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때 행동하지 않으면, 생각과 충동만 빚더미가 된다. 다른 사람에게 진 마음의 빚이 무겁다면, 내가 나에게 지는 빚은 가렵고 따가운 두드러기 같다. 퇴사하고, 내가 꼭 하려고 한 것 중 하나는 영화를 찍는 일이었다. 내가 쓰고 상상한 글을 영상으로 만드는 것. 아니, 눈에 보이는 그럴법한 ‘세계’로 만드는 것.



영화를 찍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의 세계도 불쑥 넓어졌다. 한 친구는 장애인에 대한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녀에게 어떤 감독을 닮고 싶냐고 묻자,  맑은 눈과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도 굳이 닮고 싶지 않다고.



요즘 나의 마음도 그렇다. 굳이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행동과 행동이 이어지다보면, 또 다음 행동이 올 뿐이다. 글이든 광고든 영화든, 내 작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 할 방향으로 행동할 뿐이지. 명사화된 목표를 가지는 일이 신성화된 교육 제도에서 충분히 스스로를 갉아 먹고 살았으니까.



이걸 해서 뭐하게? 라는 질문은 그래서 무섭지가 않다. 해야하니까 한다. 다만 무서운 질문이 하나 있는데, 이게 영향력이 있을까. 보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까. 같은 것들.



친구는 내게 “장애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겠어요”와 같은 말을 했다. 나는 3년 전 쯤, 광주에 대한 인터뷰집을 출간 했었는데, 그 때도 비슷한 의문이 자꾸 들었다. 그 책은 잘 될 리가 없었다. 광주라는 도시에 대한 MZ 세대의 생각들, 누가 그렇게 돈 주고 사고 싶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뿌듯했던 이유는, 내가 새로운 생각의 ‘버즈량’을 조금은 늘렸을거란 희망이 들어서.


"너의 영화로 세상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만큼의 버즈량을 늘리는거야. 그걸로 충분해" 

친구도 안심하는듯 했다.



기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글과, ‘다음 소희’같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려도,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래도 분명한건, 우리가 어떤 키워드의 버즈량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있다는 것. 환경이든 여성이든 글쓰기이든 늙은 아빠이든 장애인이든 사랑이든 이별이든 재테크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행동하는 순간, 버즈량은 조금씩 늘어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는 속담이 있잖아. 우리가 조금씩 내뱉는 이야기가 우리 시대의 가랑비랄까.


가랑비 오던 밤, 교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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