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추정 (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엄마 보고 있지요
오늘, 함박눈이 내렸어요
펑 펑 펑
올겨울에 눈이 많은 걸 보니
내년엔 벼농사가 제법 되겠고요
마당 홀로그램 나무에도 무척 고운 꽃을 삽입해야겠어요, 엄마
어제 영일이는
산타 복장을 하고
사평이네 유치원에 가서
허 허 허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지요
사평이가 아빠를 알아보고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망했을 텐데
벙긋벙긋 웃음이 터져서
영일이는 사평이를 모르는 척했습니다
나는 사평이 아빠가 아니다
헛 헛 헛
사평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지뢰가 터져서
유치원은 금세 슬픔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사평아, 아빠야, 아빠한테 와
그때 영일이와 사평이의 조우를 바라보며 학부모들은 깨닫게 되었지요
거짓의 대가는 얼마나 혹독한가
엄마
엄마도 죄인처럼 사셨나요?
사평이를 보면 보여요
우리 거짓의 결과물이
사평이가 어른 되는 세상은 아름다울까요
부모는 자식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왜들 모르는 척 잘살까요
오늘은 영일이와 사평이를 데리고
하남에 갔다가
영롱한 오물을 사왔습니다
사망 추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외식하고 들어와
서해훼리호 침몰과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 지하철 화재를 경험하며
역사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보 사평이는 중산층으로 키우지 말자
영일이 울음보가 먼저 터지고
여보 미래는 여자야 저기 봐
그다음엔 저의 것
사평이는 용케도 잠이 들었습니다
사평이의 꿈이
이른 나이에 부모를 버리는 것이라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찰까요
인과응보라고 할까요
덕을 쌓자, 여보
영일이는 소주 세 병에 고꾸라졌습니다
저는 이리 멀쩡한데요
속이 타는데요
엄마, 엄마는 어쩌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라는 말 대신에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지금 그것을
추정해보고 있습니다
밤은 깊고 잔은 채워야 맛이지요
엄마가 저를
너같이 더러운 년을 딸로 둔 게 죽어서도 한이 될 거라고
제 머리채를 잡고 온 집안을 뒤흔들 때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나요
저는 그 새끼를 수백 번 칼로 쑤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아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요
문을 잘 잠갔는지 확인했는데요
아빠 가는 길에 와보지 않은 독한 년은
엄마 가는 길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인과응보라고 할까요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엄마 18번을 제 18번으로 삼은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엄마도 아팠겠죠
펑 펑펑
쏟아졌지요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눈은 쏟아지고 영일이는 자면서도 어쩜 저리
콧구멍을 벌렁벌렁거릴까요
영일이에게 모두 말했어요
사평이는 당신처럼 키우자
엄마
제사상에 가득 올린 오물을 잘 잡수시고
그곳에서도 똥 싸고 계셔요
사평이는 이제
화장실을 찾아 변을 볼 줄 알고
말할 줄 압니다
엄마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저 아이도 커갈수록
부모 알기를 개똥으로 알겠죠
참 다행이에요
그럼 저도 이만 영일이 곁에 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