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처가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나 홀로 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얼마 남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차 시동을 걸자마자 라디오를 틀었다. 한 때 챙겨 듣던 영화음악 코너가 끝나고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30분 뒤에는 끝나는 상황. 밴드 음악으로 채워졌던 시간은 아이의 낮잠처럼 짧게 끝나고 어느새 아이돌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가 시작됐다.

주파수를 방황하며 고민하던 찰나, 처음 듣는 DJ의 목소리가 내 귀에 걸렸다.  

“여러분 곁에는 늘 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와~ 뗄 수~ 없는~ 것!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연을 보내주세요. 사소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환영합니다.”

광고가 끝나고 청취자들의 사연이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손거울, 기름종이, 견과류, 보조배터리, 배드민턴… 등.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사소한 것들 뿐이네. 아이를 낳으면 저런 건 충분히 뗄 수 있을 텐데.’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최대치에 가까웠던 스피커 볼륨은 창문 밖 도로 소음보다 작아졌고 핸들의 무게감은 묵직해졌다. 직진을 하든 우회전을 하든 한 손만 쓰던 나는 아이 눈치를 보듯이 자연스레 두 손을 핸들에 올렸다.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아이가 괜찮은지 수시로 확인하면서 말이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할 때였다. 앞서 들은 라디오 사연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2년 전 나라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 영화관, 손세차, 테니스처럼 지금은 대체 가능하지만 당시엔 절대 포기할 수 없던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라면 어떨까. 과연 가족과 육아를 떼어놓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내게 뗄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모두 부모가 되기 전의 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아침에 감지 못한 머리를 감춰주는 모자, 식사 또는 외출 시 기저귀 갈 때 두루 쓰이는 물티슈, 육아 생필품의 공백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쿠팡과 컬리, 그리고 아마 내가 아버지로 살아가면서 내 옆에 짝꿍처럼 붙어있을 ‘불안’이란 감정이다.  

아이가 앞으로 살면서 마주할 위험들을 생각하면 막막해질 때가 많다. 당장에 지금 같이 운전하는 순간도 그렇다. 만약 옆에 오는 차가 갑자기 차선을 변경해 아이가 있는 쪽을 치면 어떡하지? 만약 내가 졸아서 갑자기 사고가 나면? 운전을 시작한 지 오래됐고 무사고 경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이를 태우기만 하면 다시 초보가 되어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오는 불안은 더욱 다루기 어렵다. 출산 후 아이를 처음 차에 태워 집으로 올 때도 그랬다. 매일 다니던 길의 익숙함은 온데간데없었고 내 주변엔 모두 나를 위협하는 차들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십여분 남짓한 거리는 한 시간처럼 느껴졌고 아파트 주차장의 방지턱은 아빠로서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마지막 관문처럼 느껴졌다.     

도로보다 훨씬 안전한 집에서도 부모의 불안은 계속된다. 아이가 침대에 올라오기만 해도, 요리 중인 주방 근처에만 와도, 매일 앉는 아기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일 때도 일상의 장르가 공포물로 바뀌는 상상을 한다.

아내의 상상력은 나보다 10배 정도 크다. 베란다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보며 내가 방충망에 구멍이 뚫릴까 걱정할 때, 아내는 인형도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은 창살 너머로 아이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다. 내가 돌봄 이모님의 지역, 시급, 일정 등 기초 요건들을 고민할 때 아내는 자칫 모르는 타인이 아이에게 나쁜 짓을 할까 걱정한다.

불안*은 결국 아이를 아껴서 조금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돌보고 싶은 마음으로 우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론 너무 버거워 이미 갖고 있던 자신감마저 잃게 만들고 부부싸움까지 하게 만드는 대단한 녀석이다.
* 실제로 부모의 불안(parents’ anxiety)이 아이의 불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가 있다. - 편집자 주

집에 도착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아내에게 우연히 들은 라디오 사연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말했다. 아내는 휴대폰에 메모해 놓은 책의 한 구절을 보여주며 답했다. “출산 전에 이 글을 보고 힘이 났어. 뉴스레터에 소개해도 좋을 것 같아.” 그 글을 보며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내가 평생 쓰지 못할, 담담한 위로의 글 같아서 그대로 옮겨본다. 

