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을 하나 놓고 물을 채우면, 마지막에 물이 동그랗게 위에 끝까지 찰 때가 있어요. 표면장력이라고 그러죠. 거기에 물방울 하나만 딱 더 올리면,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에 있는 물 전체가 그냥 바깥으로 흘러내리게 되는데, 범죄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회의 범죄는 어떻게 보면 정상일 수 있지만 그 정상이 굉장히 위험해질 때는 더 큰 범죄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표면장력이 있는 상황입니다."

- 승재현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3년 8월 17일 YTN 라디오 <이슈 & 피플>

한국 사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지난 6일 서울 지하철에서 있었던 칼부림 오인 소동을 봐도 알 수 있죠. 호신용품 판매가 급증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이런 반응은 지금껏 한국 사회가 이런 이상동기범죄에 대응할 방법을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해결책을 찾으려면 어쩌다 이 문제를 일찍 생각하지 못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묻지마 범죄’라는 단어가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상동기범죄보다 익숙한 표현이죠? 사실 이 표현은 경찰이나 학계에서 세운 표현이 아니에요. 언론에서 2000년대 초반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어떤 범죄를 뜻하는지 뚜렷하게 정의된 적이 없는데도 계속 쓰여 왔죠.

이 표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표현이 주는 효과를 지적합니다. ‘묻지 마’란 표현은 범죄 동기가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고 보게 되죠. 그래서일까요? 그간 경찰과 학계는 제대로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지난 10일에야 이상동기범죄 동기를 분류한 통계를 발표했어요. 통계는 해결책을 발굴할 각종 연구의 토대로 쓰이는데, 오랫동안 없었던 겁니다. 학계가 어떤 범죄를 ‘묻지마 범죄’라고 부를지 합의하지 못했고, 대체 표현도 각양각색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나쁜 효과는 더 있어요. 범죄를 ‘사회가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아닌 ‘어느 미친 사람의 소행’으로 축소할 수 있죠. 저지른 이유가 없다는 인상을 주니까요. 예컨대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났던 여성 살해 사건은 ‘묻지마 범죄’로 불렸지만, 범인이 강한 여성혐오를 품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사회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는 반론이 강하게 일었었죠. 2019년 안인득 살인 사건에서도 국가의 정신건강 관리 문제가 제기됐었고요.

‘묻지 마’라는 말과 달리 범죄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이상동기범죄 3건도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유정과 조선은 현실에서 상당한 박탈감과 열등감을 품었고, 자신이 갖지 못한 걸 가진 또래에게 분풀이하려고 했습니다. 최원종은 뚜렷한 동기를 밝히지 않았지만, 대신 두 명과 공유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뒤 사회와 단절된 외톨이였다는 점입니다. 최원종은 특목고 입학에 실패한 뒤 가족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정유정은 대학 입시에 실패했었고, 조선은 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경쟁에서 탈락한 외톨이’가 탄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전문직을 향해 모두가 경쟁하고 다수가 탈락합니다. 취업하자마자 이직을 준비합니다. 조선업 같은 현장에서는 일자리가 넘쳐난다고 하지만, 뜯어보면 위험하고 고된데 임금은 낮은 불안정한 일자리입니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부익부 빈익빈은 심해졌습니다. 불평등에는 열등감이 따르기 마련이죠. 우리 사회에 분노와 좌절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사회 저변에 에너지로 뭉쳐 쌓였습니다.

정유정, 조선, 최원종의 범죄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려고 시도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셋의 서사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사용해 온 언어와 키워 온 환경이 세 범죄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묻지 마’에서 벗어나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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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난동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자 정부·국회가 속속들이 대응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신설’을, 국회는 ‘이상동기범죄 가중처벌 방안’을, 경찰청은 사상 처음으로 ‘특별치안활동’을 벌이고 ‘경찰 면책권 강화’도 논의하고 있죠. 이 대책들이 흉기난동 사건을 저지하고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범죄예방효과가 낮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민에게 위압감을 주고 치안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여론에 반응하는 ‘형벌 포퓰리즘’이라는 겁니다.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은 사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대책인데요. 이번 흉기난동 사건의 피의자가 폭행 등 전과를 가진 재범이었기에,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진 못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최근의 흉기난동 범죄자들이 경찰에 잡히든 말든 자신의 분노와 불만을 표출하려는 경향성을 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상동기범죄자들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같은 강한 처벌을 두려워하며 범행을 철회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은 엄벌주의 경향성과 높은 교정비용만 낳았을 뿐, 범죄 예방 효과는 없었죠.

