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항상 쉬는 시간이 부족할까? : 여가 빈곤의 시대

왜 항상 쉬는 시간이 부족할까? : 여가 빈곤의 시대

In the meantime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23), 2024.5.1,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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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시간 빈곤, 여가, 그림자 노동, 중산층, 정보

1.머리말
2.“퇴근하면 ‘체력 0’” :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3.올라운더 직원이 되다 : <그림자 노동의 역습>
4.‘여가 블랙홀’에 빠진 중산층 : <야망계급론>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오늘은 간만의 평일 공휴일입니다. 일을 하시는 연구자님도 계실테고, 느긋하게 편지를 열어보신 연구자님도 계실텐데요. 저는 출근을 합니다.

지난 18일 국민독서실태조사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기사· 원문) ‘작년 한해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나...’ 살펴본 것인데요. 약 60%의 성인이 한 해에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책을 점점 더 안 읽어서 문제라고요.

‘책으로 해찰하는 뉴스레터’ 발행자로서, 이 충격적인 결과를 듣고 펄쩍 뛰었어야 할까요?

그런데 실은 이 소식을 듣고 곰곰 생각하다보니 정작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갔습니다.

과연 요즘 사람들이 독서‘만’ 안하는건가? 하고요.

요즘 사람들은 독서만 안하는 게 아니라 운동도 안하고, 동네 공동체 문제나 정치에 관심도 없고, 가족들과 뜻 깊은 시간도 거의 보내지 않고, 깊은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청개구리 사람’처럼, 좋은 여가 활동은 다 안한다고 할 만합니다. 물론 저도 남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대신 사람들은 틈틈이 스마트폰을 들고서 멍하니 쇼츠를 보거나, SNS 피드를 슥슥 넘기곤 하죠. 푹 늘어져 있거나요.

<fig.1> 최근 발표된 문체부 국민독서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의 약 60%는 책을 1년에 1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독서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 1위는 ‘시간이 없어서’(33.3%)였습니다. (왼쪽)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 ‘무엇이 그리 바쁜가’라는 글자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 KBS

통상 양질의 여가를 즐기지 못하고, 대신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이 긴 현상은 개인의 탓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게으르거나 의지 박약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의아했습니다.

이게 개인의 탓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긴 노동 시간 때문에, 쉬는 날엔 늘어져있는 것밖엔 못하는데요.1) 또한, 오늘날 우리의 여가를 노리는 것들은 많기 때문에 쉬는 시간은 마치 물에 씻은 솜사탕처럼 너무 쉽게 사라져버리곤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차라리 독서를 많이 하자라든지 좋은 취미를 위해 노오력하자라는 이야기보다는 -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일상에서 좋은 여가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왜 여가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맨날 쉬는 시간이 부족한 것 같을까요? 이건 우리의 ’의지’ ‘노오력 부족’ 탓일 뿐일까요?’...

오늘 편지에서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테레사 뷔커), <그림자 노동의 역습>(크레이그 램버트), <야망계급론>(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등을 지팡이 삼아 우리의 ‘여가 부족’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이번 독서실태조사에선 월급 500만원 이상 독서율(54.7%)과 월급 200만원 이하 독서율(9.8%)의 차이가 주목되기도 했습니다.(링크) 인과관계를 섣불리 재단할 순 없겠지만(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월급이 많은지, 혹은 월급이 많아서 책을 많이 읽을 여유가 있는 것인지), 독서 인구 가운데 책을 안읽는 이유 1위가 "시간이 없어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소득 수준별로 여가에도 격차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2.“퇴근하면 ‘체력 0’” :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전 활동적인 편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걷기가 힘들어요 […] 도시에서 몇년간 운전을 하면 […] 운동은 하지 못해요. 차를 주차한 뒤 집까지 걸어가는 운동만 합니다. 8미터밖에 안되죠.(에이브러햄, 택시기사, 35세)”- 사라 샤르마, <틈새시간>

저는 예전 회사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한 헬스장의 전단지를 받았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언제까지 작심삼일만 하실 겁니까!’라고 큼직하게 쓰여있었는데요. 당시 저는 마침 헬스장 1년 이용권을 끊어두고 작심삼일을 시전 중었던지라 종이를 보고서 크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에 두세번 야근을 하면서는 도저히 헬스장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요.

