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현녕입니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아침 저녁으로 이제는 두꺼운 외투가 없으면 나가기가 어려운 걸 보니 겨울이 코 앞에 있는듯 합니다. 맨발에 쪼리를 편하게 신기도 어렵습니다. 예쁜 양말을 오며가며 하나씩 사는 재미가 있는 계절입니다. 

부디 이번 한 주의 시작에 힘 나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편애합니다 독자님!

부직포 초록 코트 - 2

아직 영글지 않은 열매를 보면 그 때깔이 곱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무엇이 되려고, 얼마나 커지려고 매일 밤 몸을 부풀리나 싶어 오래 눈이 간다. 그래서 그 자체로 어여쁘다. 향기가 없어도, 잎을 크게 걸치지 않아도 그대로 아름답다. 거기서 무언가를 더 하는 것은 오히려 어색함에 원래 색을 잃는다.

하교 시간이면 길거리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원래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복 사이즈 그대로 갖춰 입은 아이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예쁘다. 영글지 않은 열매 같아서 반짝 빛이 난다. 그 옆을 지나가는 한 아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도 모를 아이라인을 그리고 ‘나는 눈썹이다~!~!’ 하는 눈썹을 그리고는 입술은 과한 틴트로 입술선이 턱 아래로 넘실댄다. 교복 역시 ‘여자 어른’의 흉내를 톡톡히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면 아직 익지 않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버린 것을 본 기분이다. 그대로도 예쁘다는 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나 알 수 있다. 지금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절대 지금의 우리를 모른다.

나 역시 몰랐으니 부직포 초록 코트를 입고 크리스마스 나무 마냥 놀이공원을 갔을 것이다. 친구의 뾰족 구두를 빌려 신고 말이다. 벙벙한 코트에 어쭙잖은 치마를 입고 뾰족 구두라니, 지금의 내가 귀신이 되어 과거로 간다면 그 순간만큼은 현관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싶다. 구두를 신고 놀이공원이 가당키나 한가? 자유이용권을 끊고 입장하는 순간 두 발은 자유롭지 않았고 구두 안에서 까진 피부와 피의 환장콜라보레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설렘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다. 할 수만 있다면 구두를 당장 벗어버리고 맨발로 바이킹을 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집에 오는 길에 결국 문방구에 들려 삼선 슬리퍼를 샀다. 부끄러움을 잊은 건 롤러코스터를 탈 때부터였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이 무거운 부직포부터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때 우리집은 3층 빌라였는데, 가끔 주차장에 1층 집 30대 아저씨가 나와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낭창하게 인사를 하면 곧잘 귀엽게 받아주곤 했는데, 그날은 꽤 힘들어보였는지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곧 크리스마스라고 초록색 나무 옷을 샀어?”

“아,,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고는 부끄러움에 얼른 다음 계단으로 몸을 숨겨 집까지 단숨에 뛰었다. 곧 찢어질 것 같은 종이가방에는 친구의 뾰족구두가 뒤축이 뻘겋게 피가 묻은 채 들려 있었다. 초록 모직 코트와 구두의 빨간 피는 어쩌면 아저씨 말처럼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있었나보다. 그 후로 초록 코트는 옷장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입기가 부끄럽고 입으면 몸과 마음이 고될 거라는 걸 미리 알았다.

그러나 버리질 못 한다. 십오 년간 수 없는 이사와 옷 정리 속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았다. 그러고 보니 초록 코트는 단 한 번 입은 새 옷이구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살포시 꺼내 나무인 척 장식품을 매달고 조명으로 꾸며 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