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입니다. 아직까지 내 자신이 어른이라고 실감하게 되는 순간은 잘 없는데,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만 어른이라는 핑계를 빌리게 되더라고요. 세수하기 싫지만 세수해야지... 어른이니까... 청소하기 싫지만 해야지... 어른이니까... 출근하기 싫지만 해야지.. 어른이니까... 당장 집 가고 싶지만 할 일은 해야지... 어른이니까... 5살 꼬맹이도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어른'이라는 핑계를 붙이고 있는 제 자신이 우스울 때가 많았어요. 어렸을 땐 잔소리하는 엄마아빠가 있었다면, 지금은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는 것만 달라졌달까. 하기 싫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네요. 

 수업 시간에 10년 후, 20년 후를 그려볼 때는, 이렇게 하기 싫어하는 어른이 되어있을 줄 몰랐는데요. 또 동시에 이렇게 1차원적인 행복을 여전히 최고로 여기고 있을 줄도 몰랐어요.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퇴근하고 드러눕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지친 상태로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침대에 딱 누웠을 때의 포근함. 밤 11시에 내키는 대로 꺼내먹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함.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열 때의 짜릿함. 알람 없이 늘어질 대로 자는 주말 아침의 여유로움. 어렸을 땐 나이가 들면 좀 더 대단한 걸 하고 대단한 거에 행복해하고 있기를 바랐다면, 지금의 저는 10년 후에도 변함없이 별거 아닌 것들을 하고 별거 아닌 것들에 행복해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래서 나이가 들수록 철들기 싫어하는 걸까요? 

 하기 싫은 일들을 냅다 미룰 수 있어 행복했고, 하고 싶은 일들은 냅다 실천할 수 있어 행복했던 주말이었습니다. 주말에 모은 행복 에너지로 하기 싫은 일을 더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월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늘 리셋되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좀만 버티면 연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기 싫어도 해야지... 어쩌겠어...' 하는 출근길에 읽고 계시다면, 오늘의 편지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이 하기 싫어도 해내봐요! 주말은 또 오니까요! 

 휴식이 필요했던 연말과 새해에 열심히 봤던 일드. 사실 과한 뽀글머리 포스터에 선뜻 손길이 가지 않았는데요. 결국 '여름에 꼭 보세요!' 추천이 많은 여름 배경의 드라마를 한겨울에 보게 되었습니다. 일드 <나기의 휴식>은 주변 눈치를 지나치게 보던 주인공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인생을 리셋하기로 마음먹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회사도 그만두고, SNS도 다 끊고, 낡은 아파트로 이사 가서 '휴식기'를 갖기로 선언하는데요. 똑부러지고 귀여운 옆집 초등학생, 길거리 동전 수집이 취미면서 영화 속 낭만을 사랑하는 이웃 할머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유일한 목표인 옆집 남자. 눈치만 보면서 '뭔지 알아' 억지로 공감하던 나기에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할 수 있는 수상한 이웃들이 생기는데요. 어딘가 이상하고 서툴고 때론 답답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고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언제까지 좋아할 작정일까요. 끈적거리는 여름의 색감이 아름다우니, 여름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적극 추천입니다🍀

<엘뤼아르 시 선집> 폴 엘뤼아르, 조윤경 옮김, 을유문화사 

 폴 엘뤼아르의 시 '말'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 쉽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 아름다움은 쉽게 가능하다고. 나는 돌연 어느 공간에서 순간 아름다움을 내비칠 수 있고, 그 모습을 어쩌다가 깨닫고 의식하기도 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런 의외성 내지 우연성과 함께 하루하루를 일궈나간다면. 나뿐 아니라 그 누구나가 쉬운 아름다움을 지녀서, 쉽게 나 역시 타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혹 내가 타인의 기쁨이 된다면. 이는 시의 문장처럼 너와 내가 "구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과 "새들의 비행에서 가장 벌거벗은 면"을 상상하며 좋아하길 기꺼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새해에 한 살 정도 더 "늙었지만 여기서 난 아름답다"고 당연히 감각할 수도 있는 건 아닐지. 

  '쉬운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읽자마자 단번에 반했던 글. 세상엔 지름길은 없고, 결국 구르고 굴러서 닿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까지 어렵게 갈 일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또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날들도 많아요. 지난 호에 쓴 것처럼 새해엔 '익숙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 마음으로 읽으니 더 와닿았던 글입니다. 겨울에 봐도 싱그러운 여름 배경의 드라마, 길 가다 우연히 발견한 놀이공원 퍼레이드 차량들, 2+1 행사 상품이라 하더라도 우연하게 선물받은 밀크티 - 지난 며칠 간 쉬운 아름다움들을 떠올리니 이런 것들이 있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을 날로 먹는 법은 없는 것 같은데, 쉬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매일을 일굴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새해입니다. 아름다운 새해 되세요🥦

 2023년에 가장 라이브를 보고 싶은 밴드를 고르라면, 망설임없이 '봉제인간'을 고르겠습니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베이시스트 지윤해, 혁오의 기타리스트 임현제, 전 장기하와 얼굴들의 드러머 전일준 세 멤버가 결성한 팀인데요. 각 소속 그룹의 음악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편이라, '이 세 사람이 모이면 도대체 어떤 음악을 할까?' 궁금해서 공연을 보러갔던 적이 있어요. 앨범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 전부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신나고 자유롭고 잘한다! 이 한마디로 깔끔하게 소개할 수 있는 팀입니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도, 비 오는 제주 바닷가에서도 자주 들었던 곡인데요. 어디서 듣든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곡이에요. 많이 애정하고, 올해 꼭 라이브 보러 갈게요🙆‍♀️

로파서울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7길 10-11 5층

온더홀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7길 10-11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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