“작고 평온한 세계에서 부침 없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닐까 싶은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태어난다. 아이들의 마음의 비율은 어째서 태어나는 쪽으로 기울었을까. 아마도 자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모두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용감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부모를 응원하고 위로한다.

아이의 탄생에 오직 부모의 의지만 개입했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모든 행불행은 부모의 책임이 된다. 부모의 미숙함과 세상의 불완전함은 아이를 돌보는 마음에 자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 나에게 와준 것이라면 부모는 씩씩해질 수 있다. 함께 힘을 내볼 수 있다. 아이도 용기를 내줬으니까.”

- 무루(박서영),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어크로스, 2020)

아이를 내 힘으로 키웠다고 말하기 민망할 때가 많다. 처음으로 제 몸을 뒤집었을 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을 때, 젖병을 떼고 수저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도 내가 한 거라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은 게 전부였다. 필요한 자극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려고 노력했지만, 성장 자체는 스스로 한 셈이다. 아내와 내가 부모가 되고 매일 찾아오는 불안을 이겨내는 데 아이의 용기 있는 성장은 언제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부모가 아이의 불안을 돌보듯 아이도 부모의 불안을 돌봐준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 역시 일직선이 아니라, 각자 역할을 채우며 ‘가족’이란 모양을 완성해 나가는 게 아닐까. 마감을 앞두고 글을 쓰는 아빠를 위해 홀로 베란다에서 식물에 물을 주며 노는 아이를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안락한 엄마 뱃속을 나와 하루하루 모험을 하고 있는 아이가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인다.

고마워, 나의 작은 어른.

지난 레터 ‘누군가에겐 생소한 광경’에 관한 구독자 분들의 의견을 소개할게요. 다들 소중한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1. “웃음이 터집니다. 지금 저희 아이들이 열다섯, 열한 살인데요. 첫째 아이가 일곱 살, 둘째가 세 살이던 어느 주말, 남편이 친구 결혼식 참석차 충북 영동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아주 자신 있게 ‘당신은 쉬어. 내가 둘째 데리고 결혼식 다녀올게’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몇 시간 뒤 전화가 옵니다. 응급실에서요. 뭘 했는지 팔이 빠진 것 같은데 시골 응급실에서 팔을 맞혀(?) 주지 못해 집에 돌아올 때 정말 아이는 꼬질꼬질 눈물, 콧물 자국을 얼굴에 남긴 채 반 깁스를 한 채 돌아왔죠. 다음부터 절대 아이와 나만 두지 말라는 남편의 큰 그림이었을까요?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라고, 인스타그램 통해서도 잘 보고 있습니다. 아빠의 육아가 자연스러워지는 그날까지, ‘썬데이 파더스 클럽’ 정말 응원하겠습니다!” (조이래빗 님)

2. “아이가 셋인 친구가 다 함께 소아과에라도 데리고 가는 날엔, 어린 자녀를 품은 부모들의 걱정 어린 또는 존경 어린 시선들이 느껴진다고 해요. 그럼 제 친구는 ‘전 괜찮아요!’라는 표정으로 답해준다고 하네요. 전 아이가 하나지만 20년 후에는 ‘아이가 셋’인 제 친구를 부러워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삼 남매거든요 :) 정우 님, 파이팅입니다!” (미니미 님)

3. “5살 딸이 하나 있는 아빠입니다. (...) 아이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그 시간의 절대량에 따라 친밀함, 애정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물론 절대량만큼 그 시간의 질도 중요하겠지만요. 제 아이는 엄마 > 엄마 할머니(저희 집은 외할머니라는 말 대신 이런 말을 쓰고 있어요) > 아빠 순인데, 정말 이 순서대로 시간을 많이 보내거든요. (...) 얼마 전부터 딸이 유치원에 가기 시작했는데, 제 출근 동선과 겹쳐 항상 같이 등원해요.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일주일 정도 재택근무를 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낸 만큼 절 더 많이 찾더라고요. 그러면 기쁘기도, 피곤하기도 하고, 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진작에 더 잘할 걸요. 저도 아이와 둘이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나중에 아이와 가기 좋은, 가성비 좋은 곳들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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