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루 작가의 신작 에세이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 두 번째 편지를 띄워 보냅니다. 첫 편 [고독을 위한 레시피](이전 레터 보기)에서 '고독은 내가 나로 존재하는 방식'임을 한밤의 요리로 보여주었지요. 이번 글은 모든 것이 초록초록 무성히 자라나기 시작하는 지금, 함께 읽기 좋은 이야기예요. 저마다의 '정아'를 떠올리는 시간 되길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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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
식물 생활의 시작은 일희일비의 연속이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다. 가지 끝에서 새순 하나만 올라와도 벅찼고 묵은 이파리 끝이 조금이라도 시들라치면 애가 탔다. 이유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식물 생활 선배이자 정원사인 친구가 해준 말이 있었다. "새잎이 나면 괜찮은 거야." 식물의 생기가 덜하거나 시든 잎이 있더라도 새잎이 나고 있다면, 어린잎이 건강하다면 그 식물은 괜찮은 거라고, 시들고 지는 일 역시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친구는 나를 안심시켰다. 이후 식물 생활을 하는 동안,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모든 것이 나빠지고 있던 지난겨울, 마음이 한참 내리막을 향해 내달리던 와중에는 더욱 그랬다. 새로 이사한 변두리의 작고 낡은 아파트는 손볼 곳이 많았다. 집수리에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보일러 일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는 끝내 해결이 안 됐다. 산자락에 면한 꼭대기 집은 안 그래도 몹시 추웠다. 책상 밑에 담요를 두껍게 깔아두고 고양이에게는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식물들이 아직 다 풀지 못한 짐들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래층 아주머니가 불길한 예언처럼 "많이 춥죠? 세탁기도 곧 얼 텐데…"라고 말한 다음 날에는 정말로 세탁기가 얼어버렸다. 내복을 잔뜩 껴입고 지낸 첫 달 관리비 고지서에 기재된 난방비 내역을 보고는 앞으로 살아갈 겨울이 까마득해졌다. 수리할 때 더 넣지 못한 단열재와 손보지 못한 난방 배관, 더욱 강경했어야 할 집주인과의 협상 같은 것들을 되새기는 동안에도 누수와 결로, 불안정한 수압과 엘리베이터 모터 소음 같은 문제들이 릴레이하듯 이어졌다. 그렇다고 이 집을 고를 때 기대했던 창밖의 설경과 꼭대기 층의 고요 같은 것들이 모두 무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분간은 이사 걱정이 없을 터였다. 낡은 집으로 이사하며 나름의 각오도 했다. 그런데도 심란함이 가시질 않았다. 쉼 없이 이사하던 동안에도 짐만 풀면 내 집이다 싶던 마음이 좀처럼 찾아오질 않았다. 영영 이러면 어쩌나 울적했다. 그러다 문득 거실 책장 위에 두었던 산호수 줄기 끝에서 새잎이 난 것을 보았다.
엄마가 빚은 분청색 다관에서 자라던 손바닥만 한 산호수는 엄마의 이사 선물이었다. 어쩌다 뚜껑이 깨지면서 화분이 된 기물의 두툼한 곡선과, 느슨히 줄기를 뻗으며 자라는 덩굴이 우아하게 어우러져 볼 때마다 탐을 내던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종일 볕이 잘 드는 부모님 집에서 산호수는 내내 분재처럼 자랐다. 작은 분에 적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좀처럼 새잎도 내지 않았다. 그러니 봄은 아직 멀고 볕 드는 시간은 아침나절 잠깐인 이 집에서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던 식물의 새잎이 놀라울 수밖에. 둘러보니 고사리 화분에도 어느새 새순이 돋아 있었다. 다들 어느 틈에 힘을 얻었을까. 거실 곳곳에서 생기로 반짝이는 어린잎들을 보며 뒤늦게 마음이 놓였다. 식물들은 나보다 먼저 새집에 마음을 붙인 듯했다. 우리는 이 집에서 잘 살아보기로 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잘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무성해진 식물들, 모든 것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은 풍경,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편안해지는 시간 같은 것들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새잎이 나고 있으니 이제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비로소 이사를 잘 마친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키운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내가 내 고양이나 식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 주체와 객체의 성격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감각이라서다. 우리는 나날이 더 깊게 서로에게 감응한다. 이 상호적인 감각은 때로 나를 변화시킨다. 내가 그들에게 그렇듯 그들 역시도 나를 자라게 한다. 