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소사


- <지구를 공부하는 밤의 북클럽>공지를 토요일 오전에 올려 목요일까지 신청을 받기로 하였는데, 쇄도하는 신청서에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라는 말을 떠올렸다. 신청 기한을 좀 짧게 둘 걸 말이다. 오프닝 강연의 최재천 선생님 인기가 대단하시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바쁘실 텐데 작은 서점의 초청 메일에 답도 즉각 해 주시고 중간에 보낸 메일에도 짧게라도 즉답을 해 주셨다. 역시 인기에는 멋진 인품이라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서점이 작아 10분밖에 초청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못 오신 분들은 인스타 라이브를 진행하니 보셔도 좋겠다.  

 

- 연애소설을 읽어야 할 일이 있어서 공부하는 자세로 책을 검토하다가 연애문학상을 받았다는 말에 읽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초장부터 당황했다. 일단 레즈비언 물이었고(퀴어물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 소설을 참고해야 했기 떄문이다.) 나는 지하철에서 읽고 있었고 묘사의 수위가 높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근두근 읽었다. 역시 연애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닌 듯하다. 회원님들 참고할 연애소설 있으면  좀 추천해 주세요. (폭풍의점장)


- 최근에 취향이 비슷한 친구에게 영업해, 안 보겠다는 <헤어질 결심>을 같이 보았다. 영화에 흠뻑 취해 극장을 나온 나와는 달리, 보는 도중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대중성과 상업성, 취향에 있어서 내가 생각보다 마이너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좀 불안해졌다. 서점에서 책을 추천할 때도 이는 통용되는 것이기에;;


-폭우가 쏟아져 서점에 누가 오려나 싶은 날에 어김없이 방문하는 손님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서점 오기 좋은 날씨네, 싶은 날에는 나와 구 씨(길냥이)만 서점을 지키고 있다. 서점 방문과 날씨의 상관관계는 참으로 미스터리하다.(밤의점장)

  
점장이 읽고 있어요

밤의점장

바버라 J. 킹,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서해문집)

 

: 한번은 유투브 알고리즘을 타고, 죽은 친구 고양이의 털을 핥아주며 일주일간 곁을 지키던 고양이의 영상을 보았다. 고양이는 인간 냄새가 묻은 새끼를 버리고 간다, 인간의 감정을 동물에게 적용하는 건 지나친 의인화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지냈기에 그 영상 속 고양이가 묘하게 내내 눈에 밟혔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잃고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힘들어하는 지인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그런데 곁에 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 동물도 그와 같은 슬픔을 느낀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간 인류학자나 동물학자들이 다루었던 동물의 생태 중에서도 이 책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주목해 다룬다. 인간이 사별 후 느끼는 애도의 과정이 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온다는 걸 입증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저자 바버라 킹은 고양이, 개, 코끼리, 염소와 말, 새 등 동물의 감정적 삶을 섬세하게 다룬다. 그로부터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사별한 동물들에게는 사랑했던 개체의 시신 곁에서 잠시 머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이 책은 동물들의 사례를 소개하는 방식에 있어 굉장히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면 동물권이나 동물 종의 특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랑과 슬픔을 느끼는 모든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슬픔의 근원은 사랑이다. 주인을 향해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 동물들이 같은 개체를 향해 사랑과 슬픔을 표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미야구치 코지,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인플루엔셜)

 

: 이 책의 표지 그림은 꽤나 충격적이다. 저자가 소년원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케이크를 삼등분해보라고 하자 아이들은 망설이며 케이크를 잘랐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나이에 흉악 범죄를 저지른 그 아이들은 놀랍게도 케이크를 같은 크기로 나눌 줄 몰랐다.

 의욕이 없고 주의력이 떨어지며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교육 현장에서 소외된 14%의 아이들, 그들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비뚤어지거나 반성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실상은 인지기능 자체가 떨어져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문제 행동을 하다가 범죄에 쉽게 내몰리게 된다.