우리는 통상 어떤 독서 등 여가, 취미 등의 활동을 ‘틈틈이’ 해야한다고 여기고, 그걸 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자책하곤 하는데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쓴 독일 저널리스트 테레사 뷔커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요.

테레사 뷔커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오늘날 과도한 노동 시간이 어떻게 우리 삶을 몽땅 쪼그라뜨리는지를 바라보고 있는데요.

특히 그중에서도 저자는 ‘진짜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충분한 휴식, 하고 싶은 일에 맘껏 집중하기, 놀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등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진짜 여가를 위해선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가 필수적인데요. 이런 시간을 얼마나 갖는지가 삶의 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너무 오래, 많이 일하기 때문에 ‘진짜 여가’를 전혀 갖지 못하게 됐다!”는 게 이 책의 핵심 메시지죠.

<fig.2>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책 표지 (왼쪽) 대체로 늦은 퇴근 후엔 "체력이 0" 상태가 되기 때문에 손가락 까딱하나 하고 싶지 않은, 그림 속 고양이같은 상태가 됩니다. 저는 저만 이런가?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 많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직장인이,가정주부들이 비슷한 상태로 '여가'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원더박스, 온라인 커뮤니티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느낌표가 떠오른 부분은, 과도한 노동이 어떻게 쉬는 시간까지 ‘침범’하는지에 대한 대목이었는데요.

예를 들어 하루 10시간 장작을 패다가 집에 가서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굳이 비유가 아니더라도, 실제 일터에서 종일 진이 빠지고 집에 가면 ‘에너지’가 너덜너덜이고요.

특히 돌봄노동, 가사노동을 집에서 해야하는 경우엔 더 심해집니다.

* “퇴근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녀는 직장에서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로가 남은 시간에 고스란히 스며든다고 말한다. 그녀는 […] 교대근무가 끝난 후의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보낼 수 없다[ …] ”지금은 책 한 권 읽는 것도 힘들어. 꼬맹이가 잠들면 내가 16살에나 좋아했을 법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거야. 36년이 된 내 뇌는 지금 이정도밖에 할 수 없어.”

* 둘째 아이가 태어난 해에 나(저자)는 너무 피곤해서 드라마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아래로 내리며 몇몇 기사 제목만을 읽었다. 간혹 기사를 터치해서 내용 화면으로 넘어가기도 했지만, 집중을 할 수 없어서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 저녁에 깨어 있는 자유 시간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이상한 시간 조각들로 채워졌다.

-테레사 뷔커,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하 동일)

집에 오면, 그저 누워서 멍하니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다. 마치 퇴근 후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요.

과연 이때 스마트폰 ‘중독’은 원인일까요 결과일까요?

물 먹은 솜뭉치처럼 잔뜩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 왜 당신은 스마트폰을 멍하니 만지는 대신 - ‘진지한’ 책을 읽지 않고, ‘제대로 된’ ‘생산적인’ 취미를 갖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나는 조각 시간에라도 어떻게든 활동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2)

하지만 저자는 진실로 몰입하는 만족스러운, 양질의 여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통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저자는 이 책에서, “최저생계시간”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하는데요. 진정 만족스러운 진짜 여가를 위해선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fig.3>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의 하루 일과표(야근이 있는 경우). 근무와 야근, 아이 어린이집 등하원을 봐주면 사실상 자신의 여가를 위한 '통시간'을 내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왼쪽) 지난해 10월 12만 팔로워를 지닌 미국의 20대 사회초년생 틱토커 '브리엘'이 "9~5시 근무는 미친짓"이라며 우는 영상을 올려 이슈가 되었습니다.(링크) 그는 9~5시 근무 후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사람들이 어떻게 친구를 만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냐며 눈물 흘렸습니다. / 경향신문, 틱톡 갈무리

조각 난 ‘틈틈 자유시간’이라도 그것을 즐기는 동안, 당사자들이 ‘행복’했다면 문제가 안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퍼하면서, 좀 더 즐겁고 편한 마음으로 쉬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싶어했습니다.2)

피험자들은 기운이 좀 남으면 다른 것을 하고 싶어. 나는 다른 곳에 가고 싶어. 바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 (라고 생각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시간 사용 일지에 기록하지는 않는다. 일지에는 피험자가 자유시간 중 1시간을 TV시청하는 데 사용했다고만 기록될 뿐이다.
전 세계 선진국에서 미디어 소비는 가장 인기있는 여가활동이다 […] 하지만 이들이 TV를 시청하는 이유가 TV가 만족감을 주어서일까? […] 미디어 소비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집에서, 별다른 계획 없이,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 [...] 미디어 사용 시간의 확대는 공적 담론에서 종종 계급주의적 편견으로 폄하되거나 정규 교육 부족과 동일시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행동이 항상 가능성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 가난한 사람들이 고소득층보다 TV를 더 많이 시청하는 이유는 TV 앞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식당에서 보내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고, 자녀의 피아노 레슨보다 저렴하며, 휴가를 가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자주하고 싶은지를 묻자 미디어 관련 활동보다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이며 재생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응답이 상위에 올랐다.

