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고닉 작가의 책 출간 소식에 가슴이 도근도근하신 분들, 여기도 계시죠? 담당 편집자 편독자님의 진한 여운이 담긴 글과 절찬리 연재 중인 《적정 코미디 기술》 2화까지,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많은 독자께서 기다려주셨던 《가장 느린 정의》도 곧 출간되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로맨스가 아니라면 무엇을

: 실패를 끌어안고 나아간다는 것

📑 편독자

안녕하세요.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라는 책을 마감하고 후기 겸 (조금은) 사적인 책소개를 전하러 돌아온 편독자입니다. 이런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다니 부끄럽기도 한데,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저에게 참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어려움의 이유는 다양했고, 또 복잡했습니다. 유명한 저자의 유명하지 않은 책이라서(이 불균형함), 유명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이 걱정), 그런데 막상 폐부를 찌르듯 너무 강력해서(이 흡인력),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심정이 그로부터 50년쯤 뒤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간절하게 전해져서.

책에 깃든 로맨스의 기운 때문인지, 저 역시 원고를 마주하며 이런저런 감정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맨스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열정이 미친 듯 솟구쳐서 모든 것이 의미로 충만해지고, 만사를 가늠하는 각이 한없이 예리해지고, 관계에서는 팽팽한 에너지가 흘러다니고, 그러다 그 열정이 파국으로 치달으면 한순간에 삶이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그 모든 과정. 놀랍게도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는 이 로맨스로 ‘미국 공산주의’라는 세계를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제가 알던 그 사람이었던 걸까요? ‘공산주의’와 ‘로맨스’라니. 아니, 로맨스로서의 공산주의라니.

너희 부모님이 공산주의자라고?”

: 친숙함이 낯섦이 될 때

 

비비언 고닉은 한국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이런 소개조차 무색할 만큼, 국내 출판시장에 불어닥쳤던 고닉 열풍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대표작 《사나운 애착》을 비롯해 총 6권이 번역됐고, 이번 신간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까지 합하면 총 7권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관련한 배경은 고닉에 대한 그 어떤 수식어에서도 등장한 바가 없고, 마찬가지로 이 책이 언급되는 일도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물론 고닉이 유대 이민자 출신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점이 딱히 숨겨진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자기서사라고 할 수 있는 《사나운 애착》에도 충분히 드러나 있는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공산당과 공산주의가 비비언 고닉이라는 저명한 작가를 소환할 때 잘 주목되거나 거론되지 않는 항목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계급의식이야말로 자신을 형성하는 뿌리였다는 그의 언급을 상기해볼 때, 이런 현상이 조금은 놀랍게 느껴집니다. ‘노동은 사회주의이고 자본은 민족주의’라는 등식이야말로 “살과 뼈를 통해 흡수된 모유”였다는 언급은 또 어떻고요. 확실히 공산주의를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린 것일까요? 유년 시절의 그를 떠받쳐주었을, 어쩌면 그가 머무르는 세계 자체를 지어올렸을 깊은 계급의식은 우리가 알던 그의 가장 낯선 궤적들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라는 책에서 비비언 고닉이라는 친숙한 이름은 한없이 낯설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 이 책에 마음이 갔습니다. 고닉이라는 익히 알려진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다시 쓰도록 촉발하는 책 같아서요. 익히 알려져 있다는 건, 한편으로 더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과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내면의 동기나 끌림이 차단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내내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반드시 이 책으로 이 사람을 알아야겠다고, 그리고 꼭 이 책을 통해서 알고 싶다고. 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하게 내리꽂는 첫마디(“나는 내가 유대인이라거나 여자아이라는 것보다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했다”)를 읽는 순간 여러분도 직감하실 거예요. 시차와 심리적 거리감쯤은 가뿐히 뛰어넘어 공산주의자들의 시대로, 그 찬란한 삶 속으로 곧장 들어가게 되리라는 걸.

 

맙소사, 공산주의자들이 겪었던 걸 지금 내가 겪고 있구나!”

: 페미니즘 운동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를

 

비비언 고닉은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를 1977년에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2020년에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복간했고, 저희가 소개하는 한국어판 역시 바로 그 2020년의 버전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쓴 서문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중대한 변경이 없으니 독자들 역시 초판본을 그대로 접하는 것이나 다름없기는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무엇보다 1977년이라는 시기입니다.