 일본의 아동정신과와 의료 소년원에서 근무한 저자는 이 아이들의 특징(인지 기능이 약하며, 감정 제어 능력이 약하며, 자기평가가 부적절하다 등 6가지로 정리됨)을 다루며 우리의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인지 기능이 약하다는 말은, 듣는 힘이 약하다(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 대화를 따라갈 수 없다), 보는 힘이 약하다(상대의 표정이나 몸짓을 읽지 못하고 부적절한 언행을 한다), 상상력이 약하다(상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쾌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교정할 때 반성이나 노력을 강조해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의 인지 기능을 끌어올리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사례는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과 사회를 돌아보게 해준다.

 교육 현장에서 소외되고 범죄로 내몰리는 아이들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아이들을 다루는 교사 및 자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부모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폭풍의점장

허경회,<권진규>(PKMBOOKS)


: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으로 발간된 이 평전을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특히 첫 부인 도모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다.) 처음엔 저자가 조카여서 칭찬 일색이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웬 걸 매우 문학적이면서도 사실에 충실한 평전이었다. 저자 서문 격인 들기에 나오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부터 강한 울림을 주었다. 저자는 이 시로부터 권진규의 예술 세계를 정의한다.


세상엔 두 부류의 삶이 있다. 누군가는 권력으로 산다. 정부든 학교든 시장이든 모든 제도는 제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권력을 나누어 주며 구성원들을 유인하고 순치한다. 많은 이가 그러한 제도의 단맛을 누리며 산다.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행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권력 아닌 나력으로 산다. 자신이 지닌 원초적 재능에 스스로 획득한 지식, 기술 등의 힘을 더하여 독자적인 삶을 꿈꾸며 산다. 이들은 제도에 의해 순치되기를 거부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이들은 기존 제도 및 기존 가치를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 그 결과가 창조적인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_본문에서

 

 '나력으로 살아간 작가' 권진규의 예술 세계에 관심이 있는 분께 강추하는 책이다. 꼭 권진규가 아니더라도 예술가의 길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도 추천한다. 40년대에 청년시기를 보낸 예술가가 혼돈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며 사랑하고 좌절하였는가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권진규의 작품을 훌륭한 사진으로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에이모 토울스,<링컨 하이웨이>(현대문학)


: 전작 <모스크바의 신사>를 참 좋게 읽었기 때문에 신간이 나왔다고 했을 때 바로 알라딘 양탄자 배송으로 시켰다. 전작을 좋게 읽었다는 말은, 가독성도 좋고(쉽고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깊이도 있고 다 가졌다는 말이다. 특히 백작 캐릭터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링컨 하이웨이>는 좀처럼 초반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띠지에 쓰인 것처럼 한 마디로 열흘의 여정, 그리고 평생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장 소설이다. 미국 최초의 횡단 고속도로 링컨 하이웨이를 따라가는 소년들의 이야기인데, 10장의 챕터로 되어 있고 나는 5장까지 읽었다. 챕터 하나에 에밋, 더치스, 울리가 돌아가면서 소제목으로 기술되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 외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한다.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에밋이 주인공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에밋이 3인칭으로 기술되는 반면 더치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된다. 시점 처리를 이렇게 한 이유가 궁금한데 끝까지 읽으면 이유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초반에 배경 이해에 들어가느라 약간 삐걱거렸지만 역시나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전작의 기대가 크지 않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라 인정한다. 미국 역사와 책에 관한 디테일들이 읽는 재미를 주는데, 이것은 물론 내가 미국인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에이모 토울스는 어느 시대에도 의미 있을 클래식한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곧 다 읽어보겠다.


옛날 사람

읽는 사람_2

- 폭풍의점장이 읽은 이것저것에 대해 씁니다.


 * 이 글에는 영화<헤어질 결심>의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현대인치고.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범죄용의자였던 서래는 자신을 담당한 사람이 품위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형사는 경찰치고? 한국인치고? 아니면 남자치고?라고 물었고 그때 그녀가 한 대답이 위의 대답이다. 인상 깊었다. 현대인치고 품위있는 일이라면 뭐가 있을까? 유튜브 영상과 SNS글이 난무하는 시대에 굳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도 현대인치고 품위 있는 일 아닐까 한다.

