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위선, 허구의 나라, 조선이 주는 교훈
거짓과 위선, 허구의 나라, 조선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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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정치, 사회 등 전반에서는, 거짓과 허구가 항상 그 시대를 위태롭게 만든다. 우리 역사에서 이들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다가 결국은 나라가 망한 슬픈 기록을 남긴 것이 조선이다. 망국의 중심에는 당쟁이 대두되지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거짓과 위선, 허구와 조작의 행적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노론의 거두 송시열(宋時烈), 그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그의 스승인 서인의 율곡 이이(李珥)다. 율곡이 주장했다는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의 허구가 수년 전부터 역사 교과서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그러나 이 허구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이것이 조작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서적에서는 “십만양병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고, 다만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기록을 모아 재집필해 신뢰가 떨어지는 《선조수정실록》과 김장생이 이이에 대해 평한 《율곡행장》속 ‘십만양병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처음 시작된 내용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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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미리 10만 명을 양성하여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못 돼서 흙이 무너지듯 하는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정승 유성룡(柳成龍)은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이라 하였다.” 선생이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데, 시속 선비는 시무(時務, 시급한 일)를 아뢰지를 않습니디. 다른 사람이야 진실을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 또한 이런 말을 하십니까?” 하였다. 이이는 서인이고 유성룡은 반대 세력인 남인(南人)이었다.
또, 이를 송시열은 <율곡연보>에서는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 4월’의 일로 구체화되었다. 김장생이 ‘일찍이’라고 모호하게 창작한 시기를 정확히 임란 10년 전의 일로 특정해 선견지명이 있는 성인(聖人)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송시열은 ‘이이가 10만 군사를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호역(戶役, 세금)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사실인 것 같이 조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최근 우리 정치와 사회 곳곳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국민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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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사후(死後)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게속 집권하면서 해동성인(海東聖人),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 더욱이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사상에도 긍정과 부정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 83세의 그의 말년은 유배 후 돌아오는 길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무려 12년 만에 출사한 송시열은 입대(入對, 임금 앞에 나가다)를 청했는데 “이때 마침 상계 병이 있어 접견하지 않으며, 시열을 대청(臺廳)에서 조복(朝服, 관원의 예복)을 벗고 곧장 국문(國門)으로 나악 상소하고 떠났다” 불과 20일도 안되 벼슬을 내던지고 떠나면서, 송시열은 상소 한 장에 “군사를 닦고 준비하여 외적으로부터 수모를 막을 것” 등 13개 조문을 역설했다. 이렇게 효종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한판 승부에서 송시열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유명한 <기축봉사>라고 부르는 글이다. 봉사란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하여 임금에게 바치는 글이다. 소위 독대(獨對)인 것이다.
흔히 송시열을 극단적인 북벌론자로 많이 이해한다. <기축봉사>에는 북벌에 대한 송시열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글에서 시종일관 주희(朱熹), 즉 주자(朱子)를 칭송한다. 특히 송시열에 있어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明)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적 북벌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소위 세치 혀로만 북벌을 높인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좌파들의 통일론이 북한에 퍼주기나 눈치를 보며 통일을 말하는 비겁한 모양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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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나라가 망해도 나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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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나이 82세 임금에 버금가는 위세를 지닌 송시열이 고향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배후에서 서인들을 움직여 왔으나 장희빈 소생의 아들 문제로 집권 서인은 숙종의 빠른 조치에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일격을 당하자 송시열이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정권 자체가 서인 정권인데다 대다수 대신들이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당시 영상 김수홍은 국사를 먼저 송시열과 상의해 제가를 받고 나서야 처리했다고 하니, 사실상 조선의 국왕은 둘인 셈이다.
임술년(1682)에 남인(南人)들은 서안들에의 도륙 당하고, 노론 집권 300년 동안 중앙정치무대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정치의 균형이 깨진지 오래였다. 그러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자 당시 노론의 영수 이완용과 노론 대신들은 조선을 팔아먹는다. 1910년 10월 7일 일제 강점기시대 일본은 <조선귀족령> 제정에 따라 이완용 등 76명에게 작위 수여와 거금(巨金)을 준다. 당시 친일 세력의 대부분은 노론 출신이었다.
거짓말과 위선 조작을 일삼는 이들은 국민을 속이기를 식은 죽먹기 같이 생각했었다. 그들에게는 조국(국가)이란 없는 것이다. 잘못된 사상으로 점철된 오로지 나만의 부귀영화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한민족의 전통적 철학과 사상이 점차 퇴색되어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 더욱이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 국민 스스로가 우매해서 눈을 크게 뜨고, 바른 것을 보지 못한다면, 노론 세력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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