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윤지영 팀장 1주기 특집호 2023년 8월 16일, 발전대안 피다의 전문위원이자 옛 ODA Watch의 실무 책임자였던 윤지영 님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함께하는 모두에게 따뜻했던 그의 1주기를 맞아 활동가 윤지영을 기억하는 네 편의 글을 피움 독자 여러분들께 부칩니다. 국제개발협력 정책 활동가로서, 그리고 인권평화 활동가로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삶을 추념하며,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가치를 다시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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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① 여는 글: '발전'과 '연대'로 기억하는 윤지영 (8월 16일) ② 행동하는 힘을 퍼뜨리는 시민활동가 윤지영 (8월 20일) ③ 사람과 연대하는 정책활동가 윤지영 (8월 27일) ④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장활동가 윤지영 (9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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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맑고 화창했던 2013년 4월의 오후, 따사로운 봄바람이 서교동 사무실 안으로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ODA Watch 사무국 실무자였던 이슬과 나는 차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창가 쪽을 서성이며 날씨가 왜 이렇게 좋냐며 소심한 봄 타령을 하던 중이었다.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지영은 벌떡 일어나더니 "간사님들, 우리 야외 학습 가자!"라고 말하며 PC를 끄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학습'은 듣지 못한 채 '야외'라는 단어에 환호하며 앞장선 지영을 졸졸 따랐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꽃으로 가득한 대한문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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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잔디광장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대한문 앞으로 향하여 조금 당황한 우리들. 그러나 우리를 더 혼랍스럽게 한 것은 2012년부터 대한문 앞에 마련되었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분향소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었다. 온데간데 없어진 분향소 자리엔 꽃이 가득한 화단과 그 주변을 가득 채운 300여 명의 경찰들로 어지러웠다. 강제 철거된 자리를 지키려는 해고 노동자의 처절한 1인 시위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고,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시민들의 피켓 하나, 구호 한마디도 허용치 않는 현장에 실제로 서 보니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 폭력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당시 2년 차 활동가였던 나는 시민단체 활동가지만 활동 분야가 ‘국제개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국내 이슈에는 다소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화는 나지만 무엇을 해야 몰라 안절부절 못하던 와중에 지영이 말했다. "이분들(쌍용차 해고노동자)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해서 함께 오자고 했어.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경계가 어딨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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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오늘만 왔다 금새 가버릴까봐 간사님들 꼬셔서 야외학습 하자고 대한문에 왔습니다. 누군가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는데 꽃으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짓밟는 현장이 여기 서울 한복판이었네요. 꽃을 심는 이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입니다. 이들은 꽃을 심는 귀머거리 장님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도 노동자입니다. 심어진 꽃에 생채기가 난 이들도 노동자입니다. 꽃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수도 있네요. 급히 조잡하게 심겨진 오색 꽃들이 봄볕에 처연한 미소를 짓네요.
- 2013년 4월 17일 윤지영의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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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사무국의 여러 일을 제쳐 놓고 간사들을 대한문으로 이끈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활동가라면 사무실에서만 고민하지 말고 거리에 나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일들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듣고, 함께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진실로 알려 주고자 했다. 더 나아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이들에게 활동가로서, 시민으로서 공적인 삶과 책임이 있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지구촌 너머의 불평등과 부정의는 국내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을 내고 시간을 내어 국내와 국제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쏟아냈다. 밀양에서, 강정에서 그리고 세월호와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 댐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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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활동가가 가져야 할 비전과 철학을 끊임없이 고민해 온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본인이 세운 비전과 일, 삶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활동가였다. 그래서인지 지영은 질문이 많았다.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고난 탐구적인 성향도 있겠으나 질문을 통해 대화를 이끌어 내고, 대화 속에서 서로의 경험과 고민, 성찰을 나누곤 했다. 지영이 건넨 질문 대부분은 이미 자신과의 문답 시간을 거쳐 왔던 내용이라 대화의 깊이가 남달랐다. 긴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지영과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그 깊이를 느꼈으리라.
