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깊고 진한 것

여름에 비가 많이 섞여 있으니 제법 우울합니다. 숨 막히게 덥지만 생기가 돌고, 모든 것이 역동적이던 과거의 여름과 다른 모습에 계절 하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날씨와 호르몬의 노예를 자처하는 저는 비가 오고 흐린 날에 고개를 숙이고 어디론가 숨어 들고 싶습니다. 잠깐 밖에 볼일이 있어도 비가 오면 웬만해서 다른 날로 미루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면 최대한 바깥의 무거운 공기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 잠깐도, 다녀오고 나면 배터리가 다 닳은 기계처럼 모든 작동이 느려집니다.

제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습기에 달린 물통을 비울 때, 그 쾌감을 아시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절로 만들어진다는 게 괜히 신기하고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이 작은 공간에 내가 들이 마시고 내뱉는 공기 안에 이렇게 축축한 물이 숨어 있다니, 그 물을 비울 때면 때로 섭섭하기도 합니다.

제습기에 찬 물을 흘려보내고 다시 제습기를 돌렸습니다. 씨앗을 심고 새싹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돌보고 키우는 마음으로 제습기를 대하는 모습이 우습고 슬픕니다. 외로움일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까. 갖가지 생각이 들면서 휴대폰을 손에 쥡니다.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면 서너 시간, 아니 하루 반나절은 사라지고 맙니다. 쇼츠나 릴스 라는 컨텐츠 때문인데요. 1분이 채 되지 않는 영상을 보면서 짧게 웃고, 코끝이 찡하고, 작게 놀라기도 합니다. 엄지손가락 한 번이면 수백 개의 쇼츠를 보는 일은 일도 아닙니다. 보고 나서 남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짧고 강렬하며 깊이 생각할 필요 없는 영상 컨텐츠의 소비가 과연 나를 이롭게 하는가, 또는 나의 온전한 휴식에 양질의 편안함을 제공하는가. 여러모로 모두 해당되지 않는 다는 걸 압니다.

인스타그램보다 유튜브, 네이버 검색창보다도 유튜브 검색창. 휴대폰을 잡으면 자동입력이 되어 있는 것처럼 향하는 유튜브. 유튜브 시청을 제 의지로 줄여봐야겠다고 처음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있어도 책을 찾지 않게 되고, 영화보다도 짧고 가볍게 볼 유튜브에만 팔려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합니다. 

길고 깊게, 진하게 생각을 하게 하는 많은 것들은 오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스턴트보다 정성들여 긴 시간 함께 한 식사가 기억에 남고, 짧게 만난 가벼운 사이보다 오래 마음을 나눈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요. 단순하되 가볍지 않고 싶습니다. 비 때문에 집에 자발적으로 갇히는 날이 많아지는 요즘, 더욱 이 시간을 가볍게 쓰는 저를 보며 반성해 봅니다. 독자님은 어떤 유희를 즐기시나요. 그 전에 비를 좋아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