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매섭게 불었던 ‘페미니즘 사상검증’ 광풍이 죽지도 않고 올해 또 왔습니다. 이번엔 게임 업계에서 페미니스트를 색출하고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거셉니다. 지난달, 넥슨 ‘메이플스토리’의 몇몇 이용자가 “제작진 중에 남성을 혐오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라고 항의한 뒤 넥슨이 사과하면서 시작된 움직임입니다. 망상에 가까운 항의의 근거는 빈약했고, 거짓이었습니다. 올해 7월에는 발단부터 결말까지 똑같은 일이 프로젝트문이 제작한 ‘림버스컴퍼니’에서 벌어졌습니다.

사상검증 외에도 이 사건에는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할 문제가 산적합니다. 원청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하청, 게임 업계 안에서 대변되지 못하는 여성, 커뮤니티에서 실생활로 이어지고 있는 페미니스트 혐오, 그리고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 정치와 언론까지요. 폴라리스 뉴스레터 106호는 페미니즘 사상검증과 그에 얽힌 문제를 다룹니다.

“페미니스트는 학술적으로 성평등주의자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온라인을 통해 여성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고 공격을 선동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2023년 11월 6일 <경향신문>의 질의에 답하며

발단은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 캐릭터 ‘엔젤릭버스터’의 리마스터 홍보영상이었습니다. 25일, 남초 커뮤니티 사이에 해당 영상에서 엔젤릭버스터가 메갈리아의 상징 ‘집게손가락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있고, 이는 제작사 스튜디오 뿌리의 여성 애니메이터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라는 주장이 퍼졌습니다. 근거는 작년, 그녀가 개인 SNS에 ‘페미니즘을 계속하겠다’는 글을 남겼단 것이었죠.

넥슨은 이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26일 넥슨은 문제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이어 김창섭 총괄 디렉터가 직접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켰습니다. 김 디렉터는 스튜디오 뿌리와의 모든 협업 영상을 전수 조사할 것이며, 기업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넥슨은 메이플스토리를 포함한 자사 게임들에 집게손가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조사해 삭제· 변경했습니다. 스마일게이트, 슈퍼캣 등 다른 게임 제작사들과 삼성전자, 포스코 등 게임계 밖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지도, 옷 주름, 나무 등 조금이라도 비슷한 이미지가 있다면 모두 검열됐습니다.

한바탕 불어닥친 집게손가락 논란. 하지만 소란에 비해 그 근거는 비약합니다. 문제 영상에서 집게손가락 모양은 캐릭터가 말린 손을 펴면서 자연스럽게 취해지는 동작이고, 배속을 아주 낮춰야 인식 가능한 찰나의 움직임입니다. 지목당한 여성 애니메이터가 해당 장면을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집게손가락 모양이 포함된 최초 콘티는 넥슨에서 구한 다른 업체의 40대 남성 애니메이터가, 최종 작업은 뿌리의 50대 남성 애니메이터가 담당했습니다. 넥슨은 8차례 이상 작업물을 검수했고, 집게손가락 모양을 지적한 적 없습니다. 사실무근의 음모론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한 여성과 제작사가 공격받도록 고삐를 풀어준 겁니다.

넥슨이 음모론을 승인한 파장은 심각합니다. 피해 애니메이터를 포함해 많은 여성 제작자들의 작업물이 삭제됐고, 신상정보가 퍼져 온오프라인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사내에서도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말라며 규율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넥슨 게임 던전앤파이터는 여성 게임 유저들의 SNS까지 검열에 나섰습니다. 이에 많은 노동계, 여성단체들이 넥슨이 게임계의 고질적인 여성혐오를 또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어줬다며 규탄 성명을 내기도 했죠.

집게손가락 논란을 정말 정당한 주장으로 봐도 될까요. 당사자, 업계, 전문가들의 반박에도 이들은 여전히 본인들의 주장이 맞단 입장을 고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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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손에서 파생된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마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 내 남성혐오는 실존할까요? 반대로, 게임 내 공기처럼 퍼져 이젠 ‘당연시된’ 여성혐오는 어떨까요?

2021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 게임 이용자 과반수가 게임 속에서 성별에 기반을 둔 차별이나 혐오적인 표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과도하게 여성의 신체적 특성이 두드러진 캐릭터 디자인도 문제로 꼽혔고요. 즐거우려고 하는 게임인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물론 안전의 위협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게임 내 만연한 ‘여혐 요소들’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소비자들은 다분한데, 게임 업계의 대응은 미비합니다. 같은 설문 조사에서 여성 게이머 절반은 게임 업계의 성희롱에 대한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응답하기도 했고요. 게임 업계가 남성혐오 논란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입니다.

산업측은 게임 이용자가 남성이 대다수인 정황상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2022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남성 표본 3,042명 중 75.3%가, 여성 표본 2,958명 중 73.4%가 게임을 즐겨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별에 따른 지출 비용 및 비율에서도 여성이 적지 않은 돈을 썼습니다. 여성 또한 남성 유저들 못지 않게 적극적인 소비자라는 의미죠. 문제는, 여성 게이머들이 소비자로서 목소리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게임문화는 여전히 남성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책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는 그 이유를 여성배제적, 남성 중심인 인력구조에서 찾습니다. 저자는 게임을 기획·개발하고 유통하고 비평하거나 보도하고 관련 교육을 하는 사람도 대부분 남성이며, 이러한 인력구조가 생산물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합니다. 앞서 언급한 게임 속 여성 재현 문제도 게임 기획과 제작 과정에서 남성적 시선이 투영된 결과이고요. 노동 환경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청년유니온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게임업계 내 사이버불링과 직장 내 성차별로 피해사례를 제보한 사람 중 88.7%가 여성이었습니다. 전체 응답자 중 83.9%가 게임업계 내 사상검증 문제가 심각하다고 답했고요.

