주죠. 

그는 기계가 거의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조율 작업은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대체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장기 동료로 구성된 안정적인 팀은 집단사고에 빠지고 혁신 능력을 잃게 됨 “

최근 SNS에서 발견해 흥미롭게 본 글(Geek News)입니다. 아마 연구자님들 가운데서도 보신 분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통상 AI로 인해 숙련된 개발자(노동자)들만 남고, 주니어급의 초보 개발자들은 해고되거나 더이상 채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저 역시 이런 소식들을 볼 때마다(링크) 눈살을 찌푸린 채로,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체념하듯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고 다른 측면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막연히 '숙련자가 짱'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막상 저나 제 주변을 보더라도 인턴이나 수습 때 가장 발로 뛰며 열정에 불타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 같고요. 이런 초심자의 에너지와 낯선 아이디어는 조직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개발자' 만의 문제는 아닐테고요.

이 이야기는 흥미로운 주제라 조금 더 자세하게 나중에 레터에서도 본격적으로 풀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인터넷 아카이브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 BBC의 기사입니다. 실은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역사,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등에 알고 있는 것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 시절에 생산된 책, 사료 등 아카이브의 덕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쉽게 글을 쓰고 또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인터넷의 글들은 실은 잘 보존되긴 커녕 불과 몇년 안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필자가 글을 지울 수도 있고요.

우리가 간과하곤 하는 인터넷 공간 상의 기억, 아카이브에 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사입니다.

-이 책은 열여섯명의 저자들이 각자 파트를 맡아 '책'이라는 매체를 백과사전적으로 치밀하게 파고든 책입니다. 저는 책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제가 책에 관심이 많아서도 있지만 - '책'에 대한 역사는 결국 '책'이라는 물건 자체에 국한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각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즐기고 소문을 퍼트리고 읽고 쓸데없거나 의미있는 일들을 작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쩌면, '최신 미디어 트렌드 진단'보다도 더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마침 같은 출판사에서 지난 7월에 나온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링크)를 틈틈이 책상에 두고 살펴보던 중이었는데, 같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