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뉴스레터

독자님은 언제 마지막으로 극장을 가보셨나요? 애매한 지점을 톡 건드린 뉴스를 좋아하는 저의 이번 주 마지막 큐레이션은 극장에 관한 기사입니다.

11월 말 서울에서 내한공연을 하는 영국의 한 록스타가 갑자기 공연 일정을 하루 더 추가했어요. 그런데, 추가 공연을 여는 장소가 좀 낯설더라고요. 영등포의 '명화 라이브홀'. 알고 보니 1982년 문을 연 '명화극장'이 최근 공연장으로 바뀐 거였어요.

명화극장은 1057석 규모 영화관이었습니다. CGV 같은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면서 명화극장 같은 '단관(상영관이 하나뿐인)극장'은 2000년을 전후해 급격히 사라졌어요. 명화극장은 2002년 '명화나이트'로 바뀌었다가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영화관에서 무도회장으로, 다시 공연장으로…. 그 운명이 참 얄궂은데, 요즘 멀티플렉스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해요. 넷플릭스 같은 OTT 흥행으로 영화관 인기가 시들해지자 멀티플렉스 역시 마치 공연장처럼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한부분이었던 '극장 문화'와 이제 작별할 때가 된 걸까요? 오늘은 저 멀리 카자흐스탄의 한 극장에 관한 기사를 골랐습니다. 2분 정도 걸리는 짤막한 기사 읽고, 강원도 원주시의 한 극장 이야기도 함께 나눠봐요.

☑️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의 고려극장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에 자리한 고려인 공연예술 단체이자 극장이다.

☑️ 고려극장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왔다.

☑️ 카자흐스탄 정부가 인구도 많지 않은 고려인에게 국립극장을 내준 건 고려인 공동체의 위상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에 있는, 91년 역사의 고려인 공연예술 공동체다. '극장'이라는 이름을 보고 장소로 극장만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예술단체라는 의미를 보태야 완전체가 된다. 카자흐스탄에 뿌리내리고 사는 '고려인을 대표하는 공연예술 단체이자 극장', 이게 고려극장의 본모습이다.

지난 19일 오후 알마티 보겐바이 바트라 158번지에 있는 고려극장을 방문했다. 극장은 디귿자(ㄷ)형의 2층짜리 옅은 노란색 건물로, 바로크 양식의 균형미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사뭇 포근한 느낌이어서 고즈넉한 어느 공원 속 저택에 온 것 같았다. 알마티 시내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 대개 이런 모습인데, 고려극장 건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 로디온 고려극장 부원장 말로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카자흐스탄의 기념건축물'이라고 한다.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극장 1층과 2층 내부는 한창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다. 2층 극장 로비는 물론 로비와 연결된 극장 안의 객석과 무대, 음향 및 조명실도 모두 철거된 상태였다. 전 부원장의 말이다. "한국의 외교부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아 극장 전체를 개·보수하고 있다. 객석 의자도 새로 깔고 무대도 손보고, 음향과 조명 시설도 최신식으로 교체하는 중이다. 리노베이션을 마치면 12월 초 재개관 기념식을 열 예정이다."

고려극장의 정식 명칭은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이다. 여기 '국립'과 '아카데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자흐스탄에는 특정 민족 공동체에 부여한 다섯 개의 국립극장이 있다. 고려극장도 그중 하나인데, 인구로 치면 열세인 고려인에게 국립극장을 안긴 건 고려인 커뮤니티의 위상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증거다. 고려인 외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위구르, 독일인이 국립 타이틀 극장을 갖고 있다.

또한 아카데미는 교육을 실행할 능력을 갖춘 최고 수준 극장이라는 의미다.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고려극장을 '국립 아카데미 극장'으로 승격한 뒤, 이듬해엔 현재 건물을 전용극장으로 내줬다. 이로써 고려극장은 단체와 극장이 한 몸을 이룬, 명실상부한 조직 형태를 갖췄다. 고려극장은 연극과 무용, 사물놀이 단원 49명 등 총 100명으로 구성됐다.

이 영광스러운 여정의 중심인물이 이 류보비 아우구스토브나 예술감독(71)이다. 초·중·고 교사 출신인 이 예술감독은 1997년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추천으로 고려극장 첫 여성 극장장으로 취임해 25년 일했다. 얼마 전 세대교체를 위해 한참 후배인 옐레나 김에게 극장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예술감독을 맡았다.

"맘 편히 공연할 공간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예술가들의 노력과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고려인 공동체가 합심하여 이룬 쾌거여서 한없이 자랑스럽다."

