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소사

- 밤의서점 써머박스를 보고 친구가 ‘한여름 꾸러미’라는 상큼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더운 여름,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는 것조차 귀찮은 분들은 점장들이 고른 블라인드북을 즐겨보시길. 단, 블라인드북 특성상 이미 읽은 책일 수도 있으므로, 이 경우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포장키트를 같이 넣어드렸다. 여기에 어디든 휘뚜루마뚜루 들고 다니기 좋은 밤의서점 에코백도 들어 있다. 나북스 독자님들, 많관부.

 

- 주일학교 우리반 아이들에게 밤의서점 이야기를 했더니 한 아이가 이모와 함께 방문했다. 원래 조용히 집중하는 스타일의 친구라 혼자서 서가들을 돌며 한 권 한 권 뜯어보더라. 중2임을 감안해 나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같은 무난한 성장소설을 추천해주었는데, 아이는 나의 추천을 거부하고(^^) <기억되지 않는 여자 애디 라뤼>와 <그레이스>를 골랐다. 중세와 여자라는 키워드가 좋다고 한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아이를 내가 너무 아이 취급한 것 같다.(밤의점장)

 

간만에 행사를 하느라 서점을 행사 모드로 바꾸면서 서점 공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기억이 났다. 동굴 컨셉에 맞춰 동선을 의도적으로 길게 만드는 것과 개방적인 행사 공간을 확보하는 두 가지 모순된 과제가 있었는데 설계를 맡은 실장님이 그것을 멋지게 해결한 이동형 책장을 만들어와서 감탄했었다. 곧 서점 6주년을 맞이한다. 서점 초기의 설렘은 희미해졌지만 아직도 이 공간을 내가  사랑하는 건 분명하다.  


나북스 신청폼이나 피드백으로 서점에 애정 담긴 말씀을 보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1.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이 들어가는 얘기 써 주시는 분들,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2. 밤의서점 영원히문 닫으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신 분 때문에, 아니 덕분에 영원히 운영을 어떻게 해볼까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 밤의점장이 써머박스를 홍보한다고 해 놓고 쓴 것을 보니 소극적으로 썼네요. 관심과 더불어 구매도 적극 권장합니다. 구매좌표도 보내드립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nightbookstore/products/5740378802
(폭풍의점장)
  
점장이 읽고 있어요

밤의점장

레이첼 조이스, <뮤직숍>(밝은세상)

: 가끔 손님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읽을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밤의서점 서가를 돌며 혼자 난감해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여름철 휴가지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찾다가 이 소설을 만났다. 엘피판만 고집하는 프랭크의 음반가게에는 빅토리아 양식 옷장을 개조한 청음실이 있다. 주인 프랭크는 턴테이블 뒤에 앉아 손님들이 듣고 싶은 음반을 틀어준다. 음악에 박식한 그는 손님들에게 필요한 ‘딱 그 음악’을 추천해준다. 프랭크가 손님에게 맞는 음반을 추천하기 전에 고심하는 장면은 점장인 내가 책을 추천할 때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프랭크 앞에서 기절한 의문의 독일 여자와 다시 조우하는 장면에서는 소소한 로맨스의 기운이 피어난다. 평범한 손님들의 사연을 담은 유쾌한 소설을 원하는 분들이라면 한번 펼쳐보시길. 

궈징,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원더박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우한에 이사 온 지 한 달 만에 우한 봉쇄가 시작되자, 서른 살 저자는 살아남기 위해 sns에 이 일기를 올렸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부정적 기분을 해소할 만한 방법이 많지만 봉쇄 중에는 그러기 힘들다. 저자는 개개인이 느끼는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밤마다 화상통화로 토론을 하고, 전염병 사태 속에서 ‘가정폭력 미니 백신’ 캠페인을 벌이거나, 병원에서 일하는 미화원분들을 위한 지원을 꾸준히 시도한다. 매일의 일기에는 봉쇄 기간 동안 먹은 음식(고기야채볶음과 죽), 매일 산책과 운동을 한 기록, 친구들과의 토론 주제나 힘을 얻은 사건 등이 적혀 있다. 한국은 이미 코로나의 공포가 지나간 느낌이지만, 나는 시스템이 사라진 정부에서 새로운 공포를 느끼고 있던 터라 이 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sns에 올라온 글이라서 이 일기에 대한 사람들의 댓글이 같이 달려 있는데 이 부분도 흥미롭게 읽었다.