이상 인용 부분에서 ‘TV’ 자리에 고스란히 ‘스마트폰’을 대입해보아도 똑같이 통할 것입니다.

이어 저자는 말합니다.

2021년 독일의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하루 평균 3.4시간을 스마트폰에 소비했으며 [...] 고용주나 기술회사, 앱에 광고를 게재하는 회사들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부스러기 시간을 자유 시간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대신 사람들에게 ‘만약 여유가 있다면 - 쉴 때, 진짜로 무엇을 자주 하고 싶냐’고 묻자, 곰곰 생각 후 이런 것들을 하며 놀고 싶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거 하기 77%

* 자연에서 시간 보내기 75%

* 건강 활동 73%

* 당일치기 여행 72%

* 친구와 함께하기 71%

* 더 자주 푹 자기 71%

...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빈 시간’으로만 여가를 판단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여가’죠. 하지만 제대로 된 여가엔 역시 통시간과 돈이 들고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노동 시간 문제 외에도, 오늘날 보이지 않게 우리의 여가를 ‘갉아내는’ 요소가 있습니다.

다음 책에서는 이에 대해 해찰해보려고 합니다.

2) 이런 틈새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브리짓 슐트(더 나은 삶 연구소장)는 짧은 틈새 자유시간을 두고 '시간부스러기(Time Confetti)'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간은 “잘게 조각나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 전혀 사용하지 못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시간부스러기'가 스마트폰 이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3.올라운더 직원이 되다 : <그림자 노동의 역습>】

“삶은 더 바빠졌다.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4시간인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사실 시간이 줄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유 시간이 줄고 있을 뿐이다 [...]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조수가 해안을 침식하듯 새로운 일들이 우리의 시간에 침투해 여가를 조금씩 빼앗아가고 있다.” -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

오늘날 우리는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이 됩니다. 셀프 정리대에선 ‘청소 직원’이 되고요. 직접 영화 사이트를 검색해 시간을 확인하고 예매를 한 뒤 자동 발권기에서 영화티켓을 발급받을 땐 ‘영화관 직원’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인터넷 쇼핑을 위해선 수십개의 비밀번호를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앱 업데이트를 하고 바뀐 화면에 적응도 해야합니다. 물건이 고장 나면 FAQ를 공부해 스스로 해결하는 ‘고객응대직원’이 됩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자잘한 일들을 기꺼이 떠맡고 있는데요.

과연 이런 노동들이 일반화되는 게, 우리의 ‘여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요?

크레이그 램버트의 <그림자 노동의 역습>은 우리에게 독특한 ‘사고의 전환’을 제시해주는 책인데요. 이 책은 ‘대가 없이 추가된 그림자 노동’이라는 제목의 - 2011년 뜨거운 공감을 얻었던 뉴욕타임스 칼럼(링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오히려 오늘날 더 울림이 큰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 포인트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점점 많은 일들을 - 과거엔 직원이 ‘알아서 잘 깔끔하게’ 해주었던 일들을 - 떠맡게 되었고, 이는 티끌 모아 태산으로 기업의 막대한 인건비를 절약해주는 동시에 우리의 시간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fig.4> 크레이그 램버트는 일찍이 스팸메일을 확인하고, 보안 인증을 하고,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연결되지 않는 ARS를 기다리는 등의 ‘일’들을 새로운 그림자 노동으로 명명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왼쪽) 대전 중구청에 마련된 ‘키오스크 체험존’에서 고령자들이 키오스크 이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소비자상은 모든 걸 '알아서 스스로 하는' 이들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 민음사, 경향신문

우리는 과거엔 ‘○○하려면 그냥 ○○하면’ 됐습니다. 야구를 보려면 그냥 야구장에 가고, 물건이 고장나면 그냥 점포에 가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그냥 영화관이나 비디오 가게에 가면 됐죠. 문의를 하려면 전화를 하면 직원이 즉시 응대했고요.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직접 해야 합니다.

