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준비한 것들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차다, 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들도 이제는 긴 잠옷을 입고 자야할 거 같아요. 아침 저녁으로 온도 차이가 크네요. 레터를 읽으시는 독자님, 감기 조심하세요. 낮에는 한여름처럼 덥고 해가 지면 살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다르네요. 이렇게 여름과 가을 사이를 지나는 9월입니다. 

오늘은 병원에 다녀왔어요. 팔이 부러지고 4주가 흘렀어요. 무사히도 새 뼈가 많이 자랐고 어긋나지 않고 잘 붙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신기합니다. 뼈가 다시 자라고 붙는 동안 하고 있었던 일은 그저 팔을 움직이지 않고 한 자세로 고정하는 일이었는데요. 약도 먹지 않았는데, 뼈는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고 있었습니다. 한 일도 없이 왠지 보상을 받은 기분도 들고, 이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은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해도 봉합되고 치유가 되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지나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고 아물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게 뭐가 되든 기다려주는 일. 사실은 그게 제일 필요했던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새삼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아이들은 그저 자기의 속도로 자라날 뿐이니까요. 시간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왜 자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온갖 속성, 초속, 고속이 넘쳐나는 것 같아요. 무엇이든 속성으로 가르치고, 모든 과목을 미리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을 여기저기서 심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 어릴 때는 속독법이 엄청 유행했어요. 속독하는 법이라는 책을 사서 읽기도 했는데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빨리 읽는다면 시간도 아끼고 일석이조잖아, 라는 생각에 그 책을 덥석 사서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 그렇게 읽고서 내용 파악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건가, 였어요. 대각선 방향으로 책을 읽으라는 것이 그 책의 결론인데, 몇 번 시도해보고 원래대로 차분히 읽는 것으로 돌아왔어요. 대각선 방향으로 읽으면 물론 빨리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얼 읽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더라고요. 전 빨리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을 가만히 조용히 그리고 깊게 읽어내고 싶습니다. 제가 읽는 속도보다 책을 사는 속도가 빨라서… 집에는 계속해서 책이 넘쳐나는 중입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재밌는 책이 많은 걸까요… 정말, 너무해… 


시간이 필요한 일들… 을 생각해 보면 얼마 전에 저희 집에 온 5개월 아기가 떠오르네요. 딸 친구의 엄마가 3월에 아기를 낳으셨어요. 이제 4개월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티타임을 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아기랑 같이 만나려면 집이 편할 거 같아서, 집으로 초대를 했어요. 4개월이 된 아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뒤집기를 하고, 혼자서 이곳저곳 눈으로 탐색을 하다가 잠이 왔는지 조금 칭얼거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혼자서 기어갈 것이고, 또 시간이 지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엄마, 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키가 엄마보다 커질 것이고, 엄마보다 아는 것도 더 많아지겠죠. 어느 날은 엄마 없이도 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갈 거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걸, 이렇게 나이가 먹고서야 어렴풋이 알아갑니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 그 모든 걸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이 갑자기 얼굴을 듭니다. 살면서 공평한 게 하나 있다면 그런 거겠죠. 시간이 흐른 뒤의 모습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 그저 모두에게 같은 시간으로 1초씩 흐른다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초씩. 


1년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책의 운명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1년 전 여름에는 <낳을까 말까> 책을 출간하면서 이 책 덕분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했어요. <낳을까 말까> 원고를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제가 공감한 지점은 이 책에 나온 질문들이 엄마인 제가 봐도 충분히 고민이 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이곳, 한국은 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낳기로 결심했지만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듭니다. 입시를 코앞에 두게 되면 아이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지, 선행은 그동안 얼마나 해야 할지, 남들이 해주는 것만큼(물건이든 경험이든…) 아이에게 해주지 못할 때 드는 마음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고기 먹는 일을 지양하고 비건으로 식단을 바꾸는 일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온갖 혐오와 위험 속에서도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지… 이런 고민들은 아이를 낳은 저나, 아이를 낳지 않은 작가님이나… 모두가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니까요.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이런 고민들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다면, 아무런 고민 없이 어떤 날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이 모든 고민이 끝난 후에, 작가님은 이번 여름, 아기를 낳으셨어요. 1년 전에는 저도 작가님도 이런 결과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작가님 입장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저와 연락이 수월하지 않던 때도 있었고, 미팅하면서도 계속 아이들 이슈로 전화가 오는 출판사 대표, 이런 워킹맘을 보면서 작가님은 아마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커리어를 지속하는 일은 참 복잡하고 어렵구나, 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고도 혜인 작가님은 아이를 낳는 선택을 했어요. 그리고 <낳을까 말까> 책은 이번 가을, 2026년 세종도서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1년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일들, 해인 작가님의 책이 세종도서가 되는 일과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 시간이 준비하고 있는 선물을, 이렇게 하나씩 알아갑니다. 


일주일 뒤, 그리고 한 달 뒤, 내년 9월… 여전히 느린서재 레터가 도착하게 될지, 아닐지 모를 일입니다. 언제까지 레터가 메일함에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일들을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제게 주어진 시간을 아낌없이 촘촘하게 쓰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시원한 9월, 재밌는 책도 많이 읽으면서 오늘을 보내시기를요. 2주 후에 또 레터로 돌아올게요. 


시간이 자기의 일을 다하듯.
저는 토욜 새벽 익산으로 갑니다.
익산읽페어, 독자들을 만나고 올게요!

저에게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메일 보내주세요.


발행인 최아영  | calmdown.library@gmail.com | https://linktr.ee/calmdown.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