 

 서점을 하다 보면 책 추천 요청을 받는데, 점장 7년차의 관록이라 이제 어떤 추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천박한 책 추천이다. 다음에 올 때는 천박한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손님이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책이 없다. 밑바닥 인생을 그린다고 해도 그 나름의 감동이 있어 천박하다는 생각을 주지는 않는다. 그 손님이 오실까 노심초사중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실까?

 

 '천박의 반대가 품위에 가깝다고 한다면, 책장을 넘기며 품위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 있다. 처음 '패션 잡지'라는 것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 기억난다. 이전의 잡지들이 말 그대로 잡다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책이었다면 패션 잡지는 화보가 많고 인물 사진의 비중이 높았다. 모델이 걸치고 있는 옷들에 화살표가 달려 나와 가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천박했다. 품위가 없었다. 사람에게(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가방과 신발에게) 가격을 매기다니. 요즘은 그런 것이 당연해서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의아해하실 것이다. 웬 옛날 사람인가 하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옛날 사람이 나온다. 사카니시 도오루군은 대학 졸업반의 젊은이지만 분명 옛날 사람이다. 공산품으로의 집이 잇달아 시공되는 시대에 종합건설회사 설계부도, 포스트모던계 아틀리에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그는, '가능성이 없지만 가장 바라던 바'인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일하고 싶다는 편지를 '정중하게, 그러나 가능한 한 짧게' 보낸다. 졸업작품으로 준비하던 휠체어 생활이 가능한 소형 주택 플랜을 동봉해서 말이다. 존경하는 건축가의 사무소 여름 별장에서 국립도서관 설계 공모를 준비하는 이 이야기에는 현대의 소음이 없다. 인터넷도 자극적인 사건도 없다. 풀냄새와 나무냄새, 새소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실한 성찰이 담겨있다. 서점을 처음 연 해 여름에 나온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고아한 소설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지금도 이 책을 사 가는 분들께 이야기한다. 부럽습니다. 아직 안 읽으셨다니.*

 

 올가 토카르추그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주인공 두셰이코는 윌리엄 블레이크에 조예가 깊고 점성술을 신봉하는 노년의 싱글 여성이다. 그녀 또한 못 말리는 옛날 사람인데, 본래는 교량 건설 엔지니어였지만 지금은 산속에서 별장 관리원을 하며 물질문명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아간다. 그녀는 비열한 인간인 옆집 이웃 왕발이 반나체로 죽은 것을 보고 시체에 옷을 입혀준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왕발은 그녀가 죽이고 싶을 만큼 혐오해 마지않던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죽음 앞에 예를 갖추어 주는 것이다. 최근의 흉흉한 사건 앞에서 두셰이코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랄 것 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시절에 도달했을까.

 

 생각해 보면 문학이란 본래 옛날 사람을 위한 것 같다. 아니, 옛날 사람들이 문학을 한다고 얘기해도 틀리지 않겠다. 제발트는 <이민자들>에서 세계대전이라는 폭력적 역사에 묻혀버린 이민자들 개개인을 우리 앞에 호명해 낸다. 소설인지 아닌지 장르가 헷갈릴 정도로 현실감이 있어 죽은 사람들이 나와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민자들>자체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사려 깊은 태도가 더 인상적이었고 작가의 생몰연도를 보면서 다시금 놀랐다. 1944년에 태어나 2001년도에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사람인데, 2001년이면 인터넷도 있었고 핸드폰도 있었던 시절이 아닌가. 어쩜 이렇게 격조있게 쓸 수가 있을까. 옛날에 살았다고 해서 옛날 사람은 아니다. 현대에 살아도 옛날 사람은 옛날 사람인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옛날 사람이 있다. 크리스티앙 보뱅이 쓴 <그리움의 정원에서>의 맨 앞장에는 그 책의 오리지널 판은 순수 라나 독피지에 51부를 인쇄하여 1부터 51까지 번호를 매겼다라고 쓰여있다. 소중한 사람의 애도에 알맞은 형식을 지켜 초판을 출간한 것이다. 그가 사랑한, 그러나 지금은 죽은 지슬렌은 두 번의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도 있지만 그 중 한 번도 크리스티앙 보뱅이 남편인 적은 없었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까? 아니면 소유하지 않아서 영원히 사랑하게 된 것일까? 이 한 권의 절절한 추도사를 읽다 보면 작가는 지슬렌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문단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이 태어난 브르고뉴 지방의 크뢰조에서 평생 고독하게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책날개의 짧은 설명만이 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자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핑핑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가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잊지 않은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사람과 동물을 비롯한 생명을 존중하는 것,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영원한 사랑을 응당 시도해 보는 것. 이런 당연한 가치들을 생각해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쓰다 보니 누군가가 나를 째려보는 느낌이 든다. 왜 나는 빼놓았느냐고. 돌아보니 윤동주, 백석, 그리고 파스칼 키냐르 등의 옛날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황급히 최고의 옛날 사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환한다. 그가 죽기 전에 일기장에 쓴 구절을 꺼내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을 유언으로 남길 수 있다니. 기후 위기와 흉흉한 사건들을 보며 인간 다 멸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같은 인간 주제에 인간들을 저주하는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말씀이다. 나도 저런 불굴의 품위를 갖고 싶다. 하지만 갖고 싶다고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 테니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수밖에.(By폭풍의점장)