사용자를 향한 혐오, 차별, 언어폭력 등 게임 외적 요소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소비자, 노동자뿐만이 아닙니다. 투자자들 또한 게임 운영과 경영이 포용적이길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안전한 게임 환경 조성’ 노력은 자본의 흐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게임 업계는 집게손가락 논란에서 벗어나, 시장의 요구에 응답할 '진짜’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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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넥슨 사태는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하청노동자라는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41조 2항에는 ‘회사가 고객 등 제자의 폭언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넥슨은 ‘집게손가락’ 음모론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원청으로서 하청업체 뿌리를 압박하며 사과를 종용했죠. 근거 없는 ‘페미니즘 혐오’와 넥슨의 방조 속에서, 뿌리의 직원은 신상털기와 온라인 스토킹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검열’이 게임업계 내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게임업계의 노동환경과 관련이 깊습니다. 게임업계는 원청이 수십 개의 계열사나 하청업체에 업무를 외주·위탁하는 수직적 지배구조로 작동합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등 아트 직군은 직고용 대신 프리랜서에게 외주를 맡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임 개발 및 공급 과정에서 다소 ‘불안정한 형태’의 일자리를 많이 활용한다는 거죠.

불안정 고용 속에서 원청은 하청 또는 프리랜서의 생살여탈권을 지닙니다. 실제로 매출의 80% 가량을 넥슨으로부터 창출하는 뿌리는 넥슨의 사과 요청에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프리랜서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지위를 얻지 못하니 노동권 침해에도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청업체, 프리랜서 등 주변화·외주화의 심화 속에 있는 게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게임업계는 여성 노동자의 상용직 비중이 낮고, 프리랜서가 많은 아트 직군에 여성 종사자 비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여성 캐릭터의 노출이 적고, 이는 림버스 컴퍼니에 페미가 있기 때문이다”는 주장으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해고됐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남성 유저들이 여성혐오적인 요구를 할 때, 불안정한 지위의 여성 노동자들은 ‘던져줘 버리기 쉬운’ 소모품처럼 취급됩니다.

정부 당국은 게임업계 내 여성 노동권 침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해법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2020년 인권위는 “게임업계 내 여성혐오 및 차별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고, 결과에 따라 해당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는데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태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콘진원 또한 게임업계에 대한 실질적 감독 등은 전혀 진행하지 않았고요. 정부는 넥슨 논란이 커진 후에야 뒤늦게 게임업계 특별감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게임업계 여성 노동자들을 사이버불링하고 게임 회사와 정부가 방조하는 관행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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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있습니다. 사건의 여파가 게임 업계에서만 그치지 않고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은 다른 ‘백래시’ 사건과 비슷하게 전개됐습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출발한, 근거가 빈약한 페미니즘 공격이 힘을 얻어 기업을 공격하고, 언론은 조명하고, 기업은 사과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뿌리인, 2021년 GS25 백래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겨레>에서 낸 기사가 이 흐름을 잘 설명해 줍니다. 위 기사에서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근거가 없는데도 거세게 몰아붙여 기업이 사과하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승리감을 줄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요컨대 ‘이게 되네?’인 거죠.

커뮤니티에서 제약 없이 번지는 여성혐오 발화는 현실의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난달, 경남 진주에서 20대 남성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을 폭행해 구속됐습니다. 그는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짧은 머리 여성은 페미니스트고,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한다”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같은 이유로 2021년, 도쿄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가 사이버불링을 당했었습니다.

‘디시인사이드’, ‘에펨코리아’ 등 ‘남초’ 커뮤니티는 소수자 혐오와 무분별한 PC(정치적 올바름) 비난을 해 온 역사가 깊고, 지금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은 어느 때보다도 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넥슨 게임 ‘마비노기’가 시각장애인 음성지원서비스를 지원한 것을 두고도 트집을 잡았습니다.

공격이 심각함에도 언론, 정부, 정치는 제지하기는커녕 방조하고 힘을 보탰습니다. 언론은 방조했습니다. 2021년 여러 백래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은 왜곡된 여성혐오 논리를 바로잡고 사건을 일축하기보단 ‘논란’으로 부르며 그대로 받아썼다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게임 업계와 정부는 무관심했습니다. 하청 프리랜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도, 공격을 여성혐오로 규정하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위에서 해 드렸죠.

게임 업계와 자주 연결됐던 몇 정치인의 발언은 공격에 힘을 보태줬습니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사건을 ‘하청이 원청의 의지에 반해 원청에 피해가 갈 만한 행동을 한 일’로 정의했습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도 방송에서 공격 세력의 주장에 동의하는 뜻으로 해석되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번 레터를 마감하는 기사는 진주 폭행 사건의 피해 여성이 <한겨레>와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그는 “설령 페미니스트라고 하더라도 왜 공격을 당해야 하느냐”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평등을 주장했다고 몰매를 맞지 않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용기를 내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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