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한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호적수를 만나 생각을 더 날카롭게 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천천히 읽음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사랑해야 할 글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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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제가 이 책에서 흥미롭게 본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독특하게도 심지어 ‘못난이 책’도 천천히 읽는다면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하는데요.(좋지 않은 책)

이 경우에도 ‘경멸’을 담아 대충 읽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나름 마음을 열고서 천천히 읽어보는 것이 기본이죠. 제대로 마주하기 전에는 그게 졸작인지 걸작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사람도 그렇듯요.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요즘 사람들은 쇼츠랑 틱톡 보느라 책을 통 안읽어서 문제야!”라고 하는 요새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당연한 얘기지만 ‘책을 읽자’라는 말 자체는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독서하느냐의 문제를 무시하고, 무작정 일단 책만 손에 쥐고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거였다면, 스마트폰은 커녕 TV조차 없던 1910년대에 굳이 귀찮게 저자가 독서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쓸 이유도 없었겠죠.

마찬가지로 ‘느린 독서’를 예찬한 일본 작가 야마무라 오사무는 ‘천천히 읽기’와 ‘한가하게 읽기’의 차이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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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대로 천천히’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에서 저자가 직접 이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니지만, 저는 별다른 훈련 없이도 천천히 읽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필사(베껴쓰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저의 경우엔 어떤 인상적인 책을 만났을 때 필사를 하는 시간이 굉장히 긴 편인데요. 심지어 책을 읽는 시간의 몇배가 될 때도 종종 있죠.

필사는 단순히 A바구니에 있는 물을 떠서 B바구니로 옮기는 일은 아닙니다. 필사를 할 때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 마법에 대해 최근 한 책에서 흥미롭게 다룬 대목을 읽었기에 간단하게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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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예술가 케네스 골드스미스가 쓴 책 <문예 비창작Uncreative Writing>은 오늘날 다양한 ‘쓰기’에 대해 궁리해본 흥미로운 책인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오늘 레터의 내용과 관련해 주목한 대목은 ‘베껴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는데요. 저자는 이 책에서 두 챕터정도를 들여 ‘베껴 쓰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요는, 베껴 쓰기가 단순히 남의 글을 따라 적는 단순 노동이 아니라 - 쓰는 동안에 그 틈새에 반드시 ‘무언가’ 엉뚱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놀랍게도 이 책에서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를 약 10개월 간 매일같이 한 쪽씩 베껴 쓴 사이먼 모리스라는 예술가의 사례를 소개하는데요.

우리는 통상 필사를 단순히 책에 있는 내용 중 마음에 든 일부, 멋진 문구를 옮겨서 간직하는 것 혹은 자료 조사를 위해 저장해두는 것 정도로 생각하곤 하는데요. 저자는 다양한 예시를 들며, 베껴쓰기를 할 때 쓰는/읽는 사람의 마음에선 ‘마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베껴 쓰기 프로젝트’를 장장 몇개월에 걸쳐 해낸 사이먼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베껴 쓰기를 한 결과, 우리는 단지 베껴 쓴 텍스트만을 ‘잘’ 읽게 되는 걸까요? 사이먼 모리스는 ‘케루악이 되어보았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대신 마음속의 모종의 화학적 변화로 인해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그는 분명히 바뀌었죠.

실제로 모리스는 베껴 쓰기를 하는 도중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다른 표현을 자기 식으로 적거나 없던 표현을 끼워넣으려는 ‘실수’를 한 적이 많다고 하는데요.

저 역시 필사를 하는 도중 무언가 무럭무럭 떠오르는 해찰거리들을 적곤 하고, 그 내용으로 인스피아를 쓴 적이 아주 많기 때문에 굉장히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단 여기서 베껴쓰기를 하는 건 단지 내 마음에 꼭 맞아 떨어지는 것, 필자의 핵심 주장, 누군가가 추천해준 훌륭한 경구 등만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와닿는 대목이라면 어느 것이나 괜찮죠. 시시껄렁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베껴 쓸 것인가’를 택하는 것이 나의 핵심 개성이기도 합니다.

내 경우는 책을 읽다가 남기게 되는 해설이나 메모는 타인의 기억력을 대신해주는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처럼. 나도 화면 뒤편에서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로 들어간다.

워드 프로세서의 기억력의 도움으로 나는 저 유명한 나의 선조들보다 더 정확하게(정확성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더 많은 양을(양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기억할 수 있겠지만 수많은 해설 가운데서 중요도를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있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이어 망구엘은 이탈리아의 14세기 시인 페트라르카가 ‘독서 메모’에 대해 쓴 글의 일부를 인용하기도 하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페트라르카): 어떤 메모를 말씀하시는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걸세.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 <나의 비밀>(<독서의 역사>에서 재인용)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탈리아의 시인, 인문주의자. <나의 비밀>은 라틴어로 쓰여진 대화체 산문집으로, 상상 속 아우구스티누스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형태로 쓰여져 있음(링크)

이 구절은 얼핏 보면 그냥 평이한 독서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예전에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 저는 이 대목을 베껴 쓰며,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이라는 표현 뒤에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라는 권유가 덧붙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을 옮겨 적고 때때로 생각하다보니, 반복과 암기는 결코 생각과 동떨어져있는 것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로서의 암기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암기(충분히 머물기)입니다.

이런식으로 한번 ‘천천히 베껴 써둔’ 이야기는 웬만해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느 여행을 가서 한 시간동안 앉아있던 해변의 낙조를 웬만해서는 잊기 어렵듯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조를 바라보는 한 시간동안 머릿 속에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리가 없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머무르는 시간, 그리고 관찰이라는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유행하는 ‘기억술’이나 ‘100권 속독술’이 결코 말하지 않는 부분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메모는 꼭 의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재미있을 수도 있죠. 인상깊은 문장을 꼭꼭 씹어 맛보고 또 거기에 나만의 생각을 덧붙이며 이리저리 해찰해볼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 읽어보면 ‘옛날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하며 재미를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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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들을 속속들이 즐기려면 독서를 일종의 취미로 삼아 진지하게 임해야 하네. 우선 나는 맨 뒤쪽 빈 페이지에 지도를 그리고, 인물 계보를 한두개의 도표로 작성한 다음, 끝으로 어떤 이유로든 내가 밑줄을 쳐둔 모든 단락 끝에 색인을 만들지. 사진 현상이나 스크랩북 작성을 흔히들 어떻게 즐기는지 생각해보면, 왜 독서는 이런 식으로 취미로 삼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종종 의문일세. 꼭 읽어야만 했던 많은 따분한 책들도 나는 이 방법으로 즐겨왔거든. 손에 세필을 쥐고서 말일세. 늘 무언가를 만드는 셈이지. 이렇게 읽은 책은 책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장난감처럼 정까지 든다네.”

-C.S.루이스, <책 읽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