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효인의 인터뷰를 읽다가 “목줄 대신 생활이라는 넥타이를 맨”이라는 표현을 읽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는데, 그 생활이라는 넥타이가 꽤나 내 목을 조르고 있었나 보다. 한 달 전, 집 월세를 인상한다는 소식에 며칠을 잠 못 이룬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수면 위로는 서점을 운영하며 평온한 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수면 아래 발은 미친 듯이 물살을 가르고 있다.
그렇게 발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을 때, 이 시집을 만났다. 서효인 시인의 책은 공저로 출간된 독서일기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정도만 읽었고, 시집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보통 시집이 들어오면 첫 페이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어본다. 이 책의 ‘시인의 말’은 나를 수신인으로 한 편지 같아서 주말 내내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여러 번 읽었다.
(...) 좋은 집에 살고 싶고 그 집의 가격이 오르면 좋겠다는 사람의 마음은 사실 내 것이다. 이제는 하다하다 시를 고백하는 용도로 쓰려고 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고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는 삶에 시가 끼어들어 자꾸 묻는다. 너 지금 뭐하느냐고. 너 지금 그렇게 사는 게 맞느냐고. 대답할 수 없어 썼다. 실패하는 마음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만든 지옥에 중독된 채로. _서효인, ‘시인의 말’에서
나 역시 지금 “실패하는 마음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너 지금 뭐하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하면서. “고백하는 시”이자 “후회하는 시”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에 이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의 주소를 들으면
주소지의 시세가 떠올라
사람의 재산 정도가 계산되는
사람이 되고부터
사람의 눈을 쳐다볼 수 없는 관계로
땅 보고 다닌다, 땅에는 거짓이 없지
_‘눈알에 지진’에서
시집의 전반을 흐르는 정서는 자괴감이다. 원하던 어른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자괴감, 아는 만큼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부끄러움.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한 분노 섞인 체념들. 나는 화자에게 공명하고 만다. 나 역시 내가 바라던 모습에서 멀어진 사람이며, 속물적인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땅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명으로 삼는 자신에 대해 헛웃음을 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무서울 때도 있다. 어디서든 철들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하니까. 그렇게 발이 묶여버린 슬픈 어른들을 나는 이 책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그의 시가 거기에서 끝났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으리라. 아마도 화자가 딸아이와 함께 들렀을 아이스크림 가게. 이 책에는 그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그곳에서는 아르바이트생의 손목이 보이고,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하고, 은행과 한 약속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대신 제 몸을 녹이는 드라이아이스가 있다.
세상에, 나는 드라이아이스의 생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주인공은 아이스크림이었으니까. 그걸 먹으려고 꺼낼 때쯤에는 드라이아이스는 흔적조차 없이 푹 꺼져버렸으니까. 그렇다고 드라이아이스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여 없는 삶인가?
(...)
내가 좋은 아빠다 죽지 않는 아빠다
노인의 빈소
모락거리는 연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제 할 일을 다하고
30년의 장례를 준비한다
삼가,
열심히 녹으면서
_‘서른 몇 번째 아이스크림’에서
(...)
내게는 큰딸이 있다 큰딸은
드라마로부터 나를 구원해주는 신이다 파고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잡아줄 손이다 타인의 온유한 시선에 놓이길 원하는
마음을 비집고 처단할 칼이다
장애인은 티브이에 잘 나오지 않는다 티브이를 보다 말고
나는 기도하려
손을 모으지만
(...)
드라마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어느 날에 나는 드라마로부터 구원되어 큰딸과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고 면식 요리를 하며 현관의 신발을 정리할
것이다 딱 10년만큼 늙어서 마지막이 없는 마지막 회를 찍
으면 좋겠다 나의 신이여, 당신은
이제 막 곤히 잠들었고, 나는 너의
작디작은 손톱을 살짝 문다
드라마에서 배운 생각들이
어슷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_‘드라마틱’에서
나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화자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아픈 딸)을 위해 지금 이 순간 “삼가, 열심히 녹”고 있는 드라이아이스를 발견한다. 아이스크림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텅 빈 봉지. 그리고 “녹은 하드의 막대처럼 남은” 안쓰러운 존재. 이 둘은 서로를 껴안는다.
나를 녹여 타인의 삶을 지탱해주는 사랑이란 요즘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 아니던가. 좀 더 영악하게, 좀 더 합리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사랑하려고 애썼던 나는 순간 허탈해진다.
내 인생은 “파고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잡아줄 손”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과정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내 몸이 작아질지라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삼가, 열심히 녹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사랑하던 날이
있던 적도 있어서 덜덜덜 몸을 떨며
울었다 닮은 것들의 몸을
통과한 악취가 제향을
대신하였다
_‘부음 2’에서
이 시집에는 부음을 소재로 한 4편의 시가 나오고, 장례식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타인의 죽음은 우리 삶을 뒤흔들지만, 우리는 나날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진실에서 애써 눈을 돌린다. 아직은 죽을 수 없기에 미친 척 삶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과 “닮은 것들의 몸을 통과”하며 살아간다.
부고를 들을 때마다 고인과 함께한 추억과 기억들이 우리 안에 우수수 쏟아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아직은 죽을 수 없다며 드라이아이스는 죽음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제 몸을 녹이고 있음을 안다. 곁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그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다짐하는 것이다. “삼가, 열심히 녹으면서” 살아가보겠습니다. (by 밤의점장)
*인용된 시는 저자의 허락을 받고 수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