2월 27일의 일기
모든 게 어제와 판박이.
내일도 이럴 거다.
어떤 사람은 이미 죽었고
어떤 사람은 희생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목소리를 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가짜 뉴스를 팩트 체크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투기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큰길을 쓸고
어떤 사람은 큰길에서 자고
어떤 사람은 공동구매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택배를 배송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은 산책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 누워 있고
어떤 사람은 이미 직장으로 복귀했고
어떤 사람은 가정폭력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일 년 내내 집안일을 한다._본문에서

폭풍의점장

말콤 글래드웰,<어떤 선택의 재검토>(김영사)


: 말콤 글래드웰의 이야기 방식에는 배울 점이 있다. 특히 도입에서 궁금함을 자극하는데 발군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궁금함을 끝까지 유지하며 완독하게 만든다. 다 읽고 좀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이 책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공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원제가 <The Bomber Mafia>2차 세계 대전을 끝내겠다는 목표를 가졌으나 다른 방법을 쓴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결과는 우리도 알다시피 하룻밤에 10만 명을 죽인 도쿄 대공습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끝냈다.) 부제처럼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전쟁 논픽션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가 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도의 혼란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이런 의도의 혼란을 항상 잊고 넘어가기 때문에 꿈이 어떻게 빗나간 길을 가게 되는지, 그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만약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씁쓸한 여운이 있으며 함께 읽고 얘기할 문제를 던져주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리디아 유크나비치,<가장자리>(든)


: 이 책을 금주의 나이츠픽으로 쓸까 고심하다가 포기했다. 하지만 취향에 맞는다면이란 단서를 붙여서 강력 추천한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흉가>,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카먼 마리아 마차도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이 작가들과 책들이 좋았다면 높은 확률로 좋아할 것이다. (약한 맛에서 매운 맛 순이다.) 거기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까지 좋아한다면 안 좋아할 수 없는 책이라고 본다. 전작인 <숨을 참던 나날들>도 비범한 책이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20편의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맨 마지막 짧은 감사의 말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 그리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는 이해한다.


 작가는 경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짜로 이해하는 것 같다. 머리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자신만의 언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따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언어이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쓰는가를 생각해 보니, 그냥 종이 달라야 한다. 이 작가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사람이다. (참고로 이 작가는 19금이다)

 


양파라 불러도 괜찮습니다

책에 관한 기분들_3



 “하느님, 그 사람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볼까요?”

 이 생각이 미쓰코를 지루한 수업에서 구해 주었다._엔도 슈사쿠, <깊은 강>


 도피성 행동이었다. 친구를 따라(지금의 폭풍점장) 어느 수녀님이 돌보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 건. 내가 맡은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조용한 열 살 된 여자아이였다. 어린 시절의 나와 닮은 아이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다. 문제는 3 살배기 H였다. 3살이면 부모의 집중적인 애정이 필요한 시기다. 이 아이는 내가 갈 때마다 안아달라고 했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봉사자 모두에게 그랬으리라.) 나는 어릴 때부터 떼를 쓰거나 요구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으므로 아이의 그런 행동을 받아주는 게 힘들었다. 그저 도피하기 위해 봉사를 하던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하니, 아이가 내게 안기려고 달려올 때면 속으로 기겁을 했다. 그곳을 방문하는 일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물론 대학원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수녀님께 공부를 핑계로 이제 더는 봉사를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 그곳에서 나의 사랑 없음을 발견하고 말았다.

 

 저녁 안개가 마을을 감싸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헛된 것처럼 느꼈다. 이 인도 여행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대학 생활도, 짧았던 결혼 생활도, 위선적인 자원 봉사 흉내 짓도. 처음 방문한 이 마을에서 오쓰를 찾아 돌아다닌 것도.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 깊숙이 그녀는 자신도 X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막연히 느꼈다. 자신을 채워 줄 게 틀림없는 X. 그러나 그녀는 그 X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_본문에서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소설 <깊은 강>은 대표작 <침묵>과 더불어, 고인이 된 작가가 자기 관에 함께 넣어달라고 했던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인도 바라나시에 도착한 네 사람이 나온다. 아내를 병으로 잃고 환생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소베, 죽음의 고비에서 구관조에게 위로를 받은 누마다, 태평양 전쟁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고 귀환한 이구치, 위선적인 세상을 조롱하듯 가톨릭 신자인 오쓰를 유혹했던 미쓰코. 그중에서도 생에 대한 실망을 거듭하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던 미쓰코가 오쓰와 나누던 대화들을 잊을 수 없다. 바보처럼 신을 찾아다니는 남자 오쓰에게 그녀는 쏘아붙인다.