 


*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의 서문에 쓴 말을 차용하였습니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남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나이츠픽: 서해인, <콘텐츠 만드는 마음> 


콘텐츠 소화불량에 걸린 당신에게



 SNS 외에도 유튜브와 OTT 서비스가 다양화되면서 우리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되었다. 내 경우를 생각해봐도,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입고할 책들을 찾아 업데이트 하며 틈틈이 읽고, 집안일을 하는 동안 배경음악처럼 팟캐스트를 틀어놓는다. 회자되는 추천 콘텐츠는 메모장에 입력해두었다가 살펴본다. 지하철을 탈 때면 이어폰을 꽂고 미리 골라둔 음악을 재생하며 책을 읽는다. 식사를 할 때도 짧은 시트콤을 틀어둔다. 이쯤 되면 콘텐츠에 잠식당한 삶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콘텐츠라는 말을 들어도 기대나 설렘이 생기지 않는다. 쏟아지는 콘텐츠를 꾸역꾸역 소비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나 이들을 한층 더 자극하기 위한 썸네일과 카피 같은 것들이 떠오를 뿐이다. 우리는 결핍된 상황보다 모든 게 과잉된 풍족한 상황에서 더 쉽게 물리고 지루함을 느낀다.

 

 서해인의 <콘텐츠 만드는 마음>은 그런 나의 관점을 의미심장하게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콘텐츠를 소비와 소모의 관점에서 보는 한 우리는 소화불량에 걸린 불행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돌아보니 콘텐츠라는 단어가 오염되었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이를 ‘만들고/소비하는’ 행위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애정을 담아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과,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즐겁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었던 것이다. 이 책은 콘텐츠를 둘러싼 ‘사람’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우리 삶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콘텐츠를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 책의 1부는 ‘보는 사람’, 2부는 ‘만드는 사람’, 3부는 ‘일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음악페스티벌, 영화, 팟캐스트, 케이팝, 코로나 시대의 콘텐츠 등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의 이야기다. 특히 팟캐스트를 챙겨 듣는 심리를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지점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단박에 이해했다. 퇴사 후 저자가 배 과수원의 인공수분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목이었다.(콘텐츠를 다룬 책이지만 중간중간 저자의 삶을 읽는 재미도 쏠쏠한 책이다.)

 

나는 당시 끝도 없이 하얗게 핀 배꽃 사이에 서서 내가 한 일이 언제 어떻게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겠다는 막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왜 언제나 내가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는 사람이지? 배 과수원에서 일일 아르바이트생인 내 지분은 한 줌도 되지 않는데도. 매일 팟캐스트 일고여덟 편을 무작위로 들었던 건, 서사화되지 않는 경험을 위로하는 데 또 다른 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_본문에서

 