질문이 많은 사람은 생각도, 고민도 깊다. 베트남 현장 경험에 이어 ODA Watch 실무자로 애드보커시 활동을 하면서 국제개발협력 사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있던 차에 2011년 코빌(COVIL)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코빌은 Community Organizing과 Village의 합성어로 '지역과 함께, 주민과 함께 하는 주민운동'이라는 의미의 공부 모임이다. 현장 활동을 경험한 다양한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 15인이 모여 개발협력 현장의 어려움을 나누다 보니 한국 개발 NGO의 한계와 문제점에 관해 토론하게 되었고, 개발협력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주민'을 놓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에 주민운동을 통해 '주민'을 새롭게 바라보고, '주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개발협력 분야 활동가들이 해결사 역할이 아닌 곁에서 그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다양한 교육 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코빌 교육 과정에서 지영은 개인 그리고 조직의 '비전'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개발협력 활동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개입하는 이의 비전에 따라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국제개발협력 분야라는 업에 종사하며 스스로가 품이 넓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 일을 선택한 이유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괜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선택일 뿐이라고 담백하게 말하기도 했다. 가난과 결핍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던 것이다.
그래서 국내든 국외든 스스로가 서 있는 곳을 모두 현장이라 생각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연대의 힘을 더욱 보태었다. '품 넓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겠다.' 하는 개인의 비전을 향해가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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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것은 사업의 성과와 효과성 증대를 위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닌,
활동가가 가져야 할 비전과 삶의 철학이라고."
- COVIL 1기 개별 과제 글 중에서 윤지영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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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영이 코빌 활동을 한다는 것도 알았고, 국내의 다양한 부정의 이슈에 개인적인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한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왜 그녀가 연대의 힘을 다양한 현장에서 보태고 있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제주를 향하던 지영의 행동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강정마을 해군 기지 개발을 기억하는가? 2007년 6월, 정부는 강정마을을 해군 기지 건설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선정한다.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오랜 이웃이었던 마을 주민들은 찬성과 반대의 편으로 갈라졌으며, 환경과 생태 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국익'을 명분으로 개발을 강행하게 된다. 마을 공동체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와해되고, 주민과 활동가 모두 수 년간 쇠사슬로 몸을 묶어 내어 투쟁했음에도 2012년 3월, 정부는 강정마을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며 2016년 해군 기지를 완공하고야 만다.
자연 생태계 변화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선정된 부지, 국익을 우선하며 주민이 소외된 정부 주도의 계획 등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어 너무나 익숙한 개발의 문제점이 강정마을에서도 ‘놀랍지 않게’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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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정부의 이런 개발 방식이 고스란히 국제개발협력 사업에도 연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파트너 국가(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다는 '대외 원조'라는 명분 아래, 속으로는 주민과 환경을 소외하고, 국익 추구를 위한 개발 전략만을 구상하는 일방적인 방식을 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약하지만 국제개발협력 분야 단체도, 활동가들도 강정마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연대의 힘을 보태었다. 당시 ODA Watch 뉴스레터(OWL)에서도 강정마을 투쟁에 대한 내외부 필진의 글을 실으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개발 방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개발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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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더불어 사는 삶,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삶, 지구촌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에 힘을 보태겠다는 그럴듯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막상 내 주변의 아파하는 이웃과 생명들을 살피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내 일과 무관하다고 하여 나도 모르게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중략)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활동가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이유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는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라며 방관하던 모습들이 스르륵 지나쳐간다,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OWL 90호. 발전을 다시 생각하다: 한국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활동가의 참회록 (윤지영, 201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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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난 세월호 참사. 많은 이들이 아파했던 잔인한 4월이었으나 지영은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부끄러워했다. 2014년 6월에 직접 쓴 ' 한국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활동가의 참회록'의 일부분만 봐도 지영 스스로 수없는 자책을 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당시 통렬한 반성의 글을 읽고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영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내 개인의 성찰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매주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집회에 함께 참여했고, 어느 날부터는 지영의 제안으로 1시간쯤 일찍 출근해 당시 사무국이 위치한 당산역 앞에서 노란 리본을 나누고 진실 규명을 위한 시민 서명 운동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응원과 고마움의 인사를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침부터 재수 없다"는 소리를 둘이서 기꺼이 듣기도 했다. 평소의 우리라면 말다툼을 할 법도 한데 그 당시엔 불쾌한 항의를 들어도 굳이 싸우지 않았고, 묵묵히 노란색 마음을 나누고 서명을 받는 데 집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시간들이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한 참회의 시간이었던 것도 같다.
