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에게는 패턴이 있어요. 나는 좋은 글을 보면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좋은 글이라는 자극 : 글을 쓰고 싶다는 반응]
그래서 좋은 책을 읽다가 얼마 못 가, 노트북을 켜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러 카페에 갈 때는 노트북도 꼭 챙깁니다. 스스로의 패턴을 알기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가위로 찌르면 아픕니다. 가위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날카로운 날을 보면 그래서 긴장하게 됩니다. [날카로운 날을 본다는 자극 : 긴장이라는 반응]
이것도 패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위를 전달할 때 가위 날이 아니라,
손잡이 쪽이 상대방을 향하게 해야 하는 ‘예의’라는 것으로 응답해야합니다.
나는 쾌감을 느낄 때 턱이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할 때라든가, 좋은 글을 쓰게 될 때도 턱이 올라갑니다. 지금 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턱이 지그시 올라갑니다.
살아있는 것들에겐 패턴이 있습니다.
규칙이라든가, 질서라든가, 다른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것에게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 무엇이 없을까.
임종에도 증후가 있습니다. 체인스톡 호흡이라는 겁니다. 평상시처럼 규칙적인 호흡이 아니라, 한동한 숨이 멈췄다가, 숨을 몰아 쉬고. 다시 숨이 멈췄다가, 몰아쉬고. 그렇게 이상한 호흡을 시작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환자가 체인스톡 호흡을 시작하면 임종실로 침대를 옮긴다고 합니다. 80여년 살아온 호흡의 패턴이 무너지고, 생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호흡이 시작되는 겁니다.
죽음에 다다르면, 온몸에 고여 있던 체액이 쏟아져 나옵니다. 근육과 호르몬이 모두 기능을 거부하니까요. 그러고보면, 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중력을 거스르며, 우리의 피와 장기와 배설물을 몸 안에 꽉 쥐고 서있어야 하니까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실 저는 오늘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지구가 인류와 함께 하는 동안 수만년을 유지해온 패턴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요. 나는 요즘 뉴스를 보며, 지구의 임종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합니다. ‘죽음’이나 ‘사망’을 쓰지 않고, ‘임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내가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것도 내가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사랑했던만큼 지구를 사랑합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임종’이란 표현을 써본 것은 (아직까지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부입니다.
임종을 앞둔 집 안을 거닐어 본적 있나요?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날에는 슬프고, 해가 안 드는 날은 으시시합니다. 슬프고 으시시합니다.
요즘 지구가 그렇습니다. 슬프고 으시시합니다. 퇴사를 하자마자, 이탈리아와 독일에 가겠다고 다짐했는데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왠지 쓸쓸할 것 같아서요. 바닥이 드러난 라인강과 포토가 말라 비틀어진 프랑스 남부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으시시함을 느꼈습니다. 분수 운행을 정지한 파리 콩코드 광장. 가뭄 때문에 바닥이 드러나자 세계대전 때 난파선이 발견됐다는 뉴스. 매일 머리를 감지 말라는 정부의 권고. 이 모든 것이 지구의 임종을 느끼게 합니다.
수만년 이어진 패턴이 깨지고, 보든 배설물을 쏟아내서 가족을 놀래키는 임종 직전의 인간처럼. 지구의 장기는 지금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물을 쏟아내거나 고열을 내고 맙니다. 분명 나는 20년 전 초등학교 책상에 앉아, 붕대를 두르고 있는 지구를 그리며 미술시간을 보냈는데요. 20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누군가 내게 몇 개의 계절을 보내냐고 물어보면, 나는 '4계절'이라는 뚜렷했던 패턴을 이제는 얼버무리며 말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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