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본말(本末)이 한참 전도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AD 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해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예루살렘은
멸망당하게 되고,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2천여 년 동안 그냥 세계인으로 살아가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고토(古土)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며 나서게 된다. 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루크(현, 튀르키에) 지배하다가 무너지고, 영국이 맡게 되면서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고대 유대국가가 있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Zion)주의자’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를 제창한 헤르츨은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자고” 선언하고, 시온주의 운동의 바젤 강령을 세웠다.
운동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세워졌으며, 공식 주간지 <벨트(Die Welt)>를 발간했다. 시온주의자 대회는 1901년까지는 매년, 이후에는 2년마다 1번씩 열렸다. 헤르츨은 오스만 정부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영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1903년 영국 정부는 우간다에 있는 3,75km의 비주거 지역을 정착지로 제의 했지만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고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온주의 운동은 사실 소수의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데 불과했다. 여기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운동을 이끈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출신이었다. 이들은 소책자와 여러 나라 말로 신문을 발행하며 선전을 확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뒤이어 대학살과 탄압이 일어나자, 더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 젊은이들이 선구적인 정착민으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14년경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은 약 9만 명, 이 중 일부는 유대인 농업정착지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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