아주 작은 화분에 갇혀 고정된 듯 보이는 식물들조차도 그렇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화분에 심은 콩 한 포기로도 어떤 인생은 달라지니까. 사실 콩 때문에 달라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이미 두 개나 알고 있다. 그중 하나는 에드몽드 세샹의 《강낭콩》이다. 동명의 17분짜리 영화가 원작인 이 그림책은 감독이 영화를 촬영하며 틈틈이 찍은 사진으로 만들어졌다. 도입부의 흑백사진들 속에는 어두운 집에서 온통 검은 복색을 한 노부인의 단조로운 삶이 있다. 그는 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가방을 만든다. 유일한 낙은 오후에 한 번 하는 산책이다. 그때만큼은 노부인의 삶에도 빛과 색이 깃든다. 만일 어느 날 우연히 골목에서 빈 화분 하나를 줍지 않았다면, 그 화분에 저녁으로 먹으려 불려두었던 강낭콩 한 알을 심지 않았다면, 노부인의 삶은 내내 무채색으로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콩이 자라기 시작했고, 돋아나는 새잎을 보며 그의 내면에도 어떤 것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지 끝에 돋아난 싹처럼 아주 자그마했겠지만 이내 그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어떤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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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몽드 세샹, 《강낭콩》, 이미림 옮김, 분도출판사,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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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줄기를 심었을 뿐인데 노부인은 갑자기 바빠진다. 콩이 좀 더 볕을 잘 쬐도록 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화분의 자리를 옮겨줘야 하기에. 그러나 아무리 정성스레 자리를 바꿔준다 한들 어두운 실내에서 콩과 식물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더 나은 수를 찾는다. 화분을 들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상상해 보라. 나이 지긋한 노인이 한 팔에 강낭콩 화분을 소중히 안고 공원 벤치에 나와 볕을 쬐며 뿌듯해하는 광경을. 나란히 앉아 함께 원 없이 일광욕을 하다가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자리에 화분을 쓱 밀어 넣고는 뿌듯해하는 얼굴을.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종일 일해야 하는 그에게 허락된 산책 시간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다. 그는 아예 공원의 작은 회양목 울타리 뒤켠에 강낭콩을 심기로 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제 산책하는 노부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7월의 어느 날 공원 관리인의 손에 콩이 뽑혀 버려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소중한 콩이 잡초와 다름없이 여겨진다는 사실을 노부인은 당당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말없이 콩꼬투리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빈 화분에 다시 콩을 심는다. 작은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이야기는 그가 강낭콩 화분을 창가에 내놓으며 끝난다. 마침 창밖에는 조용히 단비가 내리고 있다. 다시 심은 강낭콩은 이전보다 더 잘 자라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노부인의 마음이 이전과 달라질 것만은 알 수 있다.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테니 실망은 덜할 것이고, 경험이 생겼으니 이전보다는 요령 또한 늘었을 것이다. 이번에 키우는 콩은 이전과 어떻게 다른가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시들어버린다면? 또다시 심으면 된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산책 코스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감시자가 있는 공원 대신 누군가의 정성을 무심히 혹은 응원하며 지켜봐 줄 볕 좋은 땅을 이번에는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야 어찌 됐든 그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인생의 가지 끝에서 막 새로운 싹 하나가 돋아났으니. 식물에 '정아우세頂芽優勢, apical dominance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식물의 줄기나 가지 맨 끝에 달린 어린싹 '정아頂芽'에 식물의 힘이 가장 집중되는 현상을 뜻한다고, 새잎이 나면 괜찮은 거라 말해주었던 친구가 알려주었다. 정아의 성장은 식물이 지금 자라는 쪽으로 힘을 쓰고 있다는 증명이다.
