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여보, 송이랑 장 줄리앙 전시에 다녀오는 건 어때? 다들 그 전시 좋다고 하던데 며칠 뒤면 끝난대.”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하며 내게 말했다. 장 줄리앙의 그림책은 우리 집에도 몇 권 있는데, 송이가 즐겨보는 책 중 하나다. 하지만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이가 전시를 차분히 볼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지난해 앤서니 브라운 전시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전시장 곳곳을 누비다가 어느 순간 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쓰는 송이를 달래느라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실수를 반복하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흠… 일단 혼자 다녀와서 판단할게.”

그렇게 평일 오전, 장 줄리앙 전시에 홀로 다녀왔다. 장 줄리앙은 1983년 프랑스 낭트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다. 마흔에 접어든 작가의 첫 번째 회고전답게 아카이브가 풍성했다. 특히 일기장처럼 글과 그림으로 빼곡한 스케치북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그가 일본의 노리타케처럼 미니멀한 컨셉의 아티스트인 줄 알았다. 편견이었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며 성실히 그림을 그리던 습관과 노력이 켜켜이 쌓인 다음에야 단순한 선 하나가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위트를 섞어서.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창작을 위해 중요시 여기는 습관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뇌도 근육이라서 매일 훈련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치 운동하듯 단련하고 제가 보는 것과 경험하는 걸 시각적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가족과 자연, 일상과 현대 문명에서 끊임없이 영감 받고 창작하는 그의 태도를 본받고 싶어졌다.

장 줄리앙 전시 풍경 (사진 제공: 손현)

아내 말처럼 전시는 역시 좋았다. 볼거리,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은은한 감동도 있었다. 한편 ‘혼자 오길 잘했다’란 생각과 ‘송이도 이걸 보면 좋았을 텐데’란 생각이 상충했다. 이 전시는 연령별 입장 제한이 없고, 48개월 미만 유아는 무료였다. 작품을 보러 온 다른 아이들도 보였다. 다만 송이보다 키가 큰 언니, 오빠들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온 그룹이 보여, 교사에게 조심스레 아이들의 나이를 물어보니 “다섯 살”이란 답이 돌아왔다. 다섯 살 정도는 되어야 전시를 보는구나.

그날 오후, 오픈AI*가 공개한 ‘달리2(DALL·E2)’를 접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달리는 애니메이션 ‘월-E’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용자가 요청한 대로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달리2는 그 두 번째 버전으로 성능이 크게 향상됐다. 가령 “시베리아의 구름이 약간 낀 날씨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터사이클 여행자와 테니스 코트의 이미지를 수채화 느낌으로 그려줘”라고 입력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나오는 식이다. 사진을 업로드하고 변주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 미국의 인공지능(AI) 연구소. 영리를 추구하는 OpenAI LP와 그 모체 조직인 비영리 단체 OpenAI Inc.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픈AI는 지난 3월 14일(미 현지 시각 기준) GPT-4를 발표하기도 했다.

주문 내역 “an combined water color painting of motorcycle traveler, riding on endless motorway looks like tennis blue hard court in sunny weather with some clouds in siberia” (이미지 제공: 손현 × DALL·E)

이날 장 줄리앙이 그린 드로잉 하나를 달리2에 업로드한 다음, 비슷한 느낌으로 몇 개 만들어달라고 했다. 결과물이 나오는 데는 3초가 걸리지 않았다. 언뜻 보면, 장 줄리앙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가 마흔이 될 때까지 쌓은 경험과 패턴을 AI가 몇 초만에 모두 학습해 버린 걸까? 이제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사회에서 오리지널리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창작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AI보다 속도는 더디지만, 나름 열심히 언어와 이미지를 습득 중인 송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싱숭생숭한 며칠을 보냈다. 창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서류 더미를 하나 발견했고, 거기서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1990년 7월 파나마의 어느 유치원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의 파일들이었다. 내가 끄적인 낙서,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이 써준 편지들, 졸업증서 등의 빛바랜 종이들이 실로 묶여 있었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알록달록한 꿈을 꾸며 행복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그래, 이건 진짜야. 이게 나의 오리지널리티지.

누구나 자기 삶의 원본이 있다. (사진 제공: 손현)

결국 장 줄리앙 전시는 송이를 데리고 한 번 더 갔다. 송이는 컴컴한 입구가 싫다며 초반부터 떼를 쓰다가, 움직이는 문어 영상에 홀려 다행히 전시장으로 잘 들어왔다. 비록 전시를 제대로 관람한 것도 아니고 사진도 몇 장 찍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송이야, 아빠랑 장 줄리앙 전시 같이 봤잖아. 문어 그림 기억해?” 정도의 대화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다는 감정과 추억이다. 그 시간이 모여 송이 인생의 오리지널리티를 구성하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AI도 인간의 요청에 응하는 대신, 스스로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고민할 것 같다. 인간이 정체성 고민을 죽을 때까지 하듯 말이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56화 우리가 살던 그 집)를 읽고 유독 눈물이 났다는 구독자 분들이 많았어요. 보내주신 답장 일부를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월요일 아침 출근 책상에서 울컥했네요. 17평 거실도 없는 안양 구축 아파트, 그 또한 지나갔어요. 답이 없고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에 대한 막연한… 시기. 아파오는 몸에, 부인하던 산후 우울증과 잠을 자지 않는 아이의 독박육아,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 복귀 후 사측의 퇴직권고, 이해 못 하는 남편 등 참으로 나약했는데, 그 또한 지나갔네요. (제이팍)

💬 이번 회차 보면서 회사에서 저도 눈물이 났어요. (...) 아이는 아주 어렵고 무섭고 힘겨운 천국이라는 말이 맞는듯해요. 힘내세요! (시봉)

💬 아이를 낳고 키운 집, 그 집은 이사를 가더라도 기억 속에 오랫동안 아이들과의 추억과 남아요. 이번 편지를 읽으며 저도 이사 오기 전 옛집이 배경이 되어 아이들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습니다. (한국사람)

💬 눈물이 찔끔 났어요. 우리가 살았던 신혼집은 셀프페인팅을 할 정도로 애정이 담뿍 담긴 집이었거든요. 작가님 말씀처럼 그 집에서 아이와 저도 숱하게 울고 웃었죠.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 좌절과 희망이라는 다양한 감정들을 함께 했어요. 기쁜 날이 많았지만, 생애 처음 겪는 엄마라는 이름에 갇혀 가라앉던 날이 사실 더 많았음을 고백해요. 아들 셋 키우는 작가님의 아내 분에게 따뜻하고 진한 커피와 달콤한 마카롱을 함께 선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나)

💬 저와 엄마, 아빠가 수십 번 넘게 이사 다닌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아빠는 직업 군인이었기에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녔어요. 덕분에 제주 빼고 모든 지역에서 살아봤답니다. 이사 다니는 집마다 베란다는 곰팡이 투성이에, 화장실과 방문은 옥색, 맨질거리며 광택 나는 장판이 있었어요. 오래전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이었죠. 아빠는 몇 년 전에 전역하셨고, 군 생활을 더 하고 계신 이웃삼촌네 초대받아 방문을 하는 날이었어요. 주소가 저희가 한 때 살았던 그 군인아파트더군요. (현재는 독신자숙소로 사용하고 있대요.) 내비게이션에 그 주소를 찍고 운전하는 동안 가족끼리 그곳에서 좋았던 기억, 안 좋았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과거 여행하듯 그 아파트에 도착했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엘베없는5층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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