 번역 프리랜서이자 서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인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회사에서와 달리, 내가 일한 결과물이 극히 드물게 보이는 직업이다. 그럴 때면 나의 하루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끊임없이 어떤 콘텐츠를 읽고 보고 듣는 데에는 그처럼 서사화되지 않은 일상에 어떤 서사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가 하면 ‘콘텐츠의 단점을 말하고 싶을 때의 체크리스트’ 편은 조급한 평론가가 되고 싶은 우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소비자인 당신은 콘텐츠의 맥락(세계관)을 익히는 데 충분히 시간을 들였는가? 혹은 ‘고객이 왕’이라는 마음으로 가성비라는 잣대만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기준까지 고민해가며 콘텐츠를 대하는 저자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면, ‘이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이야기가 왜 잘 팔리지?’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왜 팔리지 않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창작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주목하는지, 왜 나는 그것과 결을 달리하는지를 숙고해보는 것이다._본문에서

 

 작년 <오징어 게임>이 대세 콘텐츠였을 때, 또 어떤 잘나가는 작가나 유튜버의 행보를 둘러싼 못마땅한 공기가 주변에서 오고갈 때 꽤나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콘텐츠가 흥행에 성공하면 이를 둘러싼 찬탄과 비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작품을 비판할 땐 적어도 먼저 그걸 보거나 읽은 후(직접 체험한 후), 거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하지만 콘텐츠가 널려 있는 만큼 사람들은 이를 값싸게 재단하는 데 익숙해졌다. 책을 읽으며, 콘텐츠를 무작정 소비하는 것만큼이나 가차 없이 난도질하는 우리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이 책의 2부에는 10일마다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발행하는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뉴스레터의 특징과 구독자에 대한 분석, 큐레이션에 대한 의미 등을 세세히 다루고 있어, 앞으로 자기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은 이들은 유익한 조언을 접할 수 있다. 3부에서는 그동안 저자가 쓴 책과 영화, 드라마 리뷰를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나를 둘러싼 콘텐츠들을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삶이나 지식을 기록한 책은 부지런히 내 뇌를 자극하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세계를 이해하는 관문이 된다. 물걸레질과 설거지 시간의 동반자인 영화 팟캐스트, 산책이나 이동시 함께하는 음악, 손가락에 파스텔을 묻혀가며 그림을 그릴 때 켜놓는 유튜브 채널이나, 철지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바보처럼 웃는 시간까지도 내 일상을 무리 없이 굴러가게 하는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다.

 콘텐츠를 애호하는 사람들은 같은 대기열에 서서 이를 관람하며 꼭 필요한 한 줌의 구원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나북스 레터도 누군가에게 도달해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사람에게 보낸 메일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답신을 읽으며 안도했을 설희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여기서 메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연대의 출발점이 된다. 가장 사적인 이야기가 더 이상 사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로 널리널리 퍼져나간다._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다음과 같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 매일매일 열심히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뭔가를 본 건 같은데 뭘 본 건지 모르겠는 사람

- 유튜브 한번 해봐? 뉴스레터 시작해봐?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독자, 혹은 이미 시도했으나 자신만의 콘텐츠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정체중인 독자

- 콘텐츠라는 단어도 지겹고, 쏟아지는 콘텐츠를 따라가는 것도 물린 무기력한 분들(네, 저요?^^)

 

큐레이션이라는 단어가 가진 함정을 생각해볼 때가 있다.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확보된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네가 이걸 좋아할지도 모르지라고 말을 걸어봤자, 결과는 어디까지나 운의 소관이다. 실패할 확률이 절반보다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거듭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드러내는 일이 큐레이션이라기보다는 큰 소리로 자랑하는 독백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독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이런 걸 좋아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대화라니 어딘가 좀 일방적이지 않은가!_본문에서

 

내가 해왔던 일의 덩어리를 해체해서 질서를 부여해야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는 데 있다. 콘텐츠도 비슷하다. 틈나는 대로 온갖 것에 노출되고, 마음 가는 대로 보다보니,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맥락 없는 덩어리만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늘 뭔가를 본 것 같긴 한데 뭘 봤는지는 모르는 상태가 돼버린다._본문에서

 

내 것을 만들어 밀고 나가는 사람은 어느 지점부터는 본인이 전혀 몰랐던 사람, 익숙한 세계의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닿아야 한다._본문에서

 

(by 밤의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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