고닉은 무엇보다 급진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작가로, 본격적인 저작 활동을 하기 전인 1969~1977년에 《빌리지보이스The Village Voice》의 기자로 페미니즘 운동을 취재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기를 뒤덮은 페미니즘 두 번째 물결이 그에게 “깨달음의 충격”을 선사했죠. 그런데 고닉은 그 운동의 한복판에서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 일련의 여성주의적 에세이들이 아니라 미국 공산주의자에 대한 구술사 작업에 매진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공산주의적 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말이죠. 어째서, 어쩌자고 그는 페미니즘 운동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소환해낸 걸까요.

이 묘한 타임라인은 그 운동 내부에 불어닥친 격렬한 정치적 폭풍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과 존재의 감각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찌우는 경험”이었던 페미니즘 의식이 순식간에 도그마에 잠식되고, 그러자 ‘옳은’ 태도와 ‘옳지 않은’ 태도가 단정지어지며 ‘친여성’ 노선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모조리 적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보스턴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자신 역시 바로 그 도그마로 단죄당하는 공포(“당신은 먹물 수정주의자로군요!”)를 겪게 된 날, 오래 파묻어두었던 미국공산당원들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그의 뇌리에 떠오릅니다. 아니, 그보단 그 기억이 그를 내리쳤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맙소사, 공산주의자들이 겪었던 걸 지금 내가 겪고 있구나!”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의 1977년 초판본(왼쪽)과 2020년 복간본(오른쪽).

질척대고 끈적이며 과장되게

: 로맨스로서의 공산주의

 

비비언 고닉은 이민자와 빈민의 터전이었던 뉴욕 브롱크스 지구에서 20년 이상을 살았고, 진보적 사회주의자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계급의식, 즉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자각이야말로 자신의 원초적 정신이었다는 고닉의 말처럼, 유년 시절 그의 “친구”이자 “우리”는 바로 그 의식을 공유하는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공산당원들이었죠. 마치 영화의 인트로처럼 펼쳐지는 그의 집 주방 식탁 풍경은 그가 어떤 세계의 일원이었는지, 다시 말해 어떤 이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고, 그들과 무엇을 보고 듣고 이야기했으며, 어떤 언어를 쓰고,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았는지를 극적이고 생기 넘치게 보여줍니다. 한쪽 겨드랑이에 《데일리워커The Daily Worker》를 끼고 활보하던 이들, 각종 집회와 메이데이 행진에 참석하던 이들, 변호 기금 때문에 모금 활동을 하던 이들, 그의 집 식탁에 둘러앉아 우렁찬 목소리로 “사안”을 논하던 이들 모두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였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브롱크스 밖의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찬란했던 세계가 한낱 변방이었음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국 서부인들의 낙인과 대상화, 혹은 무지함은 그로선 전혀 겪어본 바 없는 종류의 경험이었고, 그만큼 오랜 시간 그의 속에 단단히 얹혀 있었던 듯합니다. 제가 고닉의 이 경험에 특히 더 주목하고 싶은 건, 이게 그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이자 더 나아가 이 책을 이런 방식(로맨스)으로 쓰게 된 이유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닉에게 로맨스는 “공산주의자로 존재하던 경험”을 그리는 가장 적절한 방식인데, 여기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품었던 열정과 낭만, 신념을 포착하려는 그의 열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라는 이상에 힘입어 일평생 급진주의에 투신하는 삶을 숙명으로 느꼈던 이들을 담아낼 수 있는 틀과 어조로, 로맨스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추상적인 이념에 머무르지 않고 평범한 이들의 영혼에 가닿았습니다. 지극히 평범할 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억압이라는 비루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살아 있기에 사는 존재 그 이상으로 단박에 끌어올렸죠. 이들이 공산당이라는 조직과 그 조직된 정치를 통해 거머쥘 수 있었던 “삶의 핵심에 다다랐다”는 감각을, 손에 잡힐 듯 여전히 생생한 그 경험을 고닉은 로맨스라는 컬러 초상화로 그려냈습니다.*

질척대고 끈적이며 과장된 표현들을 거침없이 밀고 나가며 앙상한 뼈대에 살을 입히기. 그리하여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처참하고 비루한 삶의 조건 속에서 가장 경이로운 열정을 피워낸 존재들을 되살려내기.