몇 해 전 여름 조카들의 집 베란다에서도 강낭콩이 자랐다. 큰조카의 학교 관찰일지 숙제였다. 베란다라고는 해도 콩과의 식물이 자라기에는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의 지극정성에도 강낭콩은 비실비실 웃자랐다. 하루는 큰조카가 베란다로 나가 제 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사랑한단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아, 광합성은 몰라도 사랑은 아는 귀여운 녀석. 아이 역시 아는 것이다. 사랑도 넘치면 탈이 난다는 것을. 정아가 우세해도 사는 일은 종종 과유불급이니 균형을 맞추는 일이 때로는 더 중요하다는 것도. 이후 동생네 가족은 베란다에서 쌈 채소와 토마토 따위를 키워 먹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집 근처 주말농장도 꾸렸다. 이랑 몇 개를 얻어 봄부터 파종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주러 다니는 동안 갖가지 채소를 꽤 풍성하게 수확해 냈다. 한동안은 나도 작물을 나눠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후 더는 주말농장을 할 수 없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조카네 집 베란다에서는 여전히 밥상에 오를 잎채소와 열매채소 몇 가지가 자라고 있다. 땅에 심을 때만 못하다면서도 부지런히 키워 먹는다. 사실 식물 생활이나 자급자족은 아이 셋 돌보느라 바쁜 동생이 아닌 내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강낭콩 때문에 선수를 빼앗겼다. 콩 한 포기 키우는 일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이토록 놀라운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과 관계 맺는 경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서로를 이끈다. 무채색의 세계를 색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평생 모를 것 같았던 일에 푹 빠져들게도 만든다. 이어져 있는 존재들은 언제나 서로를 변화시킨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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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
어른들과 그림책을 읽고 문장을 쓴다. 어느 한구석 이상한 데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를 아직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앞에서 오래 서성이고 응시한다. 그곳에 끝까지 알 수 없는 아름다움, 틈새의 발견, 나를 한 칸 더 넓히는 기쁨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썼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그림책을 동료 번역가와 함께 옮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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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장을 보내주세요. 나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 '어린싹'이 있다면 공유해 주셔도 기쁠 거예요.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 출간 후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립니다. 선정자는 연재 종료 후 발표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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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연재글의 답장을 나눕니다. 다 싣지 못해 아쉬워요. 깊은 마음 가득 담긴 답장들 모두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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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작가님의 신작 출간 소식에 기뻤습니다. 작년 1월에 상반기 출간 예정 목록에서 '무루'라는 이름을 본 순간부터 기다림이 이어졌네요. 얼른 그 '낙원'을 알아가고 싶어집니다.(3주는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ㅠㅠ) 유난히 적막하다 싶은 순간에는, 소리를 내어 책을 읽습니다. 좋아하는 에세이 한 권을 펼쳐들고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를 내어서요. 창밖의 나무와 새, 혹은 앞집 담벼락에 앉아 있는 고양이에게 읽어주듯이. 그리고 고독을 즐기려는 제 자신에게요. 이것이 저의 레시피(?)입니다. _봄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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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가 버리고>를 천천히 읽어가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나는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혼자'라는 상태를 선택한 게 아닐까?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또 어딘가로 나를 이끌어주지 않을까 믿고 싶어요. [월간소묘: 레터]를 통해 무루 작가님의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를 먼저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앞으로 남은 2번의 레터도, 책 출간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 _쏘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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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뜻밖의 고독이 방문한 것도 모르고 하루를 쪼개는 것만, 할 일 목록을 지우는 방법만 알았던 독자입니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쉬고 싶어, 하던 혼잣말이 현실로 이뤄졌는데요. 쉼은 혼자 오지 않고 암이라는 질병과 함께 왔어요. 덕분에 병원, 수술, 병가, 위로, 선물 그리고 하루 세 끼라는 일상으로 갑자기 바뀌었어요. 병으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불안을 만날 때도 있고요. 바깥은 계절이 바뀌고 있는데 나는 이대로 괜찮은지 의심을 할 때도 있어요. 다시 새로워질 수 있으려나, 걱정도 하고요. 그럴 때 유튜브 대신 눈물의 마멀레이드가 있었군요. 다름 아니라 완전히 홀로인 고독이라는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까, 저도 이제 그렇게 생각해볼게요. 오늘은 소삭거리던 마음이 정돈되는 좋은 밤이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_곤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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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마음속에 낙원이 있 다생각하고 어디든 도망가지 않고 맞서고 싶네요. 고독할 때 나를 채워주는 레시피는 누구나 해먹었을 듯한 토스트입니다. 식빵을 후라이팬에 기름 없이 구워요. 그리고 계란후라이 하나 만들어서 식빵에 먼저 딸기잼 바르고 계란후라이 올리고 치즈 한 장 깔고 그 위에 캐찹을 뿌리고 식빵을 올리면 간단하지만 맛있는 토스트가 됩니다. 딸기잼과 케찹이 은근 어울려요. 단짠이죠. 만드는 법도 간단하고 행복해지는 시간이 되어줍니다. _르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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