한편 지영은 한국 사회 내 개발협력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재정립하는 고민을 이어갔다. 그녀가 만난 아시아, 아프리카 주민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서 배울 점을 다시 찾고, 가난하지만 그들이 소중히 지켜내고 있는 상호호혜의 가치, 공동체의 연대, 끈끈한 정을 다시금 배우고자 했다. 우리 활동가들이 주민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주민 당사자가 변화의 주체임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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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지영에겐 개인적인 변화가 많았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휴직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깊음 슬픔 속에서 또, '아내' 그리고 '엄마' 윤지영으로 살아가면서 짧은 몇 년간 가치관과 삶의 태도, 일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었다. 휴직 기간 속에서도 지영과의 교류는 있었지만, 그 고민을 깊게 나눌 시간을 만들지 못한 것이 나한테는 큰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그 시간을 나눈 피스모모(PEACE MOMO) 문아영 대표를 통해 지영의 당시 고민과 생각, 피스모모로 합류하게 된 과정 등을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영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게 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 배경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했다. 그 시간 속에서 '평화' 그리고 '교육'이라는 키워드가 지영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듯했다. ODA Watch의 활동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국제개발협력 정책 활동을 넘어 더 큰 의미의 '평화'를 깊게 고민하고, 활동으로 이어갈 수 있는 터전을 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제개발협력 분야 안에서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기에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에 움츠러들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보다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면서 다양한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이뤄 낼 수 있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고자 했다. 이에 발전대안 피다(구 ODA Watch) 퇴사를 선택했고, 평화 교육 단체 피스모모로 일터를 옮기게 되었다.
지영이 전개한 '평화' 활동의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초반에는 피스모모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활동 내내 전쟁 문제를 포함해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비판적인 평화 관점을 세우고자 다양한 토론과 연구를 진행했고, 청소년 인권 문제와 평화 교육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 갔다. 그렇게 세상을 덜 폭력적이고, 덜 불평등한 곳으로 만들고자 애써 온 평화 활동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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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리 사회가 내장한 구조적 폭력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선 어깨가 움츠러드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모모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만나 힘이 나요. 침묵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힘. 작지만 당당히 맞서 외치는 힘. 나의 존재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힘 말이에요."
피스모모 5주년 보고서 '지영'의 인사말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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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픔에 공감하고 행동하는 내일의 활동가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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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의 바람 중 하나는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을 '신명 나게' 하면서 자신의 산물(지혜, 경험, 지식, 감정 등)을 동료, 후배와 마음껏 나누는 선배가 되는 것이었다. 지영이 꿈꾸는 활동가 간의 연대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영이 우리 곁에 있었다면 지식이나 경험 나눔과 함께 후배들이 세상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행동하는 활동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했을 듯하다.
이런 지영을 선배로 또, 잠시나마 신명 나게 함께 활동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 마음을 담아 지영이 가슴 속 깊이 열망했던 글을 찾아 읽어보길 권한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이다. 이 글은 그녀가 '참 잘 살았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배 활동가로서 말해 주고 싶다.
"그대 참 잘 살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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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재원
발전대안 피다 전문위원
서핑독(Surfing Dog)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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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이재원은 윤지영의 동료이자 후배 활동가이다. 발전대안 피다의 전신인 ODA Watch의 청년활동가로 국제개발협력 분야 활동을 시작한 이재원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발전대안 피다(구 ODA Watch)의 실무자였으며, 윤지영이 퇴직 전(2016년)까지 사무국에서 가장 오래 함께 일한 동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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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님이 생전에 활동했던 단체인 발전대안 피다, 피스모모, 해외주민운동연대(KOCO)가 협력하여 라오스와 캄보디아, 미얀마의 개발, 인권, 평화활동가들을 1년에 두 명 선정하여 2년간 매달 50만 원을 지원하는 인권평화활동가 윤지영펠로우십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윤지영 님이 꿈꿨던 사람의 존엄을 귀히 여기는 사회, 생명의 무게를 중히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시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모금 주관단체: 사단법인 피스모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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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대안 피다 pida1025@pida.or.kr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로 115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S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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