* ‘컬러 초상화’는 《뉴리퍼블릭》의 소피 핑컴Sophie Pinkham이 쓴 이 책 추천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전체 문장은 이렇습니다. “(고닉의) ‘로맨스’는 냉전의 흑백 수사에 대항하는 컬러 초상화다.”

1937년 메이데이 행진에 쓰인 《데일리워커》를 읽는 노동자의 조형물.

저희의 한국어판 책 표지 역시 조재석 작가님의 멋진 일러스트로 이 조형물을 담아냈습니다.

러시아혁명(1917) 10주년을 기념하는 1927년 11월 2일자 《데일리워커》.

이 책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데일리워커》는 미국공산당의 상징과도 같은 일간지입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까지 정기적으로 구독했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신문이 몇 분 만에 동이 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구술사가로서 내 결함이 무엇이든

: 실패를 노정하는 용기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보도자료에서는 차마 다루지 못한 좀 더 사적인 감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저에게 가장 핵심적이었던 이 지점을 공식 책소개에 녹여내지 못한 건 그것이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결함’이어서였는데, 사실 저는 그것 때문에 이 책에 애정을 느낍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결함을 숨기지 않고, 실패를 노정하는 용기라고 할까요.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뭉클한 건, 고닉이 변명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으면서 그 실패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다는 점입니다.

고닉은 자신이 채택한 이 서사 양식이 하나의 결함이기도 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로맨스적 서술이 좌우의 유력 지식인들, 특히 “난폭한 반공주의”로 돌아선 이들의 사나운 공격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마저도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 결점, 여기서 비롯되는 “낭패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동시에 이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과 확신을 고백합니다. “감정이 어찌나 질척대는지 온몸이 끈적대는 것 같다”, “거기서 거기인 과장된 강조 표현 때문에 숱한 문장들이 흉측하다”는 가차 없는 자기평가에 뒤이어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진심은 이런 것입니다. “별로 잘 쓰지는 못”했지만, “공산주의자로 존재하던 경험을 로맨스로 그린 것”과 “모든 인터뷰이들을 영웅이라는 듯 쓴 것”이 적절했다는 생각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만일 이 책에 모종의 진실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태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태도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모순을 직면하는 정직한 힘 말입니다. 고닉이 공산주의자들의 구술을 책으로 쓰며 느끼는 저 모순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한때 공산당원들이 품었던 열정적인 꿈의 아이러니 속에서 보겠다는 기획과 긴밀히 맞닿아 있습니다. 비전이 어떻게 도그마가 되었는지, 공산주의 이념이 어떻게 복잡한 삶의 모습을 지우는 단순한 설명으로 전락했는지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그 열정에 더욱 깊이 침잠해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는 자신이 모든 인터뷰이들을 영웅처럼, 아름답게 썼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그리고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지만, 결코 ‘영웅담’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모순들이 그의 글을 영웅담과 결정적으로 다르게 만들죠. 급진주의적 이상을 품고 자기 삶의 영웅으로 거듭났던 이들이 그 이상 때문에 일평생 어떤 식으로 “고강도 줄타기”를 했는지, 그 이상이 삶의 다른 부분을 어떻게 짓누르고 억압했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무엇을 잃게 했는지……

로맨스가 저력을 발휘하는 건 그런 대목들에서입니다. 고닉의 로맨스는 미국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찬란했던 시작을 넘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로까지 굽이굽이 나아갑니다. 그 로맨스 안에서 우리는 반공주의와 냉전의 얄팍한 구도가 포착하지 못한 다채로운 질문들을 건져올릴 수 있습니다. “금빛 찬란한 순수한 감정들” 이후의 고통, 무의미, 텅 빔, 지리멸렬함이란 어떤 것인지, 이것들이 그들의 전체 경험을 어떻게 '다시' 설명해주는지. 사회적 고립, 경제적·직업적 궁핍, 종내는 투옥을 견뎌낸 그들의 독보적 경험이 미국 삶의 어떤 귀퉁이를 보여주는지. 그들은 어떤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한때 그들이 만들어냈던 것은 어떤 미국이었는지. 미국의 삶 중 어떤 구체적인 조건들이 그들의 허기에 말을 걸었는지.