이 책의 독특한 부분은, 통상 ‘기술 발전’의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왔던 이런 이야기를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바라보는 점인데요.

저자에 따르면 이런 일은 얼핏 보면 단순히 ‘기술’이라든지 ‘효율화’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 본질은, 직원이 해야됐던 일을 소비자에게로 이동시킨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직접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 허우적대고, 어디서 무엇을 파는지 ‘손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파악하고, 키오스크 이용법을 ‘알아서 익혀’ 결제까지 하고, 수많은 메뉴를 직원의 ‘번거로운 추천’ 없이 15분 동안이나 스스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고대 그리스의 노예나 중세 유럽의 농노가 아닌데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 그림자 노동은 현대의 생활 방식에 ‘중산층 노예’라는 새로운 요소를 안겨주었다.
그림자 노동은 삶의 주변부에서 남는 시간을 잘라 내는 하찮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화된 세계 전역에서 한 순간도 지치지 않고 불을 뿜는 용과 같은 존재이다 […] 컴퓨터 때문에도 수많은 그림자 노동이 발생한다. 스팸 메일을 지우고, 여행을 예약하고, 수십가지 사용자 이름과 비밀번호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림자 노동은 하루가 해야 할 일로 이미 꽉 차있는 사람들의 해야 할 일 목록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는 동시에 자기 인생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포기하게 되는 자기모순적인 21세기가 시작되었다.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하 동일)

이런 일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반화되어왔을까요?

우선 기업의 막대한 인건비 절약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오늘날 산업의 ‘생산-유통-판매’ 국면 가운데 점차 ‘유통-판매’ 차원은 소비자에게 떠맡겨져 왔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고객이 직접 회사와 접촉하는 지점에서요.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자사 직원과 고객 간의 대화를 막으려고 한다. 웹사이트의 FAQ 목록이 대표적인 예이다 [...] 운이 좋으면 표준 답안을 찾는다 […] 제조업체들은 나아가 사용자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다른 사용자들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제 직원과 대화하는 고객 서비스 통화는 기업에 35달러의 비용을 안겨주는 데 반해, 온라인 질문에 드는 비용은 75센트에 불과하다 [...] 기업이 절약하는 비용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셀프 서비스를 이용하면 - 직접 직원의 눈치보지 않고 편하게 고를 수 있고, 수많은 선택지 중 직접 살펴보고 선택할 수 있고, 돈을 약간 절약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a.결과적으로, 나의 ‘시간’을 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통시간’이 사라진다)

b.불과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는 ‘그 분야의 전문가인’ 직원이 전담해 가장 잘해줬던 일이다. (분업 효과)

a) 우선, 당연히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숙련된 직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편합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셀프서비스의 작은 장점들’(직접 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서비스에 드는 약간의 가시적인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다)을 집중 홍보해 그림자 노동이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셀프서비스가 정말로 소비자에게 이득이고 편하다면, 명품매장이 가장 먼저 자동화됐어야 할텐데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오늘날 ‘진짜 인간 직원’이 응대하는 서비스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화, 고급화의 핵심입니다.

몇년 전부터 나는 체이스 사파이어 신용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특히 그들의 고객 서비스가 마음에 든다 [...]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말하는, 살아 있는 사람과 곧바로 연결된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물기 때문에 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fig.5> 롯데백화점 라운지에서 'VIP 전담 직원'이 직접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 '점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골라볼 수 있다'라는 말이 무인점포의 장점으로 여겨지지만, 정반대로 부유층 대상의 서비스는 여전히 사람 중심입니다. 만약 어떤 직원이 손님 대응이 서투르다면 그의 직업인으로서의 헌신, 숙련도(보통 임금과 관련있는)가 문제지, 직원이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일까요? (왼쪽)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안목있는 점원 덕에 "뭐 새로 나온 거 있어요?" 한 마디에 고객은 훌륭한 추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롯데백화점, Reddit

b) 또한 점원을 무조건 ‘성가신 장애물’처럼 보는 시선은, 믿을 만한 점원의 존재가 얼마나 과거(오늘날도)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절약해주었는지를 깡그리 잊은 사실입니다.

