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48회 (2022.03.30)

안녕하세요. 시 쓰는 임승유입니다. 규칙적으로 직장에 나가고 퇴근해서는 가족들과 저녁밥을 해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설 연휴에는 만두 백육십 개를 만들었습니다. 개수를 기억하는 이유는 엄마한테 육거리 시장 만두피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더니 몇 번이나 사십 개 들이 네 봉지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라는 말씀을 하셔서입니다. 저녁에는 접시에 수북하게 쌓아놓은 만두를 집어먹으며 드라마 <조용한 희망> 정주행을 시작했고, 다음날 정오 무렵엔 마지막 회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차례상에 올릴 전을 부치려고 앞치마를 둘렀지요.

💕임승유 시인 사랑하는 첫번째 시💕


구름이 바라본 나와 내 친구들의 집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의 구름을 받아들이고 싶다

구름으로부터 지켜지는 것들

구름 바깥에서 구름으로 인해 느껴지는 뜨거움

구름 속에 머리를 넣고

우리는 자고 빨래하고 설거지했다

우리는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하늘을 자주 본다 종종 통화를 하노라면

하늘 이야기를 꼭 한다

지붕을 갖지 못한 사람처럼은 아니고

지붕을 수리해야 할 사람처럼

땅을 가진 사람처럼은 아니고

땅을 빌린 사람처럼

마당에 우물을 가진 사람처럼은 아니고

마당에 폭우를 들이는 사람처럼

섬돌을 더 높이자 그런 이야기도 한다

당귀를 심으면 뱀이 오지 않고

무화과를 심으면 벌레가 끓지 않는대

이 말을 나는 다큐 자막으로 읽었고 친구들은 나에게서 들었다

내 친구들

가끔 엄마나 아빠라고 부른다

무릎이 닳고 피가 탁해지는 내 친구들

친구를 닮은 구석에서

친구가 자고

나를 닮은 구석에서

내가 자고

생일이면

쌀 씻고 같이 먹고 밥솥도 치우겠지만

뱀과 벌레를 잘 잡는

강아지 고양이를 키울 수도 있겠지만

운명이 있다면

운명을 누리는 사람처럼은 아니고

운명을 따르는 사람처럼

나는 내 친구들이 죽으면

내 마음대로 장례를 치르고

다른 친구를 남기지 않고 죽겠지

가족을 갖는 사람들은 가족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 되었지

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꺼이 받겠다 그랬어

 

나는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했지

내가 친구들을 울게 했어

가족은 참 그렇습니다. 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테두리입니다.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고,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느니 아무도 안 만나는 게 낫다고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기분좋게 음식을 장만해 가족들과 나눠먹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기대와 지레짐작으로 송두리째 흔들리는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지겨워 죽겠어, 잘게 썬 양파와 당근을 볶다가 중얼거리는 말을 옆에 와 있던 딸아이가 듣습니다. 너한테 한 말은 아니니까 상처 입지 말라고 변명하고 사과하며 식탁에 앉아 볶음밥을 덜어 먹는 오후가 평화롭게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지나가기도 합니다.

드라마 <조용한 희망> 마지막 회에서는 드디어 간신히 폭력적인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준비를 마친 주인공이 엄마한테 손을 내미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위로는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 아래 어린 딸아이가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이제 아홉 시간 후면 이 가족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시작할 테니까요. 구름 때문만은 아니지만 구름을 보면서 김복희 시인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구름이 바라본 나와 내 친구들의 집」을 처음 읽을 때, ‘친구’를 지금까지 제가 알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중간쯤에서부터는 ‘이게 뭐지?’ 하는 심정으로 자세를 바로 해 앞부분부터 다시 읽어야 했습니다. “무릎이 닳고 피가 탁해지는 내 친구들” 부분에서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지만, “나는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했지/ 내가 친구들을 울게 했어”까지 읽은 후에는 울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기존의 ‘가족’이라는 테두리로부터의 탈주가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던 저는 이 시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을 했습니다. <조용한 희망>의 주인공한테는 응원을 보내고 싶었고, 이 시의 화자한테는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들면서 응원만으로 부족하다는 결심 같은 걸 하게 되더라고요. “가족을 갖는 사람들은 가족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기 힘든 사람들이다”라는 문장 앞에서 생각이 많아졌고 이 문장에 빚을 졌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김복희 시인의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를 읽다보면 이렇게 다정한 마음과 단호한 시선을 동시에 갖고 있는 화자를 자주 만날 수 있고, 그게 가족이든 사랑이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손에 쥐게 됩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온라인 서점 MD가 선택한 레이먼드 카버의 『우리 모두』👑


