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는 그저 ‘오바’라고 말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런 말을 자주 쓰는 걸 보니, 한국인들은 ‘오바’(무언가 과하거나 지나치게 행동하는)하기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오바’하는 사람에게 핀잔 주기도 참 좋아하는 것이다.
엄마도 그 중 하나다. 그녀는 ‘오바’하는 나에게 핀잔 주기를 참 좋아한다. 어릴 때 나의 롤모델은 탐험가 한비야 선생님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자신을 100% 소진하는 삶’이라는 좌우명에 도파민이 돌았다. 나도 그렇게 살자고 일찍이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늘 불나방처럼 굴었다. 체력이 남아있거나, 용기가 남아있거나, 미련이 남아있는 것이 싫었다. 나를 하얗게 불태웠는가. 죽을 때 후회가 없을 것인가. 나는 빈번하게, 죽기 직전의 나와 밀회를 가졌다. 왠지 눈에 눈물이 고인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대로 해’라고 말해 줄 때가 많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오바하지마’라는 말을 자주 했다.
- 엄마, 나 내일 마라톤에 나가.
- 마라톤? 아이고, 오바하지마.
- 엄마, 나 네팔에 한국어 가르치러 가려고.
- 네팔? 아이고, 오바하지마.
- 엄마, 우리 제주도 여행갈까?
- 너무 더울 때 오바하면 안돼
그녀는 나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왜 늘 먼발치에서 서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건 ‘오바’가 아니라, 인생을 즐겁게 사는 거라고 누누히 말해도, 엄마와 나의 유전자에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대학생 때, 학교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좋아서 하는 밴드’를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좋아서 하는 밴드’라는 말을 이름으로 내건 사람들은 남다른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엄마에 대해 질문했다. 엄마는 삶에서 재밌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집안일을 하시면서 보내시니까, 좀더 재밌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엄마한테 한마디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도 20대 후반일 뿐이었는데, 꽤 압도적인 눈빛이었다.
그건 굉장히 오만한 생각입니다. 어머니는 지금 충분히 재밌게 살고계세요. 본인 관점에서는 아닐 수 있지만요. 나는 그 말을 두손에 소중히 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엄마는 화장실 앞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지금 삶이 즐거워? 집안일 하는게 좋아서 하는거야? 엄마는 내게 말했다.
- 딸이 밖에 나가고 이것저것 체험하는 걸 좋아하듯이, 나는 가족을 챙기는 걸 좋아해. 난 이렇게 가족을 챙기면서 행복한거야.
어린이들에게 이러 저런 질문을 하면,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고들 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에게 없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 어른들도 충분히 예상치못한 대답을 들려준다. 우리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뿐이다. 늘 먼발치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녀는 사실 삶의 한 가운데서 열심히 즐거움을 좇고 있었다.
요즘엔 내가 엄마에게 ‘오바하지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녀는 어제도 ‘오늘 멸치 똥 떼고, 냉장고 청소도 했어. 온 몸이 아프다’라고 했다. 그럼 나는 ‘제발 오바하지마’라는 말을 한다. 제발 좀, 쉬어. 아무리 오바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계속 몸이 아플 때까지 가족을 챙긴다. 여전히 그녀에게 그것이 행복이라해도. 우리, 오바하지말자.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