 

 “근데 그 신이라는 말 좀 그만 할래요. 짜증이 나고 실감도 안 나요.(...)”

 “미안합니다. 그 단어가 싫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토마토이건 양파건  다 좋습니다.” _본문에서

 

 “양파는 한 장소에서 버림받은 나를 어느 틈엔가 다른 장소에서 되살려 주었습니다”라는 오쓰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다. 나는 틈만 나면 양파를 떠났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내 안에는 사랑이 없었다. 세상에 초연한 듯 굴면서도 나는 실은 누구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나는 양파를 모질게 떠났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서 모든 것이 멈춰버렸을 때,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주중엔 회사,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던 그때, 그런데 양파는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도 양파는 좋은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점점 양파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패혈증으로 위독해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양파에게 성을 냈다. 어머니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는 대신, 마구 성을 냈다. 나는, 나는 행복하면 안 됩니까?

 

 하지만 양파에겐 내가 모르는 계획이 많았다. 연고도 없는 서울 연희동에서 밤의서점을 열게 된 것도, 나와 달리 강인한 기질의 폭풍점장이 파트너가 된 것도 그의 계획이다.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교회에 데려간다. 서점 한 켠에는 양파에 관한 서가가 있다. 얼마 전, 그 책들 앞에서 어떤 손님들이 코웃음을 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점장이라는 것도 잊고 가서 뭐라고 할 뻔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말이 아니다. 양파와 함께한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내 욕망을 지필만한 일을 찾는 걸 멈추지 못한다. 개를 기를 수 있는 큰 집에 살고 싶다는 내게, 양파는 자꾸 먼저 사랑을 배우라고 말한다. 그는 고양이의 얼굴을 할 때도 있고, 배움에 대한 갈망을 품은 손님의 얼굴로 찾아올 때도 있다.

 그러니, 신이라는 단어가 싫다면 양파라 불러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곁에 언제나 양파가 계시듯이, 양파는 나루세 씨 안에, 나루세 씨 곁에 있습니다. 나루세 씨의 괴로움도 고독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양파뿐입니다. 그분은 언젠가 당신을 또 하나의 세계로 데려가시겠지요. 그것이 언제일지, 어떤 방법일지, 어떤 형태로일지,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양파는 무엇이건 활용합니다. 당신의 사랑 놀음 흉내입에 담지 못할 밤의 행동도(저는 통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만.) 마술사처럼 변용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수녀의 눈에 놀라움이 번지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밖에……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저희들은.“

그것밖에라고 한 건지, 그 사람밖에라고 말한 건지, 미쓰코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람이라고 말한 거라면 그건 바로 오쓰의 양파. _본문에서

(밤의점장)



  

나이츠픽: 벵하민 라바투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문학이 진리에 표하는 멋진 경의


 

 미친 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오늘의 나이츠픽인<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미치는 것에도 종류는 다양한데,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세상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광인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몰입한다. 그 몰입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설집이다. (이것을 에피파니라고 부른다.) 아니, 세상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라니 순서가 바뀐 것 같다. 몰입하다 보니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 벗기게 되었다고 해야 옳겠다


 이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책 뒤 날개의 설명을 가져와 본다

 

이 책은 과학의 세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프리츠 하버,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 그로텐디크, 모지스키 신이치 같은 20세기의 화학자,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정신적 세계를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혼합해 그려낸, 강렬하기 그지없는 작품이다.(중략) 인간의 지식을 향한 욕망과 인식의 극단에서 경험하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다섯 편의 환상적인 단편에서 그려내는데, 각 작품은 개별적이기도 하고 서로 연관되기도 하면서 숨막히는 전개를 이어간다.”


 위에 거론된 사람들 중 몇 명을 들어봤는가? 나는 2.5명쯤 알고 있었다. 2명도 아니고 2.5명이냐면,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는 들어봤고 슈바르츠실트는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아, 이 사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뼛속 깊이 문과라도 안심해도 된다. 이들이 규명하고자 했던 내용은 몰라도 책을 읽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안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기분을 아는 것이 분명한 물리학자 김상욱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자신의 물리 영웅들이 바로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착각에 빠졌다고, 신박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까라고 감탄했다.


