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계엄과 나

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안녕'이란 단어 뜻(아무 탈 없이 편안함)을 다시 찾아보게끔 하는 격동의 나날들입니다. 이번 레터는 이 시국에 마감을 맞이한 이현 아빠 규성 님이 보냅니다.

+ 어수선한 때일수록 자기중심을 지키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행복을 지켜야 하는 의무도 있겠죠. 썬데이 파더스 클럽 멤버 현 님도 참여한 육아일기 전시 <Echo | 일기 같이 쓰는 사이>(~12/18, 서울 성수동)를 소개합니다. 아이와 함께 나다운 방식으로 성장한 양육자 27명의 진솔한 기록을 만나보세요.

평소보다 이른 육퇴가 찾아온 12월 3일 화요일 밤 10시. 시즌 2가 시작된 이후 바뀐 수요일 마감에 맞추기 위해선 오늘 밤에는 뉴스레터 초안을 마무리해야 했다. 뭘 써야 할지 막막했던 평소와 달리,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담아 온 주제가 몇 가지 일들과 맞물리고 있어서 마음은 초조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리에 앉기 전 글쓰기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창작의 고통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샤워를 하며 머릿속 잡념을 가다듬었다.

샤워를 마치고 안방에 오자 갑자기 아내가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정치 뉴스도, 정치 유튜브도 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SNL 같은 예능을 봤나 했는데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나온 이야기라 했다. 휴대폰을 열고 네이버 메인에 접속하니 대통령의 담화 영상과 난생처음 보는 포고문이라는 게 올라와 있었다. 각종 단톡방은 분 단위로 안 읽은 메시지가 쌓여갔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회사 인사팀으로부터 재택근무 권고 메일이 왔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사무실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국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불안과 두려움도 같이 업데이트되었다. 회사 메일도, 각종 기사와 영상들도 12월 연말 새벽과 2025년을 코앞에 둔 시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최대한 무시해보려고 했다. 텅 빈 워드 문서를 열고 샤워를 할 때 맴돌던 생각이라도 최대한 끄집어내 보려 했다. 하지만 내 집중력은 이미 미디어에 도둑맞은 상태였고 육아의 따뜻한 감성 또한 포고문의 냉엄한 언어들로부터 처단당한 느낌이었다.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환기하려고 거실에 놓인 크리스마스트리의 오너먼트와 반짝이는 전구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한 장을 겨우 채워 넣은 초고를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별로였다. 내용의 문제라기보단 제목과 주제의 문제처럼 보였다. 마감을 (또) 못 지킬 거 같아 아빠들 단톡방에 이실직고를 하러 들어가 보니 모든 채팅방이 어젯밤 이야기로 채팅이 오가고 있었다. 썬파클 오픈채팅방에서도 여러 양육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새벽에 아이 옆에서 깨서 잠깐 휴대폰 들여다보려다 밤을 새웠네요. 너를 이런 세상에서 살 게 할 순 없는데, 미안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뉴스에 받는 충격이 싱글일 때의 x20 배 정도 되는 거 같아요.”
“아이 등교시키고 오는 길인데 괜히 그냥 맘이 찡한 등굣길이네요.”
“아이가 아침에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뭐가 그리 감사한지 꼭 한번 안아줬네요.”

계엄, 체제전복, 약탈, 척결, 처단 등 역사책 속 죽어있던 단어들을 접하다 아빠 엄마의 살아있는 마음을 접해서였을까. 채팅방을 보는 것만으로 밤사이 얼어붙었던 감성과 인간성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책임이 아님에도 책임의식과 미안함을 느끼는 어른들의 마음은 과거 수많은 국가적 참사에서 보도된 어른들의 미안한 감정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갖기 전에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심을 두고 이름 모를 타인에게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는 게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정치 뉴스는 곧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경제사회 뉴스는 나와 내 아이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대응해야 하는 현실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왕이면 내 아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사회에 불응하지 않고 적응해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반국가세력은 곧 육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반육아세력과 같은 말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권력을, 누군가는 양심을, 누군가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사람마다 그 우선순위는 다른 게 당연하지만 어린아이를 키우는 아빠 엄마의 관점에서 1순위는 아마 같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 이야기도 이제는 그게 단순 허구가 아님을 안다.

지난 수요일, 아마도 많은 아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 주변엔 ‘내 가족의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워 노력한 어른들이, 누군가의 이기적인 의사결정을 되돌리기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한 어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겪을 감정의 동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 감정의 동요를 대신 겪으며 난생처음 듣는 한자어의 뜻을 찾아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고심한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비록 스웨덴 총리는 방한 일정을 취소했지만, 산타할아버지는 계획대로 오셨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올해는 착한 아이뿐만 아니라 용기 있는 어른들도 많아서 안 오실 수 없다고. 오셔서 반육아세력을 처단치유하시고 착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실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저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Fathers’ Guide

1.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전국에서 촛불 집회가 열리고 있어요. 뉴닉이 정리한 집회 가이드를 공유드려요.

2. "비상계엄령이 뭐예요?" 어린이는 이런 위험한 일들은 모르는 게 약일까요? 어린이 질문에는 이렇게 알려주세요. 이번에는 우따따가 잘 정리했어요.

규성@greg_pl

6개월의 육아휴직 경험을 밑천 삼아 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아빠로 인정받고 싶은 남자. 지속가능성과 무사안일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지만 미루기와 벼락치기가 특기이며 저녁형을 넘어 자정형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결혼과 육아, 커리어와 물질적 안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J와 P를 오가는 자아를 갖고 산다. 책 《썬데이 파더스 클럽》을 썼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14화 나는 너의 매니저)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장롱면허였던 제가… 아이 하원 라이딩을 위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아이가 제 삶에 많은 (다양한) 길을 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쳇바퀴 같은 하루의 끝에 잠자리에서 아이의 쫑알거림과 굿나잇 인사는 고단함을 잊게해주죠. 그리고 다음날 라이딩 할 원동력을 주고요~ (너를위해)

💬 이렇게 의식의 흐름같은 일기도 너무 좋네요...! 특별한 일이나 깨달음을 주는 사색보다 흐름을 쫓아가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이 훨씬 많잖아요 ლ(╹◡╹ლ) 식상한 말이지만 매일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양육자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책 잘 사셨어요!! (돈 보태줄 것은 아니지만...) (밤박하)

💬 미래의 제가 이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매니저"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자기전에 "엄마 아빠 사랑해"라고 외쳐주며 꼭 "아빠"를 빼놓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빠가 출근하면 어디갔냐고 물어봐주는 우리 예쁜 딸을 위해 "매니저"의 역량을 미리미리 키워둘까봐요ㅋㅋㅋㅋ 이참에 딸아이가 아이돌도 했으면 매니저 더 잘 할 수........있으려나요ㅋㅋㅋ (지아빠)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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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김파카(@kimp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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