‘스탈린주의’와 같은 무소불위의 단어 “이면에서 와글대는 모순적인 삶”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이 ‘로맨스’를, 공산주의자들의 경험과 독자 사이에 연막을 드리우는 단순한 어조에 저항하는 이 ‘태도’를 독자분들께서도 함께 느껴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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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뭐가 되려고 해라


아직 뭐가 되지 못한 여자애들은 인디밴드 공연 뒤풀이에, 영화제 상영관 근처 술집에, 이쪽 업소와 이쪽 클럽에 분포해 있다. 이들은 정신병에 걸려 있는데, 아직 되지 못한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 어떤 언니의 마누라, 갓반인, 작가, 음악가, 백예린, 백예린 여친, 하여튼 예술따리…… 수천 갈래로 뻗은 가능성을 향해 나를-봐줘-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이들 근처에 있으면 10분 만에 기운이 빨린다. 그러나 충분히 취했거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 마음에 든다면 그만큼 재밌는 자리도 없다. 내가 그 에너지를 감지하는 이유는 내가 24시간 뭐가 되고 싶은 여자 상태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뭔가 대단한 게 되고 싶습니다.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분명한 건 지금은 아니야, 한참 모자라. 나는 그 여자들의 얼굴을 알아본다.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얼굴. 그런데 뭔가를 자꾸 바라게 되어서 슬픈 얼굴. 친구들이 ‘엄살원’ 프로젝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윤기나는 음식을 푸지게 먹이고 싶다. 그런데 우리 집은 좁고 내 요리 실력은 형편없다. 게다가 그 여자들과 그렇게까지 가깝게 시간을 보내면 걔네가 엄청나게 꼴보기 싫어져서 하루 반나절은 누워서 욕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결국엔 우리에게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더 외로워지기만 할 거다. 그러니까 서로 말 섞지 않아도 되는 데서 뭐가 되려는 여자들의 에너지만 느끼고 싶다. 그게 필요할 때 내가 가는 곳은 이쪽 업소다.


이쪽? 어느 쪽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비교적 난이도가 쉬운 인생을 살고 있다. 해리포터〉에서 악의 존재인 볼드모트를 ‘이름을 불러선 안되는 자’라고 돌려 말하듯이 레즈비언이라는 네 글자도 직접 말하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니까 세상에 더 넓고 밝고 어느 쪽이라고 굳이 안 밝혀도 인생이 쉽게 살아지는 저쪽과 그렇지 않은 이쪽이 있다면 나와 그 여자들은 이쪽에 있다.


이쪽 클럽이라는 공간은 매번 나를 미치게 한다. 2000년대 초반에서 영영 나아갈 생각이 없는 음악과 인테리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복고 콘셉트?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같은 것이 아닐는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다. 개인 탓 아니고 사회 탓이고 안타깝지만 이곳의 주요 고객층은 돈이 별로 없는 20대 여자여서 굳이 그렇게 최신 유행에 발맞춰 세련되어질 필요가 없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홍대 어딘가의 이쪽 클럽에서는 00년생이 00년대 음악 같은 것에 춤을 추고 있다는 다소 무서운 이야기다. 그저 여자?를 원하는 여자?들을 잔뜩 만날 수 있다는 업소의 특성 하나만으로도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이 돈을 내고 간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혹은 알기 때문에 이쪽 클럽에 가고 싶어진다. 여기라면 뭐가 되려는 여자들의 에너지를 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축축한 계단 혹은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완전히 다른 페이지의 공간에 들어서면 울리는 익숙한 뽬 뽬 빰빰 힙합과 EDM의 비빔박자 음악이 나오기를, 컨셉이 ‘섹시 셔츠 파티’여서 탈색한 디제이나 댄서 언니들(이제는 누구도 실제로 나보다 나이가 많진 않겠지만)이 롯데월드 근처 교복 대여숍에서 빌리셨나? 싶은 꽉 끼는 셔츠를 입고 춤추고 있기를 바란다. 잘생쁨 누구 언니가 홍대에 떠서 오늘 여기가 핫플이 되었고 모엣샹동 보틀을 추가했다는 소식이 벽면에 빔프로젝터로 띄워지고 샴걸들이 바니걸 복장을 하고 제로투 같은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테지만 그것을 봐야만 이쪽 클럽에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는 마누라가 되거나 마누라를 얻기 전의 여자들이 잔뜩 오고 가는 임시의 공간이다. 마누라를 만나서 빌라로 다세대주택으로 아파트로 캠핑장으로 페스티벌 장소로 떠날, 홍대 지하에 있는 어떤 클럽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해도 될 날을 기다리는 여자들. 들어온 그대로 나가지는 않겠다는 욕망으로 굴러가는 눈알들과 30대 레즈비언이 되려는 20대 레즈비언들의 독기…… 쉬지도 않고 흩뿌려대는 티슈들과 연기를 함께 맞으면 그제야 이번 주기의 충동이 잠재워진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아 괜히 왔다…… 그리고 이 행위는 다음 달에 반복된다.