한 예로, 1980년대 슈퍼마켓은 최초로 소비자가 ‘걸어다니며 창고 직원처럼 직접 선반에서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는 점에서 혁신이었습니다. 예전엔 거의 모든 잡화를 사기 위해선 그냥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얘기만 하면 물건을 추천받거나,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게의 ‘전문가’인 점원은 아동이든 노인이든,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해, 알아서 최대한 그를 편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비디오 가게, 서점 등 특화된 가게에선 그 분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점원의 존재가 오늘날의 고급 큐레이션 역할을 고스란히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편리하게’ 직접 수십개의 뉴스레터를 일일이 구독하고, 유료 웹진을 뒤져서야 얻을까 말까한 정보를 단번에 주었죠.

한 예로, <킬 빌> 등을 만든 미국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청년 시절 비디오 대여점의 박식한 직원으로 유명했는데요. 사람들은 그에게 영화 추천을 받기 위해 아주 먼 동네에서도 일부러 가게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점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비단 시간 절약이라든지 돈 절약 같은 차원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묘할 정도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게 최고의 이득이라는 식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시간은 정말 중요한 자원이지만, 함부로 - 여러 가치가 있을 때 - 가장 먼저 무시 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통시간’을 끊임없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요.

✏️

그림자 노동은 이 분할된 시간을 잠식해왔다. 그림자 노동은 몇가지 거래 속도를 높여줌으로써 시간을 ‘아껴 줄 수 있다’ […] 그러나 이 시간은 시장에서 교환이 되는 측정할 수 있는 단위인 시계 시간이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나눌 수가 없다 […] 시간은 인생이다. 일, 돈, 시간. 이 세가지가 있으니 그 중 제일은 시간이다. - 크레이그 램버트, <그림자 노동의 역습>

【4.‘여가 블랙홀’에 빠진 중산층 : <야망 계급>】

우리의 여가는 이처럼 ‘외부적인 힘’에 의해 많이 뜯어져나갑니다.

하지만, 여가를 희생시키는 힘은 비단 ‘바깥’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스스로에 의해서도 여가는 희생당합니다. 주로 ‘더 생산적인 여가’를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의해섭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살펴볼 책은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이 쓴 책 <야망계급론>입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과거에는 값비싼 명품, 비싼 돈 드는 취미 등의 과시적 소비가 계급을 구분하는 데 중요했지만, 오늘날엔 비과시적 소비3)를 통해 ‘은근히’ 계급이 갈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과거 상류층(유한계급)이 옛날에는 비싼 요트, 승마 취미 같은 것으로 특권을 뽐냈지만 오늘날의 상류층(야망계급)은 <뉴요커>를 읽거나, 유기농 브랜드의 채소를 사서 직접 집밥을 만들어먹는 식으로 뽐냅니다.4)

제가 이 책을 오늘 레터에서 마지막으로 가져온 이유는, 오늘날 중산층이 어떻게 돈 대신 시간을 쏟아부어 야망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fig.6> <야망계급론> 표지. 가운데 영수증 그림에는 '야망계급'의 지위를 보여주는 다양한 물건의 품목과 가격들이 적혀있습니다.(필라테스 수강료, 레스토랑 가족 모임, 신문 구독료...) (왼쪽) 가격대가 높은 유기농 제품들을 주로 파는 미국의 '홀푸드 마켓'. 책에 따르면 홀푸드 마켓이 신규 출점을 할 때 가장 신경쓰는 것은 자동차 16분 거리 내의 대졸자 비율이라고 합니다. / 오월의봄, UBC Blogs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부유층과 중산층을(소득 수준과는 상관 없이) 단지 문화적인 지향을 기준으로 ‘야망계급’으로 묶은 부분이었는데요.

한참 머리를 갸웃거리던 중 오늘 레터를 쓰기 위해, 위의 책들을 함께 붙여 다시 읽다보니 느낌표가 반짝 떠올랐습니다.

과연, 오늘날 돈이 있든 없든 누구나 ‘문화적 상류층’을 노려볼 수는 있습니다.

‘얼마든 공짜’인 시간만 투자하면요.