고려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 구락부 소인예술단'을 모태로 출발했다. 공연단체로 걸음마를 뗄 무렵인 1937년, 고려극장은 스탈린의 정책에 따른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과정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 둥지를 틀었다. 지금의 알마티에 정착하기까지 우슈토베와 크질오르다 등 이 지역 저 지역을 전전하는 '유랑단체' 신세였다.

그 신고의 세월을 견뎌내면서 91년 동안 극장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위대한 고려인의 승리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100년이 넘는 한국의 근현대공연사에서 이 정도 연륜을 축적한 예술단체가 과연 있던가!

이 예술감독의 다음 목표는 카자흐스탄 고려인을 대표할 '정신적 영웅'을 고려극장 이름 앞에 새기는 일이다.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오페라 발레극장'이 카자흐스탄의 국민 시인이자 철학자인 아바이 쿠난바이울리(1845∼1904)를 기려 '아바이 오페라극장'으로 부르는 것처럼.

이 예술감독의 말이다. "고려인 사회에서 합의한 인물은 있는데, 때가 적절치 않아 안타깝다." 📝

고려극장은 일제강점기 전후 한반도를 떠난 조선인들의 역사를 추적하는 기사에서 종종 소개됐어요.

과거 소련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에도 고려극장은 함께 했고,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냈어요. 고려극장은 한 소수민족의 역사와 인물을 증언하는 공간입니다. 또, 고려극장에선 종종 '아리랑' 등을 한국말로 공연했어요. 이 극장을 "고려인 공동체의 구심점"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고려극장에 건물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가 지속해서 지원하는 배경이기도 하고요.

고려극장은 '극장'의 의미를 정말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아닐까요. 어느 극장이든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사회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상영하는 서사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풍경을 반영하기 마련이었고, 그 이야기를 보고 듣는 이의 감정은 주변 다른 사람의 숨결과 몸짓을 느끼며 더욱 고조되기도 했고요.

물론, 극장 안에는 꼭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또한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죠. 요즘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OTT 시청에 익숙해져, 잘 모르는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똑같은 뭔가를 보는 경험은 점점 더 낯선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강원도 원주시가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끝내 철거했습니다. 1963년 개관한 아카데미극장은 원주극장, 시공관, 문화극장, 군인극장이 줄줄이 사라진 후 원주 구도심에 마지막 남은 단관극장이었어요.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학교 졸업식이나 지역 잔치를 열던 극장은 원주 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한 공동체 시설이기도 했습니다.

원주시는 보존을 바란 원주 시민들에 호응해 2022년 아카데미극장을 사들였지만, 이듬해 야외공연장과 주차장을 만들겠다며 철거로 방향을 틀었고 결국 관철했어요.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8월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지지하며 기고한 칼럼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기억이야말로 문화의 핵심"이라고 썼습니다.

그 기억의 매개체였던 아카데미극장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아카데미극장 재개관을 기다리며 새로운 문화 활동을 기획했던 시민들의 열정은 갈 곳을 잃었어요. 카자흐스탄 정부가 고려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믿어 극장을 제공한 것처럼, 원주시도 이 시민 공동체의 가능성을 지켜볼 수는 없었을까요.

아카데미극장이 품었던 이야기가 고려극장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주 구도심의 역사와 함께 한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아카데미극장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시민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냅니다.

📬 "김포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으로서, 서울로 편입되고 싶은 마음보다 서울에 있는 내 일자리가 집 근처로 옮겨왔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단순히 이름만 '서울시 김포구'가 된다고 해서 김포골드라인의 사람 수가 줄어들길 하나요, 출퇴근 시간이 2시간에서 30분으로 줄어들길 하나요?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과정을 보니, 이 이야기가 균형발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히 표만 보고 튀어나온 것이라는 게 명백해집니다."

📝 "한 독자님께서 지난 점선면Lite <🎉 다함께 신나는 메가시티로>편에 익명으로 남겨주신 이야기예요. 독자님의 매일 출퇴근길이 항상 안전하길 바라며, 뉴스레터 점선면이 출근길의 피로와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는 콘텐츠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모든 분야에서 재택근무가 얼른 일반화되면 좋겠어요!)"

점선면팀이 제1회 독자와의 만남을 개최합니다. '뉴스 어떻게 읽을까-나만의 점선면 그리기'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준비했어요. '강연'보단 '대화'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점선면은 독자님들과 함께 만드는 뉴스레터니까요.

경향신문이 뒤늦게 시사 뉴스레터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뉴스를 사실-맥락-관점으로 분석하는 '점선면' 형식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그저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출발한 점선면의 기획·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려드립니다. 뉴스가 많아도 너무 많은 세상, 기사를 어떻게 고르고 읽고 소화하면 좋을지 점선면팀 기자들과 함께 이야기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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