‘아무것도 아님’과 ‘뭔가’ 사이 ‘뭐가 되려고 함’ 상태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사이의 시간은 아직 정제되지 않은 날것이어서 견디기 힘들지만 동시에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큰 기대감과 즐거움을 준다. 예전엔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의 불안에서 당장 벗어나고만 싶어서 괴로웠다. 예를 들어 취업 준비 시절의 나는 매일 너무 많은 구인공고 속에서 24시간 패닉 상태였다. 자소서 깎는 노인도 못 되고 숙녀도 못 되고 그냥 어떡하지, 어떻게 살지, 난 뭐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 회사는 대체 뭐지, 무한한 될 것 같음과 안 될 것 같음 사이에서 울고 있었다. 거의 매일 넋이 나가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어느 날 통화에서 “혜지야 그 시간도 네 인생이야”라고 말했다. 동성애 이후 커밍아웃 이전, 엄마 말이라면 최대한 귓등으로 듣던 불효의 기간이었지만 왠지 그 말은 마음에 남았다. 그때부터 애매함을 견디는 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 사이의 시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다가 결국엔 좀 좋아하게 되었다. 레즈비언답게 또 엄마 탓할 일이 생긴 것이다. In-between의 에너지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냐면 나는 출간하지 않은 작가의 상태로 2년을 보냈다. 아직 책이 나오진 않았지만 출판사와 계약은 한, 나오면 대박이 날지도 모르지만 모종의 이유로 아직은 탈고를 하지 못한 상태에 필사적으로 머물렀다. 다시 한번 모든 관계자분들께 사죄드립니다만 이 시기의 좋은 점은 다음과 같다.


~계약과 출간 전, 덜 작가 시기의 효능~

  1. 정정당당하게 출발하지 않은 상태라 아직은 승부를 걸지 않아도 된다.
  2. 긁지 않은 복권을 들고 다니는 기분을 은밀히 간직할 수 있다.
  3.  “퇴사하고 뭐 해?”라는 질문에 “계약한 책이 있는데……”라며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다.
  4.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에 “원고 쓰지 뭐……”라며 제법 창작자 분위기를 낼 수 있다.
  5.  아직 판매 부수라든지 인세라든지 현실적인 숫자가 눈앞에 없기 때문에 대단한 창작자가 될 것만 같은 단꿈에 부풀 수 있다.
  6. 이 시기가 길어질수록 ‘뭔가 대단한 게 나오려나본데……’라는 기대감을 줄 수 있다. 역효과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맛 좋고 효능 좋은 연습생 기간에서 왜 벗어나야만 했는지? 계약상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를 참고하세요. 그보다, 회사에 지각하고 원고 집필은 영영 미루는 지지부진한 상태의 내가 징그러웠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욕망이 꼴보기 싫었다. 대체 왜 작가가 되고 싶은 건데, 그러면서 교사도 되고 싶고 팟캐스트도 하고 공연도 하고 싶은 건데, 뭐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살 건데. 아직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자꾸 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싫고 부끄러웠다. 욕망이란 건 가지고 있는 한 반드시 나쁜 결과를 줄 것 같았다. 어릴 적 교회에서 들은 대로라면 욕망은 인간을 더욱 죄 가운데 빠뜨리며 하나님의 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연극 〈다정이 병인양 하여〉에서 듣기로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갈망, 욕망이라고 한다. 고통을 끝내는 것은 열반, 니르바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므로 모든 번뇌가 없는 상태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여자를 안 좋아했으면 레즈클럽 가서 구린 음악 안 들어도 될 텐데, 학생들을 안 사랑했다면 직장에서 이렇게까지 자책하지 않았을 텐데, 창작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면 마감에 늦을 일도 없었을 텐데.


