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기질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OCT 30, 2026
저, 사실 음료를 마실 때 입에 머금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면 대부분 컵 바닥에서 차갑게 식어버리기 일쑤고,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목뒤로 넘기며 마시는 장면은 보통 제 상상 속에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입이 짧아 얼마 못 마신다거나, 마실 때 목이 아프다거나 하는 신체적인 문제는 아니고요. 오히려 정신적인 이유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저도 최근에야 이 습관을 인지한지라 나름의 이유를 가늠해 보고 있는데요, 음료를 꿀꺽 넘겨버리는 그 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걸까요? 아니면 음료를 맛있게 음미할 수 있는 더 완벽한 순간이 있을까 봐 아껴두는 걸까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기질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꾸던 그 순간이 눈앞에 닥쳐도 저는 과연 상상에서만큼 만족하고 즐길 수 있을까요? 그게 현실처럼 느껴지긴 할까요?

올해 가장 신경 쓰던 스페인 스튜디오 코디네이팅 프로젝트의 공식 일정이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성료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모든 부분이 성공적이었습니다. 물론 변수야 있었습니다만 세상사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으며, 이 정도면 모두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순조롭게 흘렀다고 느낍니다.
그런데도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친구들까지 생겼는데도 붕 뜬 기분입니다. 사진이랑 영상도 수없이 남기고, 일기까지 썼는데도요. 이렇게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해집니다. 실감 난다는 건 애초에 어떤 느낌일까요?
최근에 프로젝트를 마친 소회를 혼자 거실에 앉아 영상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유튜브로 업로드하는 게 목표예요…) 입 밖으로 내뱉다 보니 문득 말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많았는데요. 단순히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다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직 감정들이 다 소화되지 못하고 중간에 턱 막혀 있는 느낌이라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그간 바빠서 2주 정도 집밥을 못 먹다시피 했는데, 오랜만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토마토 파스타를 먹고 싶어서 급하게 만들어 둔 토마토소스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난 레터에서도 먹고 싶다고 말했었지요!) 거창하게 요리하기는 커녕 채소도 자르기 귀찮았던지라 쿠팡 마감 세일로 저렴하게 사둔 홍합 살만 넣어서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우기로 했습니다.
파스타 면을 삶고 그릇에 옮겨둔 다음, 팬에 오일만 둘러서 소스와 홍합 살을 넣어 살짝 끓여주었습니다. 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스를 덮고 나니, 홍합이 소스에 묻혀서 어쩐지 재미없는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밥에 낫또를 올린 것처럼 그릇째 들고 후루룩 흡입해 버렸어요.
저에게 집 파스타는 이미 익숙한 일상의 한 부분이라 사실 이제는 큰 감흥이 없습니다. 가끔 특별한 재료를 쓰지 않는 이상은요. 이날의 파스타도 담파스타로 이렇게 담아내지 않았다면 금방 잊힐 한끼에 불과했겠지요. 굳이 이렇게 적어둔 덕분에 이날 저녁 뭘 먹었는지는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순간은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어떤 순간은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는 무엇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억에 남는 것과 실감이 나는 것은 어쩌면 평행선에 위치한 개념인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은 뒤로 남겨진 흔적이고, 실감은 순간을 충분히 느끼는 현재에 가깝다고 생각하니까요. 곱씹는 성격에 글이 편한 저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실감보다 기억이 좀 더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실감이 또 다른 감각으로 남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간 어떤 순간이 나중에 문득 떠오르는 식으로요. 갑자기 이 둘의 관계가 뫼비우스의 띠로 느껴지는데요. 아무래도 이 수수께끼를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며 조금 더 헤매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님, 오늘의 파스타는 어떠셨나요?
너무 길었나요? 레시피가 부실했나요?
듣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음 레터에 반영해 답장할게요.
제가 궁금하다면 아래에서 더 확인할 수 있어요!
R.DAM
artist.rda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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