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제 수많은 채무자가 동시에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걸까요? 가장 비근한 사례는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위기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은행들이 프라임(prime; 우량) 신용등급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대출이 포화에 이르자 당시의 주택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근거로 서브프라임(sub-prime; 비우량) 신용등급을 가진 사람들(통상 은행 대출에서 제외되었음)에게까지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기 시작했죠. 대출 브로커들이 나서서 이민자와 불완전 취업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속삭입니다. “정원과 풀장이 딸린 멋진 주택에 살아볼 좋은 기회가 있어요.
주택가격의 100%까지 대출해주니 당신은 한 푼도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원리금은 몇 년 후부터 내면 되요. 이 좋은 새 집에 살면서 더 좋은 일자리를 찾으면 돼요. 설사 당신의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주택 가격이 상승하고 있으니 정 안 되면 원리금을 내기 시작하는 시점에 집을 팔아 갚으면 되요. 오히려 차액만큼 이득을 볼 수도 있지요. 그런데도 뭘 망설여요? 저기 당신의 집이 기다리고 있어요. 당장 사인하세요.” 여러분이라면 이토록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실제로 주택가격이 끊임없이 상승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 확실해 보였거든요. 수백만 명이 이 계약을 체결했죠.
이 스토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미 잘 알고들 있으리라 믿고 너무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격은 하락으로 반전했고, 서브프라임 채무자들 중 거의 대다수가 원리금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요. 주택들은 차압되었고 경매시장에 나온 주택들은 똥값이 되어 채권자인 은행이 덩달아 위기에 빠졌죠. 게다가 은행들은 이들의 채무증권을 증권화 기법으로 파생금융상품으로 바꾸어 이미 전 세계에 팔았죠. 은행위기는 금융위기로, 금융위기는 신용경색(credit crunch; 은행이 신규대출을 자제하고 기존대출마저 회수하며 은행 간 초단기대출도 꺼리는 상황으로서 건전한 흑자 기업마저 운영자금 조달이 어려워 도산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매개로 경제 불황으로 이어졌죠.
이런 일이 미국에 한정되지 않고 거의 전 세계로 파급되어 글로벌 금융 경제 위기를 유발했죠.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이미 2000조 원을 상회해 GDP를 넘어섰다는 국제기관(IFF, 국제금융협회)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상 세계 1위라면서요. 지금처럼 금리가 계속 상승하면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주담보 채무자들이 디폴트(상환불능)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어쨌든 상당수의 채무자가 동시에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잘 하면 모두가 원금 상환용 돈은 구할 수 있겠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아무도 이자 낼 돈은 구할 수 없죠. 특정 시점에 시중 통화량은 채무 원금 총액과 같기 때문이죠. 만약 누군가 이자낼 돈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 성공은 다른 누군가가 원금을 갚을 돈을 구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자 낼 돈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능하거나 나태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구조적인 모순이자 미스터리가 아닌가요?
이자만큼 추가로 누군가 돈을 더 빌려야 한다
여러분은 아무리 그래도 이자 낼 돈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돈의 부족’이라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으실 겁니다. 실제로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은행 빚을 못 갚거나 이자를 못 내는 사람은 그의 능력이나 불운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뱅크런이나 다수 채무자의 동시 상환불능 사태는 거의 예외적으로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죠. 그래선지 또 쉽게 망각해버리죠. 그렇다면 이자 미스터리와 같은 구조적인 모순을 내재한 채무통화 시스템이 평상시에는 어떻게 붕괴하지 않고 제대로 돌아가는 걸까요? 여러분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나요? 정답이 되려면 이자 낼 돈이 경제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먼저 얼핏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은행은 새 돈을 창조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은행이 돈을 만들어 직원 임금이나 물품 조달 등 운영비조로 지출한다면, 이 돈은 차입한 돈이 아니므로 그만큼 시중 유통량이 늘어나 채무자들이 시중에서 이자낼 돈을 구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이건 착각입니다. 은행이 지출하는 운영비는 은행이 고객에게서 벌어들인 이자수익에서 나온 것이지 새로 창조한 돈에서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은행은 돈의 창조권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 특권은 오로지 비 은행 주체든 아니면 은행 자신이든 누군가의 대출 요청이 있어야만 행사됩니다. 은행은 누구에게든 대출을 해야만 새 돈을 창조할 수 있고, 이 경우에만 시중의 통화량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이 자신의 비용을 자기에게 대출하거나 다른 은행에서 대출받아 마련은 하지만, 이로 생긴 빚을 장부에 기재만 해두고 실제로는 상환하지 않는다고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시중에는 그만큼 상환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 존재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이자 낼 돈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은행들은 서로 돈을 빌리고 빌려주고 합니다. 더욱이 거의 매일 그렇게 하죠. 그러나 은행 자신에 대한 대출이건 은행 간 대출이건 대출인 한 갚아야 하는 돈이므로 이론적으로도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돌려막기’라는 아이디어입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은행 채무자들의 원금 상환 만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채무의 대부분은 만기가 중장기죠. 예를 들어 주택담보대출이 가계대출의 절반 이상이라는 사실이나 국채가 대부분 중장기 만기를 가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죠? 따라서 만기가 먼저 돌아오는 채무자는 아직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채무자가 유통시킨 돈에서 얼마든지 이자 낼 돈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죠.