스포일러 주의: 나는 집 있고 애인 있는 30대 레즈비언 창작자가 되었다. 가끔 페스티벌도 가고 캠핑 장비 구경도 한다. 퇴사도 했고 원고도 조금씩 써서 연재도 하고 있다. 드디어 뭐가 되어버린 거냐고? 배신에 성공한 거냐고? 그렇지 않다! 왜냐면 나는 아직도 왕성하게 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뭐-못 됨' 이슈로 울었다! 몸은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는데 핸드폰 화면에는 너무 많은 게 펼쳐져서 잘 익은 공황이 사시사철 제철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이미 책을 낸 동료들과 그들의 멋진 프로필 사진, 행사 공지, 휴가지에서 찍은 아름다운 사진이 올라온다. 친구들은 내가 못 그러는 방식으로 예쁘고 여자친구의 전 여친은 너무 하얗고 말랐고 내가 흉내도 못 내는 스타일의 미녀다. 그걸 보다보면…… 나는 마르고 싶다, 하얗고 싶다, 탈색이 어울리는 쿨톤이고 싶다, 아니? 멋지게 태닝하고 서핑하고 싶다, D컵 가슴을 갖고 싶다, 근육질의 프리다이버가 되고 싶다, 세련 옷 협찬 받는 힙스터이고 싶다, 양양 바닷가에서 헌팅하는 헤테로 여성이고 싶다, 결혼해서 남편 들들 볶는 릴스로 유명해지고 싶다, 언니랑 손잡고 혼인평등 소송 발언을 하고 싶다, 돌연 잠적해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 뉴욕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싶다, 베를린 클럽에서 일하고 싶다, 스반홀름에서 공동 생활을 하고 싶다, 음색이 독보적인 싱어송라이터이고 싶다, 아니? 페기구나 예지 같은 디제이가 될래. 언니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생을 살고 싶어. 그런데 나는 고작 나 하나뿐인데 어쩌지? 내가 나여서 괴로운 마음과 어떻게 살아가지?


이런 번뇌를 꽤 오래 달고 산 나는 그동안 별걸 다 했다. 고작 나밖에 안 되는 나에게서 잠시 멀어지는 효과적인 방법은 멋진 사람들과 붙어 있는 거였다. 그래서 멋진 사람들이 있는 각종 독서모임과 뒤풀이에 가고 함께 드랙킹 공연을 만들고 케이팝 커버댄스 영상을 찍고 전시와 연극에 참여하고 팟캐스트를 만들고 파티를 열었다. 근 8년간 온갖 퀴어 행사 잡탕찌개를 끓이면서 무대를 만들고 공연자들을 올리고 가끔은 내가 올라갔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무대에서 욕망은 자원이 된다. 무대를 만들 때는 내가 나여서 괴로운 마음, 지금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게 된다. 무대에서만큼은 뭐가 되려는 마음이 원동력이고 아름다움이다. 일상에서는 나를 괴롭히기만 했던 욕망을 무대에서 얼마나 드러내고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고 조절하면 공연의 규모와 질이 달라진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뻗어나가던 나를-봐줘-에너지는 무대로부터 객석을 향해 하나로 정렬된다. 그날 그 시간만큼은 비로소 뭔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겹겹이 얽히고설킨 징그러운 욕망도 원고라는 무대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한 글자씩 정렬되는 것 외엔 별도리가 없다. 그러다보면 뭐가 된다. 내일쯤엔 이 글도 편집자님이 교정 볼 문서가, 동료들이 피드백해줄 작업이, 여러분 메일함의 뉴스레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무대라는 걸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어차피 퀴어 행사는 많아야 3~40명 정도 수용 가능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데다 무대라고 해봤자 객석과 3~4센티미터 단차가 있는 판때기이거나 마스킹테이프로 구획해둔 작은 네모인 경우도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무대에 설 일은 없겠다고 느낀다면, 좀 더 비유적인 무대를 생각해보자. 친구들과의 술자리, 직장 동료들과의 식사, 연인과의 통화, 조별 과제 발표, 회식 자리, 노래방…… 혹은 인생이라는 무대 자체…… 하여튼 지금 마음속에 떠오른 곳에 네모를 치고 그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생각해보자. 잘하고 싶다, 멋져 보이고 싶다, 귀엽고 싶다, 섹시하고 싶다, 차가운 겉모습을 유지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따뜻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 묵묵한 돌쇠가 되고 싶다, 예민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어떤 것이든 괜찮다.


