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편지를 보내고 종이 달력을 한 장 넘겼습니다. 네, 십일월이에요. 그에 맞갖게 세상은 한결 서느렇네요. 그럴수록 단풍은 짙고요.

단풍은 나무의 잎이 더이상 활동하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잎에는 엽록소와 함께 안토시아닌과 크산토필 같은 색소들도 있는데, 엽록소의 합성이 중지되면 다른 색소들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지요. 알고 보면 나무도 제 나름의 달력을 넘기는 것인가봅니다. 멈추어 사라지는 존재와 그 공백을 물들이는 새로운 존재를 몸소 겪으면서요.

십일월은 첫눈이 있는 달.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매해 십일월이면 미미하게 흩날리는 것으로나마 흰 것이 찾아왔거든요. 며칠에 올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일로 어김없이 이달이 채워지겠습니다.

저는 ‘색이 죽으면 흰색이 된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는데요. 이별의 끝에 흰색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쉼없이 줄줄 흐르는 상실의 마음을 애면글면 굴리면 눈사람이 되고, 그 짠 마음이 그나마 굳어지면 두부가 되지 않을까요?

이별한 후에는 두부를 먹을까, 궁금해하는 이 연인은(혹은 인연은) 아직 이별을 모릅니다. ‘신비로움’과 ‘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비극적인 신비로움과 더는 만질 수 없어 내내 아프게 신비로울 것이 이별임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랑하면 두부 속에 있는 느낌”이라고 말할 때의 그 두부는 부드럽되 연인을 보호할 만큼─적어도 그들의 생각 속에서─단단하고 무결한 집이 되지요. 두부라는 집. 두부라는 예배당.

하지만 모두 알잖아요. 두부는 쉬이 허물어진다는 것. 으깨어지는 눈처럼, 으깨어지는 사랑처럼, 으깨어지는 종소리처럼.

두부 속에 있던 사람 중 하나는 이제 두부를 먹는 사람으로 빠져나옵니다. 두부를 먹을 때마다 속이 “소복소복 무너집니다”. 다 희어집니다. 죽습니다. 이별을 모르던 사람은 죽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눈이 내렸는지 아닌지 모르도록 사랑만 했는데, 이별하고 나니 눈이 그친 풍경만 남아 있네요. 두부 속에 있던 또다른 사람 하나는 눈사람, 눈이 가득한 사람, 만질 수 없는 흰 것이 되었고요.

두부는 죄를 지은 이가 출소 후 처음 먹는 음식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두부는 죄를 씻는 두부, 두부는 그럼에도 다시 시작하는 두부입니다. 세상 모든 이별은 죄의식을 품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니 이별 후에는 두부를 먹기 알맞지 않은가요.

볶은 김치와, 아니면 된장 조금 풀어서......

아, 배가 너무너무 고파지네요.

일단 밥을 먹읍시다. 먹고 다시 돌아와요.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셔도 좋겠어요. 당신이라면, 이별한 후에 뭘 먹을 건가요?

한정원 드림

문학동네시인선 221 『백장미의 창백』

신미나 시인이 3년 만에 펴내는 시집. “현실과 현실 너머를 엄하게 거두어 더 깊은 곳으로 길을 내길 바”란다는 구상문학상 심사평에 부응하듯,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태어난 언어를 그러모아 인생이라는 신앙을 살뜰히 빚어냅니다. 실패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 시의 역할에 낙심하면서도 낭떠러지에 발을 내디디는 심정으로 다음 문장을 써내려갔는데요. 죽음은 서두르지 않네/ 삶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지/ 꼼짝없이 그림자와 일치하는 것/ 빛이 아니라면 누가 그림자를 벨 수 있겠어? 삶에 대해 치열하게 묻고 답해온 흔적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나보아요.
Q. 삶과 죽음에 대한 시편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삶과 죽음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시의 화자는 그러한 두 세계를 잇는 매개자가 되기도 합니다이러한 삶과 죽음의 순리에 대해 평소에 품고 계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샤먼과 문학, 사람들 사이에 인생의 답이 있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저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죽음은 완벽한 단독자가 되는 일이니까요. 연결되었던 세계의 끈이 툭 끊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엉성하더라도 그 매듭을 잇는 일을 시로써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일이 조금이나마 망자들을 덜 외롭게 하고, 무릎이 꺾인 채 살아가는 이들을 부축하는 일이라면요.

  • 매주 일상 속 환기를 위해 만들어낸 활동들이 환기도 즐거움도 에너지도 주지만, 역시 나는 홀로 사색의 시간이 무조건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11월에는 사색의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생각은 눈발보다 더 많이 흩날려요, 라는 말이 "넌 뭐 그렇게 생각이 많니"라는 주변인들의 힐난 아닌 힐난을 받는 저를 위로하네요. 저는 자연적인 인간입니다. 생각을 마구 풀어놓고 살지요. 김민하 배우의 편지와 덧붙인 시에서 조금 용기를 얻었어요.
  • 생각 때문에 괴로운 날들이 많았는데 생각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 생각이 많은 내가 좋아지네요. 내가 싫어질 때마다 다시 이 편지를 읽어야겠습니다.
  • 생각이라는 것은 많을 땐 괴롭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앞서나가게 해주는 것임을. 오늘은 한결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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