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회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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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이유 없이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 메일을 과연 몇 명이나 무심코 차단할지 궁금합니다. 히히히.)

  

안녕하세요. 왕정민입니다.

 

모두 상식적인 매일을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박정민이 아닌 왕정민으로 인사드립니다. 이 또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번주에 제가 시집 하나를 붙들고 싸웠는데요.

 

‘먼 훗날 후손들이 이 시집을 발견해서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사용할 텐데 이걸 어쩌지.’

 

읽는 내내 이 우려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나는 빼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주로 평범하고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장했습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옆 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거기 휴지 있어요?”

그 사람의

오줌 줄기도 안 끊겼고

내 오줌도……

적어도 내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않았나?

고요한 화장실에서

두 줄기의 오줌 소리가 울려퍼진다

“휴지는 없는데 너구리는 있어요.”

“그럼 그 너구리,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위쪽으로 건네드릴게요. 안고 계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마워요.”

“네.”

“저기요.”

“왜요?”

“이걸로는 부족한 거 같아요.”

“만족을 모르시네요.”

“너구리는 환풍기 구멍으로 도망가버렸어요.”

“잘됐네요. 그 너구리는……”

“뭐요.”

“화장실의 신이니까요.”

“그래요?”

“네.”

“어떤 능력이 있는데요?”

“화장실의 휴지를 모조리 훔쳐서 들판에 버려요.”

“왜 그런 짓을 하죠?”

“그는 햇빛과 공간을 먹는 자니까. 우리는 그에게 잘 보여야 해요.”



_문보영, 「화장실의 신」(『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문보영 시인님의 시집과 싸우다보니 어느새 정이 들어 시스라이팅 당해버리는 지경에 이릅니다(시톡홀롬 증후군일지도). 내가 정말 평범하고 논리적인 생각만 하는 인간인가. 자기를 왕정민으로 소개하는 박정민이 과연 상식적인 인간인가. 계속해서 자문하다보니, 아무 이유 없이 로또 번호를 알려주려다 갑자기 자기가 왕정민이라고 하는 인간보다, 오줌 누다 옆 칸에 너구리를 던져주는 인간이 단연 유익해 보입니다. 아직 해석을 해내지는 못했으나 ‘햇빛과 공간을 먹는 너구리’에는 어떤 메타포가 담겨 있어 음미와 사유의 여지를 제공하지만, ‘똥 묻은 돼지’는 거의 ‘왕정민’급 무의미를 의미합니다.

 

제겐 ‘아직도’ 이토록 시가 많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집의 뒤에 늘상 있기 마련인 해설의 글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젠장, 세상에 이게 웬걸, 해설도 문보영입니다. 심지어

역자 후기

문보영(번역가)

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예상치 못한 타격에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시를 쓴 문보영과 (심지어 외국어 시도 아니면서) 번역을 한 문보영 앞에서, 그 위대하고 높은 벽 앞에서 난 절대 이 시집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 무릎을 꿇어버렸습니다. 해설엔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기절해 쓰러지지 않은 저 자신을 아직도 대견하게 여기는 중입니다.

역자(문보영)- 이 대목에서 “모든 시는 자작극이다”라는,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이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해설(문보영)- *역자의 장난으로 추정된다.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은 “들어가지 않은 방의 비결정성”이다, 옮긴이.

나(왕정민)- ㅅㅂ,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은 “아직 잠들지 마 우리는 현실을 사냥해야 해”잖아.

 

내가 잘못했어. 문보영, 問보영, MooN보영! 문보YouNg 대체 당신 뭔데! 모래 서점이 뭔데! 화장실의 신이 뭔데! 내가 아는 형이 모든 것의 신인데 그런 거 모른대!

 

그렇게 한 명의 미개한 독자는 이 시집을 읽다 미쳐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성을 바꾸고 로또 번호 스팸 메일을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시를 여러분은 지금까지 읽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오직 한 권의 책과 이토록 씨름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매일이 비상식적인 일상 속에서 이 시집은 오히려 상식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상상의 흔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첫 주부터 이 시집을 소개해보고 싶었지만 요령이 없어 한편에 밀어두었는데, 계속 신경이 쓰이고 실제로 정이 들어버려 이렇게 아무 말로나마 전해드립니다. 시는 참 다양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슴에 와 박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갖고 놀기 요긴한 시도, 오래 두고 봐야 하는 시도 있는 법인 것 같아요. 이 시집은 그 다양한 시들의 연속인 것 같고요. ‘역자 후기 문보영(번역가)’은 아직도 좀 성질나지만, 그 또한 독자적 구성에 일조합니다. 시집이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럼 전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일주일간의 긴 싸움을 마치고 이제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왕정민의 일발 장전 개소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박정민 드림  

추신

모든 것의 신도 몰루ㅋ.jpg

문학동네시인선 197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왕정민' 배우를 미치게 한 시집은 바로 문보영 시인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입니다.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한국 시의 특별한 고유명이 된 문보영 시인의 세번째 시집인데요! 깨에 두 손을 얹는다 그러면 등과 무릎을 굽히게 되고 엉덩이는 뒤로 빠지며 나의 키는 약간 줄어드는 것인데/ 이로써 사람 뒤에 숨은 사람의 자세가 된다/ 하나의 낯선 공 위에서 홀로 균형을 잡는 방법이다 쓸쓸하고 막막한 세계를 적적하지 않게, 개운하고 가뿐하게 꿰차고 나가는 걸음법을 배우는 시간. 아직 문보영 작가의 시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지금 함께 미쳐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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