이 새로운 집단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적 관습과 사회규범>으로 묶인다 [...] 야망계급이 스스로를 남들과 구별하는 지점은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활용해서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 물론 이 새로운 엘리트 문화집단 내부에는 경제적 격차가 존재한다. 야망계급에는 육아도우미, 아이비리그 등록금, 유기농 딸기에 돈을 펑펑 쓰는 부유한 성원들-로펌 변호사-도 있지만 실업 상태의 시나리오작가나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을 졸업한 화가 등도 있다. 후자의 성원들은 경제적으로는 간신히 이 세계에 참여할 뿐이지만, 대단찮은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도 야망계급의 성원임을 나타낸다. 시나리오작가도 <뉴욕타임스>를 보고, (어쩌면 비합리적으로 자신의 경제상황 대비 무리하면서까지) 홀푸드마켓에서 유기농딸기를 사먹는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이 책에서 저자가 직접적으로 시간을 강조하진 않지만, 저는 이 ‘작은 것들의 합(The sum of small things·영어 원제)’을 오늘날 대부분의 중하류층마저도 무리해서 추구하는 비결은 결국 ‘시간 자원 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돈 없는 야망계급’은 부유층이 직접 개인교사를 고용하고 수백만원 입시 컨설팅을 받을 때 자신이 직접 커뮤니티 등을 보고 공부를 하며 발로 뛰어 정보를 얻고, 세련된(그러면서도 가성비를 추구할 수 있는) 실내 장식 정보를 찾고, 할인되는 전시회 정보를 찾고, 아는 척 할 수 있는 교양 영상을 틈틈이 보고, 해외 배송 사이트들을 찾고, 아이의 다양한 경험을 위해 SNS를 부지런하게 종일 살펴보고 있는 식으로요.

이처럼 오늘날 빈곤층에 비해 중산층의 여가가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중산층의 딜레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능한 삶의 조건 안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노동은 ‘필요하고 좋은 일, 생산적인 일’로 취급되기 때문에 무한히 얼마든지 시간을 투입해도 좋은 일으로 생각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간은 어느정도 쓸모가 있을지언정 결코 ‘여가’라고 할 수 없고요.

이런 종류의 ‘스스로 무한히 쏟아붓는 노동’은, 자기계발 및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개인에게 막대한 부하를 짊어지게 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여가 시간을 희생당한다는 의식조차 없이요.

✏️

“우리는 자유시간에도 우리 문화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일’은 우리 시간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테레사 뷔커,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3)여기서의 ‘비과시적 소비’란, 주로 교육이나 연금, 다양한 경험, 여행, 집밥 해먹기, 유기농 채소 사기, 교양 등처럼 문화적인 영역과 관련된 소비를 뜻합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계층 상승에 영향이 있는 종류의 소비죠.

4)뉴욕타임스 지면에는 롤렉스, 반클리프아펠 등 명품 전면 광고가 자주 실리는데요. 라이프 섹션에는 나란히 2만원대 가성비 와인 소개가 실립니다. 과거 그런 지면을 보고 갸웃했었는데요. 이 책을 읽다보니 아마도 이런 지면이 오늘날 야망계급의 독특한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맺음말】

오늘 레터에서는 우리가 막연하게만 품어왔던 질문 - "우리는 왜 이렇게 쉬는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까?" "왜 나는 휴식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의 근원을 해찰해보았습니다.

저 역시 평소 여가에 대한 불만족한 마음을 품어왔는데요.

오늘 레터를 쓰면서,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여가 시간'이 오늘날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있는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신기루같은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여가를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의식 외에도 사회적인 변화를 함께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 시간 불평등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그리고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하게 삶의 시간을 채워갈 수 있을 사회를 꿈꿔봅니다.

✏️

"국가는 단순히 현세에서 인간의 평범한 행복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불을 쬐며 한담을 나누는 부부, 선술집에서 다트를 즐기는 친구들, 자기 방에서 책을 읽거나 정원에서 땅을 파는 남자-바로 이를 위해 국가가 있다. 그런 순간들을 늘리고 지속시키고 지켜주지 않는 한 모든 법률과 의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등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 C.S.루이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테레사 뷔커, 김현정 옮김,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원더박스, 2023.

-이전 에세이 회차에서도 짧게 언급했던 책입니다.(링크)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은 노동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만족스러운 자유시간'을 갉아내는지를 바라보고, 또 그 열화된 자유시간의 결과 우리가 덜 모이고 정치에도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부분입니다. 결국, 여유가 없다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삶이 여유가 없다는 점도 문제지만), 서로 돌보지 못하고 공동체가 사라지고 또 사회를 바꿀 동력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크레이그 램버트, 이현주 옮김, 『그림자 노동의 역습』, 민음사, 2016.

