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읽다'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활자로 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꽤 좋아하는 편인 저는 '읽는다'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읽다'는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마주하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의미에 대해 헤아리는 것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수를 읽는다"거나 "분위기를 읽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읽다'라는 말은 사람과도 곧잘 붙어 쓰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표정을 읽고, 말에 담긴 의도를 읽어낸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통째로 읽어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를, 그것도 '나'와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내면을 지닌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읽어낸다는 일이 말이죠.
물론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존재합니다. 어떤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행동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고,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작품에는 창작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해석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단서들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헤아리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읽어낸 것이 '누군가'를 온전히 읽어냈다는 의미는 아닐테지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해석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우린 꽤 자주 서로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편화된 조각조각을 통해 전부를 헤아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알아낸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버리곤 하죠. 오늘은 그런 '읽어냄'과 '읽음에 대한 믿음'이 마치 하나의 폭력처럼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주제를 위해 가져온 영화는 바로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입니다. 저는 영화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기 전에 미리 극장을 다녀왔는데요! 여러분께 이 영화를 소개하기까지 기다리는 그 짧은 몇 주 동안, 저는 이 영화를 꽤 자주 꺼내어 생각하곤 했습니다. 저의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묘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소재 중 하나는 바로 폭력입니다. 거대한 기업/자본/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오늘은 이 폭력에 집중하기보다는, 앞서 이야기한 가독과 오독의 폭력, 즉 이 영화가 타인을 섣불리 읽어내려하는 행위를 할 때 나타나는 폭력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주목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세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선명히 드러납니다. 오프닝에서 주인공 호석과 가족은 차를 타고 막 집에서 출발하려 합니다. 그때 이웃이 지나가는데요, 호석을 바라보며 "좋은 데 가는가봐"하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이 가족이 현재 향하는 곳은 동료의 장례식장입니다. 평범하게, 그리고 어쩌면 무심하게 건넨 이 인사말은 실제 상황과 크게 어긋나면서 서늘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뒤로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크게 박수를 치듯 스트레칭을 하며 지나갑니다. 그저 일상의 한 순간에 불과한 것 같은 이 장면이 계속해서 생각나는 이유는 아마 우리가 이야기해온 부분과 맞닿아있기 때문이겠죠. 또한 이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예지'라는 인물과도 연결됩니다. 예지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인물입니다. 렌즈 앞에 선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고 그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예지의 카메라는 더 이상 단순한 무정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영화 바깥으로도 확장됩니다. 이 영화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문제는 영화 속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독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누군가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관객에게 그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생략합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 어느새 그 사람을 특정한 이야기 속에 가두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감독은 타인의 삶을 재현하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전면에 드러냅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 역시 이러한 읽어냄의 폭력에 동참하도록 만듭니다. 인물들의 표정, 특히 호석의 표정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읽어내라고 재촉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그의 얼굴에서 슬픔을, 분노를, 후회를, 혹은 그 밖의 어떤 감정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 표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며,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얼굴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그것이 곧 호석이라는 사람의 전부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어낸 것은 그가 드러낸 수많은 모습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마저도 우리의 경험과 기대, 편견을 거쳐 해석된 결과일 테니까요. 한 사람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고, 하나의 이야기로 온전히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호석과 미옥의 아들로 등장하는 '최철'이라는 인물은 의미심장합니다. 철이는 마치 초월적인 관찰자처럼 존재합니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지만, 자신이 본 것을 섣불리 이해하거나 언어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눈앞의 대상을 섣불리 읽어내려 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물론 그 역시 영화 속 세계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바깥에 위치해 있는 관찰자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관찰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에서 배제할 수 없는 참여자라는 모순, 그리고 그에게만 허용된 듯한 독특한 앵글이 이 영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은 이 '철'이라는 인물의 설정 배경을 직접 밝히 바 있습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연작에 등장하는 관찰자를 철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여러 사회적인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는데요. 그렇기에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서로를 하나의 방식으로 읽어낼 수 없듯이, 이 영화 또한 다양한 감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제가 아마 계속해서 이 영화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여러분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또 무엇을 읽어내실지 정말 궁금한데요. 조금 길지만 그 흘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영화를 여러분의 11월의 첫 영화로 추천드리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