이자의 존재는 경제성장을 강제한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숙고해볼 사항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특정한 만기 시점에 통화량은 미상환 채무원금의 합계와 같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죠. 그리고 일정 기간의 신규 차입액과 상환액이 동일하다면 통화량은 증가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상환용 원금총액만 존재하지 이자 불입용 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미상환 원금으로 이자를 돌려막을 수 있으려면 신규 차입액이 실현된 상환액보다 많아 통화량이 늘어나야만 하죠. 결국 이 조건이 성립해야만 ‘돌려막기’가 가능해지며, 이 조건은 경제가 성장할 때만 충족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로부터 이자의 존재는 경제성장을 강제한다는 파생 결론이 나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통화량 변동율과 경제성장률 간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용통화인 현대 통화는 오로지 그 쓸모가 교환을 매개하는 지불수단이거나 가치를 축장하는 수단입니다. 논지를 간소화하기 위해 가치축장 수단은 무시하기로 합시다. 지불수단으로서 돈은 오로지 상품 구입 대가로만 사용됩니다. 여기서 또 자산시장은 존재하지 않거나 거래 규모가 불변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새 돈은 생산물 시장 즉 실물경제에만 주입된다고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생산물 시장에서 통화량은 국내총생산(GDP = 연간 추가로 생산된 최종생산물의 시장가치)와 대응합니다.
논지를 간소화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정이 필요한데요. 그것은 통화유통속도가 1이라는 가정입니다. 이는 단위통화(예컨대 1원)가 연간 1회의 거래만 성립시킨다고 보는 겁니다. 이제 예를 들어 100조 원의 돈이 100조 원의 가치를 가진 GDP와 대응한다고 가정하면, 소비자들이 100조 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100조 원 어치의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습니다.
이제 경제가 연간 5% 성장했다고 합시다. 즉 새로운 생산물의 총가치가 105조 원이 된 거죠. 이때 통화량이 100조 원 그대로라면 돈의 가치가 상승해야만, 즉 물가가 하락해야만 100조 원의 돈으로 105조 원의 가치를 가진 생산물을 모두 사줄 수 있죠? 이러한 현상을 디플레이션이라 부릅니다. 만약 디플레이션을 피하고 싶다면 통화량도 성장률만큼 늘어나 105조 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건 누군가가 은행에서 빚을 더 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이젠 알고 계시죠?
거꾸로 이젠 어떤 이유로 통화량이 5조 원 더 늘어난 105조 원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통화량이 생산물의 가치 총액보다 5조 원 더 많아졌으므로 여전히 100조 원의 가치를 가진 생산물을 다 사주려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해야 하죠. 이 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릅니다. 인플레이션도 싫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생산량을 5조 원 어치 늘리면 됩니다. 즉 5%의 성장을 하면 되죠. 사실 5조 원의 추가 돈이 있으니 이 돈이 생산부문으로 투입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이 경우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죠.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이자의 존재가 왜 성장을 강제하는 걸까요? 앞서 이자 불입용 돈은 추가 차입을 통해 늘어난 통화량에서 구할 수 있다 즉 일종의 돌려막기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자만큼 통화량이 늘어나야 하므로 인플레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이자의 존재로 인해 늘어난 통화량만큼 경제가 성장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자의 존재로 인해 통화량이 늘고 경제는 이른바 ‘강제된 성장’을 할 수밖에 없다면 성장이 먼저인지 통화량 증가가 먼저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의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물음이나 진배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장률이 높아지면 통화량도 그만큼 더 늘어나야 하며, 역으로 통화량이 먼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물가 안정 즉 통화가치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래서 중앙은행은 성장률에 조응하는 통화 증가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경기 침체 시에는 금리를 낮추고 국채를 사들임으로써 통화량을 늘려 경기회복을 유도하고, 경기 과열이 보이면 금리를 올리고 국채를 판매함으로써 통화량을 줄여 경기를 진정시키려고 합니다. 중앙은행의 이런 행태를 감안하면 성장이 먼저냐 통화량 증가가 먼저냐 하는 물음이 쓸데없는 물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호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호에는 부채 없는 돈, 비 채무통화 즉 ‘자유통화’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폐 민주주의 연대가 주장하는 주권화폐의 한 속성이 바로 ‘자유통화’입니다.
1) 여기서 시중에 유통하는 돈의 총량을 ‘통화량’으로 지칭하고, 그것을 측정하는 통화지표로는 M1(현금과 지급준비금으로 이루어지는 본원통화와 은행의 요구불예금의 합계) 또는 M2(M1에 정기성 예금을 더한 것)로 봅니다.
사진 출처 : dotoma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