그중 내가 여러분에게서 가장 보고 싶은, 궁금한 종류의 욕망은 단연 ‘웃기고 싶다’이다. 개인적인 선호일 뿐 아니라 이 연재의 주제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웃기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 적 있는지? 한번 웃겨보고 싶은지? 아주 작게라도, 잠깐이라도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광대적 욕망을 품어본 적 있는지? 내가 한 말에 상대가 웃은 적 있는지? 그때의 쾌감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 순간의 기쁨을 다시 느끼고 싶은지? 잘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제일 좋아하는 유튜버 ‘찰스엔터'는 카메라 앞에 혼자 앉아서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리액션하는 걸로도, 어린 시절 싸움 이야기로도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웃긴다. 그는 남이 자기 때문에 박장대소하는 것이 자신이 박장대소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 김신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을 모아놓고 심형래 선배님 흉내를 냈다고 한다. “신영이 너무 웃겨”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탁월하게 웃긴 사람에게는 높은 확률로 웃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당신이 웃기려는 욕망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재능이 될 수도 있다. 장담은 못한다. 의욕이 너무 앞서는 경우 웃기기도 전에 불편함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코미디 무대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웃기고 싶다는 욕망은 필수적이다. 웃음, 울음, 감동, 미장센, 영상미, 감동, 작품성, 핍진성…… 뭐든 느끼게 하면 그만인(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달리 코미디의 목표 지점은 명확하다. 웃기기 위해서는 의도가 필요하고, 웃기려고 했는데 실패하면 티도 많이 난다. 그런데도 왜 웃기려고 하는지?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소중한 자원이 되는 곳이 바로 코미디 무대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내가 나인 것이 괴로운 사람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미워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뭐가 되려는 마음만이 뭐를 만들 수 있는 마음속 네모를 생각해보자. 거기서 꿈틀거리는 뭔가를 너무 미워하거나 너무 부풀리지 않은 채로 잘 다룬다면 당신은 최고의 코미디언이 될 수도 있다.

곧 나와요

《가장 느린 정의: 돌봄과 장애정의가 만드는 세계》

(원제: Care Work: Dreaming Disability Justice)이제 정말 곧! 출간됩니다.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지음ㅣ전혜은ˑ제이 옮김


부서진 채로도 잘 살 수 있는

불구 미래에 대하여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돌봄망이 무수히 교차하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버리지 않을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북미 장애정의운동을 일궈온 주요 활동가 중 한 사람이자 장애정의 공연 집단 신스인발리드 소속 공연예술가인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가 본격적으로 장애정의를 소개하는 책의 한국어판이 곧 출간됩니다.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연구자 전혜은과 페미니스트 활동가 제이의 공역입니다. 최근 들어 한국에도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한 ‘장애정의(Disability Justice)’는 2005년 일라이 클레어, 스테이시 밀번 등이 설립한 장애정의집단(Disability Justice Collective)의 흑인, 브라운, 퀴어, 트랜스 구성원들이 만든 신조어로, 백인 중심적이고 단일 쟁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존의 장애인권운동에서 주변화되었던 장애인 퀴어, 트랜스, 흑인, 브라운의 삶과 필요, 조직화 전략을 중심에 놓는 운동/관점을 의미합니다. 계급/젠더/섹슈얼리티/장애/인종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운동, 어떤 돌봄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장애정의에 기반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느린 정의》를 통해 돌봄과 장애정의가 어떤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해방 공동체란 어떤 모습일지를 꼭 함께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장애정의는 느려. 사회정의에 가장 정통한 비장애인들조차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경악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곧 장애정의야. 많은 주류 비장애인들이 실패라고 여기도록 배워온 게 바로 장애정의의 모습이야.” (본문에서)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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