지난 레터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시 결정판 『우리 모두』 출간 소식을 안내드렸는데요. 출간 직후에 온라인 서점의 문학MD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극찬해주셨습니다! 우시사 구독자분들은 이미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계실 김효선 알라딘MD(a.k.a  네번째 시믈리에)님의 『우리 모두』 추천글과 감상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김효선 MD님의 감상이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스크롤을 내려 '편집장의 선택'을 확인해주세요😚)

💕임승유 시인 사랑하는 두번째 시💕


사망 추정 (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엄마 보고 있지요

오늘, 함박눈이 내렸어요

펑 펑 펑

올겨울에 눈이 많은 걸 보니

내년엔 벼농사가 제법 되겠고요

마당 홀로그램 나무에도 무척 고운 꽃을 삽입해야겠어요, 엄마

어제 영일이는

산타 복장을 하고

사평이네 유치원에 가서

허 허 허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지요

사평이가 아빠를 알아보고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망했을 텐데

벙긋벙긋 웃음이 터져서

영일이는 사평이를 모르는 척했습니다

나는 사평이 아빠가 아니다

헛 헛 헛

사평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지뢰가 터져서

유치원은 금세 슬픔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사평아, 아빠야, 아빠한테 와

그때 영일이와 사평이의 조우를 바라보며 학부모들은 깨닫게 되었지요

거짓의 대가는 얼마나 혹독한가

엄마

엄마도 죄인처럼 사셨나요?

사평이를 보면 보여요

우리 거짓의 결과물이

사평이가 어른 되는 세상은 아름다울까요

부모는 자식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왜들 모르는 척 잘살까요

오늘은 영일이와 사평이를 데리고

하남에 갔다가

영롱한 오물을 사왔습니다

사망 추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외식하고 들어와

서해훼리호 침몰과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 지하철 화재를 경험하며

역사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보 사평이는 중산층으로 키우지 말자

영일이 울음보가 먼저 터지고

여보 미래는 여자야 저기 봐

그다음엔 저의 것

사평이는 용케도 잠이 들었습니다

사평이의 꿈이

이른 나이에 부모를 버리는 것이라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찰까요

인과응보라고 할까요

덕을 쌓자, 여보

영일이는 소주 세 병에 고꾸라졌습니다

저는 이리 멀쩡한데요

속이 타는데요

엄마, 엄마는 어쩌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라는 말 대신에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지금 그것을

추정해보고 있습니다

밤은 깊고 잔은 채워야 맛이지요

엄마가 저를

너같이 더러운 년을 딸로 둔 게 죽어서도 한이 될 거라고

제 머리채를 잡고 온 집안을 뒤흔들 때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나요

저는 그 새끼를 수백 번 칼로 쑤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아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요

문을 잘 잠갔는지 확인했는데요

아빠 가는 길에 와보지 않은 독한 년은

엄마 가는 길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인과응보라고 할까요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엄마 18번을 제 18번으로 삼은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엄마도 아팠겠죠

펑 펑펑

쏟아졌지요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눈은 쏟아지고 영일이는 자면서도 어쩜 저리

콧구멍을 벌렁벌렁거릴까요

영일이에게 모두 말했어요

사평이는 당신처럼 키우자

엄마

제사상에 가득 올린 오물을 잘 잡수시고

그곳에서도 똥 싸고 계셔요

사평이는 이제

화장실을 찾아 변을 볼 줄 알고

말할 줄 압니다

엄마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저 아이도 커갈수록

부모 알기를 개똥으로 알겠죠

참 다행이에요

그럼 저도 이만 영일이 곁에 눕겠습니다

맨정신으로는 문장으로 옮기기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내 일이 아니니까 혹은 당장 지금 벌어진 일은 아니니까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외식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가족은 또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곁이기도 하니까요. 계속해서 일상이 그럭저럭 영위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견딜 수 없는 순간은 불쑥 찾아옵니다. 한 번은 꺼내놓고 그게 뭐였는지 들여다봐야 내일을 위해 잠들 수 있는 순간 말입니다. 처음엔 이 시의 목소리가 원한을 품은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영매의 그것처럼 읽혔습니다. 그래야 속이 덜 시끄러울 테니 영악한 독자로서 안전장치를 만들면서 읽었던 셈이지요. 그다음엔 술을 아무리 먹어도 풀어지기는커녕 점점 또렷해지기만 하는 과거를, 직시하고야 말겠다는 화자의 결기로 읽었습니다. 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지요. 할말은 꺼내놓아야지요. 그래야 잠들 수 있을 테니까요. 다음엔 이 시가 저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시 마지막 부분에서 만난 “저 아이도 커갈수록/ 부모 알기를 개똥으로 알겠죠/ 참 다행입니다”라는 구절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이 시의 화자가 그랬듯이 제 마음도 긴 시를 옮기는 과정에서 조금은 풀어지고 조금은 용기를 갖게도 되면서 꿋꿋하게 살아보자 다짐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임솔아 작가입니다. 

「초파리 돌보기」로 제13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임솔아 작가가 고른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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