 이 소설집은 과학사를 다루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과학사를 이해하든 아니든 흥미진진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이야기이며 표제작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아찔하게 재미있다. 그들이 풀기 위해 씨름하던 문제들을 해결하던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읽다 보면 아니 도대체 이런 뻥을 치다니 하면서도 너무 생생해서 빠져든다. 특히 하이젠베르크가 골몰하여 산책하던 중 펍에서 괴이한 남자를 만나 약을 받아 마시고 도망가는 길에 환각을 보는 부분이 정말 재미있었다. 발췌를 해 볼까 했는데, 이 부분은 발췌한다고 느낌을 이해시킬 수 없으므로 직접 읽으며 확인하시기 바란다. 이 괴이한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받아 마신 초록 액체는?


  지성사의 심오한 내용을 다룬 책이지만 이 소설집의 가장 큰 미덕은 웃기다는 점이다. 나는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도 재미있었을 것을 확신한다. 가끔 어떤 책은 쓰는 작가도 지루해서 어떻게 썼을까 싶은 게 있는데 이 책은 작가가 신나 펄펄 날며 쓴 느낌이 전해온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무협지 같은 기운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작가는 맨 첫 이야기 <프러시안 블루>는 한 문장 말고는 다 사실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처음에 역사적 사실을 정교하게 배치해 독자의 신뢰를 얻은 다음 갈수록 허구를 섞어 의심 없이 푹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도대체 슈뢰딩거와 헤어비히 양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란 말이냐라고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만든다. 한 마디로 혼이 담긴 구라*를 치는 것이다.  


 작가의 유머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괴팍한 천재 제자를 만나 고통 당하던, 역시 천재였던 닐스 보어와의 일화 부분을 가져와 본다.

 

방에 틀어박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왔다갔다 하며 생각에 몰두하지 않을 때는 동틀녘까지 보어와 논쟁했다. 둘의 논쟁은 몇 달째 이어졌으며 점차 격렬해졌다.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에게 소리지르다 목소리를 잃자 보어는 성마른 제자로부터 휴식기를 얻기 위해 겨울 휴가를 앞당겼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 못지않은 고집쟁이였으며 하이젠베르크의 성격은 보어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도발할 보어가 없어지자 하이젠베르크는 내면의 악마를 홀로 상대해야 했으며 금세 스스로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는 두 사람으로 나뉘어 한 번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가 다음번엔 보어의 입장을 옹호하는 장광설을 폈다.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마치 인격이 분열된 사람처럼 스승의 용납할 수 없는 현학을 금세 고스란히 흉내냈다. 그는 자신의 직관을 배신하여 수와 행렬의 표를 제쳐놓고는 전자를 파동의 다발로 상상했다. 핵 주위를 도는 전자에 적용될 경우 슈뢰딩거 방정식이 실제로 기술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하생략)”

 

 믿고 보는 조이스 캐롤 오츠가견딜 수 없을 만큼 아이러니하고 스산한 이 작품은 대단한 걸작이다라고 격찬한 소설, 허투루 추천하는 법이 없는 버락 오바마의 추천 소설이자 이 소설과 연관어로 언급되는 제발트까지 너무나 완벽하지 않은가감탄하다가, 그래서 슈뢰딩거랑 헤어비히 양은 어디까지가 진짜냐고!!! 못견디게 궁금하다. 참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의 유머 스타일까지 맘에 든다면 분명 만족스럽게 읽을 것이다. 


 책의 맨 앞장에는 “Infinity is growing and threatens to engulf us.”라는 문구와 함께 작가의 사인이 쓰여 있다. 작가는 무한의 핵심에 다다른 인간이 그 무한에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돌진하는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직조해 내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이들의 정신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경이로운 독서였다. 사실은 너무 좋아서 읽다가 조금 울었다. 

 인생은 짧고 진리의 세계는 길다. 이 소설집은 진리에 바치는 문학의 경의라고 생각한다. 멋지고 재미난 벵하민 라바투트, 주목할 만한 작가에 올려둔다.(폭풍의점장)

 

* 영화<타짜>에서 평경장의 대사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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