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콤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아한 유령>이라는 곡을 썼다. 듣고 있으면, 자유롭게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춤을 추는 상상 속의 나는 육체가 없다. 바닥보다는 천장에 가까운 어디쯤에서 흘러가고 있다. 육체가 없으니 더할나위 없이 ‘자유롭지만’ 육체가 없으니 또 슬프다.
죽음 후의 존재라고 할 때, 한국적 개념으로는 ‘귀신’이 떠오른다. 원한이 있거나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한 존재다. 물리적인 형태보다는 그의 정서적 상태가 먼저 궁금해진다.
그런가하면, ‘유령’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건 ‘꼬마 유령, 캐스퍼’다. 어릴 때 봤던 ‘캐스퍼’의 장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캐스퍼’가 삼켜도 삼켜도 땅바닥으로 내려 박혔던 음식들이다.
‘유령’은 그의 정서적 정체성보다 ‘육체가 없다’라는 물리적 정체성이 먼저 다가온다. ‘사랑과 영혼’처럼 몸이 벽을 통과하고 ‘고스트 스토리’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는 존재. 먹어도 쾌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
이제와서 영화를 공부한다는 내게, 어떤 친구는 ‘너도 독립 영화계를 떠도는 유령이 되는 거 아니니’라는 걱정을 건넸다. 그래, 유령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는 모습이 대부분 유령같기도 하겠구나. 외로운 유령이 되기 싫어서, 나는 일반화를 한다. 그리고 ‘우아한 유령’이라는 제목에 고개를 끄덕인다. 먹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그것은 분명 우아하구나.
후회를 안고 죽는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편의점 김밥을 먹으며 유령처럼 쏘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