-오늘 레터에서는 다소 남 말(?)처럼 쓰긴 했지만, 실은 저는 한때 인터넷 쇼핑을 너무 많이해서 일주일에 하루만 시간을 정해서 쇼핑을 하기로 결정해야 했을 정도로 '심각한 쇼핑 중독' 상태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당연히, 헤드폰이나 잡화 하나를 사더라도 수많은 종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가격도 검색해보고 구입했고요. 그것이 저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해 가장 좋은 '선택지'를 선택하고, 또 돈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직접 손품을 팔아 돈을 아낀다"는 게 이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한두개가 아니라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 삶은 돌이킬 수 없을만큼 부스러기로 조각조각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쇼핑을 '노동'으로 보는 시각도 신선했습니다. 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디까지가 '그림자 노동'이고 어디까지가 '긍정적인 여가'인지도 애매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이케아 의자를 직접 조립하는 건 '괜한 공짜 수고'일 수도, 혹은 '약간의 뿌듯함을 주는 활동'일 수도 있으니까요.(실제,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링크)에서도 '그림자 노동'과 '토박이 노동'의 차이는 꽤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직접 읽어보시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유강은 옮김, 『야망계급론』, 오월의봄, 2024.

-이 책은 지난 3월에 출간됐는데, SNS에서 꽤 이슈가 되었어서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과거에는 '과시적 소비'와 '유한계급으로서의 쓸모없는 시간'이 뽐내기 위한 핵심 계급 요소였지만, 오늘날엔 '비과시적 (가치) 소비/지향'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 이 책을 읽을 때는 전혀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읽을 의도가 없었고, 실제로 저자도 '시간'이라는 키워드에는 거의 집중하지 않지만,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야망계급' 정의에 대해 물음표가 떠올랐기 때문에 (과연 부와 무관하게 '문화적 요소'로만 계급을 정의할 수 있는가?) 이번 회차에 함께 써보았습니다. 오늘날의 중산층은 부유층이 돈을 쓸 때,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직접 시간(발품)을 씁니다. ('돈' 대신 '직접 투입한 시간/정보력'으로 중산층-야망을 달성하려는 의지) 그리고 특히 이것이 '교육/양육'과 합쳐지면 난도가 갑자기 풀쩍 뛰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오늘날 중산층 맞벌이 부모의 허리를 휘게 만들고 시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기획노동의 골자입니다.(*<그림자 노동의 역습>의 챕터 중 하나가 가정에서의 기획노동, 양육을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참고해보면 좋습니다)

저는 과연 모두가 이런 부분을 '밑빠진 독처럼' 물을 붓는 레이스하는 것이-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좋은 사회로 가는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튼, 이 책을 나중에 독서모임 등에서 읽을 기회가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중산층'과 '시간' '양육'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보셔도 흥미로운 토론이 되지않을까 합니다.

사라 샤르마, 최영석 옮김, 『틈새 시간』, 앨피, 2017.

-'시간은 24시간으로 평등하다'라는 말에 커다란 물음표를 박아 넣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회사 일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에 집중하는 시간동안 그를 회의시간에 늦지 않게 실어다줄(항상 대기 상태여야하는) 택시기사와 비서, 와이셔츠를 빨아주고 다려줄 사람, 밥을 차려줄 사람, 아이를 돌봐줄 사람 등이 필요한 것이죠. 보통 후자의 사람들은 설령 '띄엄띄엄 유휴 시간'이 많더라도 절대 자유로운 여가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순 없는데, 왜냐면 이들의 시간은 타인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정치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일할 때를 정해주는 이중빈곤 사회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700자

🖍글 속 한 문장

명예로운 ‘때’를 위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살기를 종용하지만, 그로 인해 항상 시간이 ‘부족한’ 삶에 익숙해진다. 최근 한국 사회를 ‘시간빈곤’(시간 자원의 부족), ‘이중빈곤’(경제 자원 및 시간 자원의 부족)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시도들은 모두 이러한 모노크로닉한 시간관념의 결과라 할 수 있다[...]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시간에 대한 스케줄은 대부분 사회가 정해준 ‘때’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된다. 사회는 학교에, 입시에, 취업에, 그리고 성과에, 인생 과업에 충실할 ‘때’를 결정해 준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김관욱 교수의 칼럼입니다. '이중빈곤'에 시달린다는 사람은, "우리가 돈이 없냐? 시간도 없지"를 외치는 사람들인데요. 그간 '시간 빈곤'은 ('경제적 빈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왔지만, 점차 시간 빈곤의 문제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사회는 아동일 때부터 끊임없이 '미래의 성취(그 때)'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연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좋은 고교,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

