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퇴사하고 육아를 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지난 달 육아휴직이 끝난 희종은 정식으로 퇴사했다. 퇴직금도 받았고 직장인 국민연금은 해지돼 임의가입자가 됐다.
나무 13개월 차. 매일 아침 내가 나무를 돌보고, 희종은 하루의 가사 준비를 한다. 오전 9시, 둘은 출근하는 날 배웅한다.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서 나무를 먹이고 재우고 놀게 한다. 내가 퇴근하면 8시, 나무는 7시 30분 전에 잔다. 이 풍경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종종 생각한다.
'희종은 언제부터 전업 육아를 하려고 마음먹었을까?'
더듬어보면 결혼 초기, 아기 얘기가 나오면 '아기는 내가 키우면 좋겠는데..'라고 했던 것 같다. 그땐 그의 말꼬리에 힘이 없던 만큼, 나는 믿음이 있었다. '어차피 월급이 이긴다'라는 얄팍한 믿음.
'서울에서 맞벌이 안 하는 부부가 어딨어, 맞벌이 안 하고 주담대 이자를 어떻게 막아, 다들 그러니 어린이집 보내지'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적인 근거가 힘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니.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완벽한 타인인 게 확실한데, 이렇게 한심한 타인일 때도 많다.
내가 얼마나 앞뒤가 다른 인간인지 읊어볼까. 남편을 만나기 전, 난 항상 화가 나 있었다. 돈, 직업, 커리어 같은 걸로 자기와 타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한국 사회와 인간을 혐오하고, 사회를 뒤덮고 있는 학벌과 연봉 순위라는 나래비에 이를 박박 갈면서. 돈 좀 있(번)다고 으스대는 인간을 대놓고 싫어할 순 없고, 동조할 수도 없어 냉소나 보냈던 시절. 그러다 매 순간 생의 의미와 신념을 힘주어 말하는 그를 만났다.
그는 꼭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 친구 같았다. 올바르게, 아름답게, 나의 가치를 지키며 살고 싶던 마음을 인정하고, 인정받았다. 그걸 갈급해했던 마음마저 서로 이해했다. 서로에게 되어준 옹달샘. 그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셨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돈 같은 핑계를 대려 했다니. 삶의 여러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건 비겁하고 나약하다고 여겼던 내가, 그래서 저 남자를 사랑해 결혼하자고 했던 내가. 인간이 이렇게나 비연속적이다.
출산과 양육에 관해 더 자주 대화할 즈음 내 빈약한 논리는 빠른 속도로 힘을 잃어갔다.
희종 : 아기는 누가 키우는 게 좋겠어요?
나 : 난 전업은 못해요. 답답해 죽을 지도.
희종 : 난 돌부터 어린이집 맡기는 건 싫어, 절대 싫어.
나 : 그럼 할머니?
희종 : 조부모는 절대 안 돼
나 : 그래, 그건 나도 싫어.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희종 : 내가 퇴사하고 보면 되지
나 : 수입은?
희종 : 시터 쓰는 것보다 쌀 걸.
나 : 하.. 자기 일은 연봉으로 가늠되는 게 아니잖아. 요즘 강연 의뢰도 많이 오고.
희종 : 난 이 커리어로 할 일 다 했어요. 전 세계 재난 분쟁 지역 다 갔고 모든 순간에 열심히 일했어.
혹시 철옹성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저 순간의 내가 느낀 건 철벽, 철옹성, 철창살, 중앙경찰청 철창살은 쇠창살..... 하여간 이랬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실언을 하기 마련.
"아니 그럼 자기 같은 사람이 집에서 놀겠다고?"
벼랑 끝에 몰려 내뱉은 단말마 같은 한 마디는 2시간의 설교로 이어졌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던 그의 논지를 다시 집어본다.
1) 다시 기회를 주겠다, 진심으로 육아가 집에서 노는 행위라 생각하는 것인가?
2) 본인이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육아라는 행위를 평가 절하한 것에 동의하는가?
3) 본인이 그러고도 어디 가서 올바른 척, 페미니스트인 척 한 것인지? 그게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1세대 운동권의 위선과 뭐가 다른지?
4)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 받고 K-가부장스러운 발언을 한 게 부끄럽지 않은지?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친애하는 친구 미연은 이렇게 말했다.
미연 : "선배, 완전 미숫가루네요? 제대로 빻으셨네요"
나 : "아니, 그땐 진짜 수입이 절반으로 깎이는 게 무서워서 그랬어"
미연 : "네, 다음 포장지"
한때는 올바른 인간이던 과거의 내가 심어둔 좋은 친구들. 그들이 자본주의 미숫가루 될 뻔한 나를 구원하고 있다. Yes, Thanks, everybody.
일터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난 그의 올바른 생각 외에도 유능함을 사랑했다. 의미의 손상을 최소화해 번역하던 외국어 실력, 사업에 대한 큰 틀부터 실무까지 이해하던 통찰력. 취재원으로서 그는 완벽한 ‘빠꼼이’(취재에 필요한 업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였다. 지금 그 능력을 썩히고, 아기를 보겠다고?
하지만 그는 정말 강경했다. 어쩌면 희종은 말꼬리를 흐렸던 그때부터 육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닐까. 그리고 천천히 그가 직업적으로 돌보던 수만명의 난민/재난 지역 아이를 향한 마음을 정리한 게 아닐까. 흔히 '커리어'라고 불리는 사회적 자아를 잠깐 내려 놓고, 이젠 한 아이를 온 정성으로 키워내겠다고.
"나는 다시 사회로 꼭 돌아갈 거예요. 나를 위해서만은 아니야. 우리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아빠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육아에 매진하는 5-6년은 내가 인간적으로 깊이 성숙해질 시간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한 달 월급을 운운하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할 순 없었다. 물론 임신 중기까지 그의 월급과 커리어가 포기가 안 돼 '우리, 육아휴직을 퐁당퐁당 쓰면 안 될까?' 같은 비루한 제안을 던지긴 했지만.
전의를 상실하고 무력해진 인간은 상황을 받아들이려 발버둥 친다. 이 상황의 장점을 찾으면서. 요즘 말로론 정신승리.
'아기가 얼마나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자라겠어, 돈이야 천천히 벌고 적게 쓰면 되지, 맞벌이하는 언니들이 어린이집 일찍 보내면 아기가 불쌍하다는 데 그렇진 않겠지..'
그리고 나무를 낳았을 때 즈음, 미국에 사는 내 친구 도인 임정기는 한국에 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무를 바라보며 한 줄 평을 남겼다.
"You're lucky."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돈 걱정과 끊어질 남편 커리어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것. 그건 나무가 가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안정적으로 자라는 시간이었다.
남편은 소아정신과 의사가 추천하는 36개월 가정보육을, 기어코 실천하고 있다. 두 돌이 되도 보낼 생각이 없단다. 우린 나무가 세 돌이 되면 산과 들을 뛰노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나무는 제법 오랫동안 지금처럼 신나고 즐거울 테지. 아기들이 부모들의 밥벌이에 애착의 시간을 양보하는 게 당연해진 세상에서, 나무는 아빠의 철옹성 같은 사랑 안에서 자랄 테니까.
옛 여성들이 희생하며 했던 그 위대한 일, 바로 육아를 제 손으로 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고마운지, 철없던 난 조금 늦게 알았다. 나무가 아픈 데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는 아기로 크는 걸 보고 나서야, 그제서.
그렇게 항상 당신은 나보다 앞서 보고, 먼저 발을 내딛는다.
<퇴사하고 육아를 한다는 그의 결심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