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살롱지기 혜영입니다. 👋
추석 연휴에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 잘 보내셨어요? 이번 연휴는 제법 여유 있는 일정으로 저도 2년 만에 맑고 시원한 서울의 가을하늘에서 보름달을 환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지난 시즌을 마무리하며
53호 레터를 보낸 지 꼭 석달 만에 다시 레터를 쓰는 기분이 무척 긴장됩니다.
리로케이션(Relocation)
재작년 시즌 2와 시즌 3 오프 시즌 동안 저는 베트남 하노이로 이주했어요. 그리고 시즌 5를 마친 올해 7월 말, 2년 가량의 하노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시즌 6 모집 마무리 단계가 될 즈음인데, 이번 리로케이션은 버퍼링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2년 전,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던 아이들은 돌아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편입했고 각각 생애 첫 중, 고등학교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고요. 저는 개발도상국 저렴한 인건비의 수혜를 톡톡히 누리며 가사와 운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오롯이 일과 운동에만 집중한 2년을 보내다 다시 풀타임으로 살림과 교육을 챙기며 사업도 지속하던 이전으로 복귀했습니다.
인생 변곡점을 지나며
창고살롱의 브랜드 타겟, 멤버 “레퍼런서(Referencer)”는 인생 변곡점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내린 경험이 있는 여성으로 정의힙니다. 어느날 갑자기 해외 이주를 하던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간 저는 또 한 번의 다음 방향을 고민하는 순간, 인생 변곡점을 지나는 중입니다. 저를 주요 역할로 구분해보자면 학부모, 주부, 그리고 살롱지기의 일하는 자아와 심신을 지키고 지성을 키우며 즐기는 본질적 자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으로 돌아오며 학부모와 주부 역할이 갑자기 비대해지면서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었어요. 이전과 달리 중간, 기말고사를 중심으로 학기가 꾸려지는 아이들 학사일정과 내신 및 정규, 특강 수업으로 나뉘어 운영되는 학원 스케줄에 여전히 적응 중이고요. 식사와 간식 준비, 빨래 청소 등 집안일 루틴도 다시 몸에 익혔습니다. 하노이에서 처음 시작한 크로스핏도 지난달 중순부터 다시 시작해 주2~3회 운동을 하고 동네 도서관에 들러 가족 인원수대로 책을 대출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게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인 일은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노이로 떠나기 전 계약한 출간 원고를 여전히 탈고하지 못했고 시즌 6 모집도 아직입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 현재에 대한 해명을 상세히 전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만의 방'이 없어져서
주거 환경이 크게 변했어요. 창고살롱은 살롱지기들의 100% 재택, 원격근무가 기본값이에요. 처음 창업을 결심했을 때 집에 홈 오피스로 사용할 공간이 있었어요. 가족들이 ‘글방'이라 부르던 그곳에는 큰 원목 테이블과 의자, 소파, 책장, 프린터, 그리고 화이트보드가 있었죠. 동료가 직접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정규시즌 프로그램 기획 미팅을 갖기도 했고 시즌 중 살롱이 열리는 날이면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온전히 저 혼자만의 업무 공간으로 활용했어요. 이후 살롱 아지트로 별도 공간을 만들면서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살롱 진행 및 준비를 할 수 있었고요. 베트남에서는 지금까지 살아본 집 중 가장 넓은 집에서 지냈어요. 낮엔 햇살과 뷰가 아름다운 거실 원목 테이블이 업무 공간이었고 밤 시간, 정규 살롱 땐 넓은 침대에 화장실이 딸린 게스트룸이 개인 사무실이 되었어요.
지금 집은 이전 서울 집보다 20여 평, 그리고 베트남 집보다 50여 평 작은 집이에요. 주거비에 무리하지 말자고 내린 합리적인 결정이지만 창고살롱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데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다음 시즌을 위해 가족들이 함께 사용하는 오픈된 거실에서 이어폰을 꽂고 살롱을 진행하거나 집 근처 스터디룸 대여를 고려하고 있답니다.
성인 ADHD 진단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며 부쩍 챙겨야 할 일이나 중요한 약속 등을 완전히 망각하는 사건을 몇 번 겪은 후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어요. 이런 상태로 과연 계속 일을 이어갈 수 있을지, 다음 시즌을 계획하는 게 가능할지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죠. 조기 치매 검사라도 받아보려던 차에 성인 ADHD 증상일 수 있다는 조언에 힌트를 얻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어요. 전문의 진단을 받고 약물 복용을 시작한 지 이제 꼭 한 달이 지났어요. 차츰 용량을 늘려가며 경과를 살펴야하는 약의 특성상 아직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여정이 무척 기대됩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잘 잊어버리고 늘 마감 시간에 허둥대고 일을 순서대로 처리하기보다 다양한 일을 오가며 계속 새로운 일을 벌이고 마무리를 어려워하는 등의 행동 패턴을 자책하고 후회한 적이 무척 많아요. 하지만 더 이상 게으름이나 성의 없음 같은 부족한 특성으로 속상해하지 않을 이름(성인 ADHD)을 갖게 되어 큰 위안과 기쁨을 얻었어요. 오프시즌 끝자락에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전하는 이유가 어쩌면 감정적 갈등이나 불안이 올라올 때 지적인 이해나 언어적인 해석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을 뜻하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의 신경증적 방어기제가 아닐지 또 의심의 질문을 품게 되는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시즌
시즌 6를 계획 중입니다. 창고살롱 3주년인 올 연말엔 오프라인 스페셜살롱도 열어보고 싶고요. 모두 오프시즌 중에도 느슨하게 연결되어있는 레퍼런서 멤버분들의 지지와 응원 덕분이에요!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난 시간을 모두 부정당하는 듯한 무기력증에서 허우적댈 때 좀 더 충분히 쉬어도 된다고, 급하게 시즌을 시작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고 곁을 지켜준 살롱지기 소영 & 민지님께도 무한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누군가의 빛남을 발견하고 반짝임을 널리 알리는 살롱지기의 환대의 마음을 잘 회복하며 준비할게요. 레퍼런서 서사를 발견하고 레퍼런서를 세워가는 일, 더 많고 다양한 레퍼런서를 연결하는 일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우리 곧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