그리고 오늘 레터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등에서는 충분히 돈을 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노동 시간이 지나치게 긴 '중간계급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영광스런 미래'를 위해 항상 '오늘'을 희생하는 사회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리더스 하이’ : 벽돌책 격파의 쾌감

독서시간: 약 11분 / 글자수: 약 5800자

🖍글 속 한 문장

혼자서 마라톤을 완주하긴 힘들어도 함께 뛰면 더 쉬운 것처럼, ‘벽돌책’을 읽으려 함께 호흡을 맞추고 격려하며 완독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진열된 서점에서 ‘좋은 책’을 찾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읽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달리기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인 ‘러너스 하이’처럼, 독서를 거듭하며 책 속에서 ‘리더스 하이’를 경험했다.[...]"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마르셀 프루스트

👤김스피의 블라블라

인스피아를 시작하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되곤 있는데요. 여전히 벽돌책을 읽을 엄두는 잘 안나곤 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 도전을 하게 된다면 조금은 새로운 시도를 해볼 마음이 들기도 할텐데요.

'리더스 하이'를 함께 느끼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 계정, 서비스들을 취재한 기사입니다. 기사의 본문에 '독서가들의 책 일기 팁'도 실려있고, 참고할만한 서비스들도 두루 소개가 되어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연구자님들은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족이지만, 인스피아 지난회차 아카이브를 통해 주제별 관심 도서를 추천받으시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참고문헌을 보면 어느정도 책의 난이도라든지 대략적인 내용이 가늠이 될 수 있도록 적어두었으니까 참고가 되실 것입니다.

바쁜 사람들이 즐기는 소리와 영상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1000자

🖍글 속 한 문장

하루하루 살기 바쁜 사람은 한줄한줄 주석을 찾아가며 책과 씨름하기 어렵다. 그럴 시간도 힘도 없다. 요즘 내가 관심있게 지켜보는 추세가 있다. 소리는 백색소음, 영상은 ASMR을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풀벌레가 찌르륵찌르륵, 시냇물이 졸졸, 모닥불이 자작자작, 보일러가 웅웅, 도미노가 차르르, 슬라임이 꿀렁꿀렁. 넋 놓은 채 틀어놓으라는 소리와 영상이다. 외국에선 새티스파잉 비디오(satisfying video, 기분 좋아지는 영상)라고도 부른다 [...] 이래 봬도 나 역시 바쁜 사람인 것이다. 바쁘다고 옛날보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만화가 김태권의 짧은 칼럼입니다. 레터 본문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저는 예전부터 쇼츠 중독을 단지 '부박한 사람들의 산만한 행동'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미디어 활용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을 '겁주기'보다는(왜이렇게 집중력이 떨어집니까!) 그들의 시선에서 더욱 '초대'하는 글이나 콘텐츠를 만들려는 시도를 놓치진 말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스피아도 그런 의도로 기획된 레터였고요. 결국 점차 제멋대로 자꾸만 글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가성비 ‘꿀잼휴일’을 보낼까?

지난 레터

🖍글 속 한 문장

“재미없는 책과 해피엔딩으로 끝날 게 뻔한 따분한 연극, 늘 듣는 너무나 익숙한 음악, 훨씬 약한 상대와의 카드 게임 등은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다[…]거의 아무런 쾌감을 주진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책이나 연극, 미술작품 등 어떤 자극의 원천은 우리를 사로잡고 흥분시킨다…”

-티보르 스키토프스키, <기쁨 없는 경제>

👤김스피의 블라블라

섬네일은 과거 트위터의 중간간부(전) 에스더 크로퍼드가 '열심히 일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침구를 가져다두고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는 워커홀릭 문화는 중산층 가운데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그만큼 자기 일에 '열정'이 넘친다는 거죠.

하지만 과연 그런 삶이 긍정적인 것일지, 어떻게 하면 여가를 '가성비 있게' 보낼 수 있을지 등에 대해 - 고쿠분 고이치로의 유명한 책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는가?> 등을 지팡이 삼아, 해찰해본 회차였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기보다는, 구조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보았는데요. 이 레터를 함께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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