[이상동기범죄 가중처벌]

‘이상동기범죄 가중처벌’ 역시 사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대안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범죄억지력은 낮습니다. 형벌 강화와 범죄억지력이 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문 ‘형벌 중형화에 관한 비판적 검토’는 2010년 이후 살인·강도·성범죄 등의 평균 형량이 증가했지만, 2014년 강력범죄는 2005년과 대비해 166% 증가했다고 분석하기도 했죠. 또 실효성도 낮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미 예전부터 양형단계에서 범죄동기를 참작해 양형을 정해왔기에 불필요한 규정이라는 거죠. 법률적으로 ‘이상동기범죄’의 개념이 모호해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됩니다.

[특별치안활동]

경찰청의 ‘특별치안활동’은 흉기 소지 의심자와 이상행동자에게 불심검문을 하고 총기를 사용하는 등 경찰 물리력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흉악범죄를 사전 차단해 범죄 분위기를 없애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대응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무장한 경찰특공대 전술요원·장갑차·대태러 최정예 특수부대가 도심에 배치되는 과도한 경찰행정력의 집중으로, 특수부대가 긴급출동해야하는 상황에 제때 투입되지 못하면서, 또 다른 치안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거죠.

[경찰면책권 강화]

‘특별치안활동’과 함께 흉악범죄를 사전 차단하는 것을 목표하는 ‘경찰 면책권 강화’도 논의 중에 있습니다. 흉악범죄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경찰의 책임을 면제토록 해, 적극적인 진압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강해진 경찰 행정력이 국민에게 위압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흉악범죄자 진압에서 경찰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면책권이 이미 과도하게 보장되는 상황에서, ‘경찰 면책권 확대’는 현장 경찰관의 ‘선 넘는’ 과잉대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얼마 전 이어폰을 끼고 조깅을 하던 중학생이 흉기난동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윗선의 강경대응 강조가 현장에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국가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말들도 나옵니다.

흉기난동사건으로 세상이 흉흉해지면서, ‘각자도생’의 사회 분위기가 되기 쉬운 상황입니다. 사법적 처벌과 경찰 행정력을 강화하는 형벌 포퓰리즘 대책을 넘어, 근본적으로 범죄를 막아낼 사회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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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진 사회적 고립감,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 형벌 포퓰리즘까지. 이상동기범죄 사건으로 촉발된 다양한 의제를 짚어봤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사회가 깊게 병들어있다는 사실이겠죠. 이 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2000년대 말부터 이상동기범죄를 경험하고 연구해 온 일본의 전문가들은 불균형한 노동시장이 가져오는 빈곤과 좌절에 주목했습니다. 불안정한 고용 혹은 무직 상태에서 축적되는 ‘나만 무시당한다’는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낸다는 거죠.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매우 불균형하고,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사람들이 고립을 탈피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빈곤하고 고립된 청년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거나 직업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방법이었죠. 접근성 좋은 상담 창구의 필요성도 제기됐어요. 실제로 일본은 2021년 정부 기구인 '고독·고립 문제 대책실'을 설치해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고립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사회 연결망을 강화하는 사전적인 대책도 중요하지만, 일어난 범죄 사건에 대응하는 방법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존의 ‘응보적 사법’에 기초한 강력한 형벌은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이루기 어렵고, 범행 억제 효과도 낮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1년간 법원이 이상동기범죄(묻지마 범죄)로 인정한 판결문 27건을 보면, 피고인 27명 중 44%(12명)는 동종 전과가 있었습니다. 징역형 집행유예를 받은 1명을 제외하면 모두 실형을 살고 나온 재범이었죠. 현재의 교정·교화 시스템이 가진 한계가 드러난 겁니다.

이에 ‘회복적 사법’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어요. ‘회복적 사법’이란 범죄사건 관련자들이 사건 해결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피해자 또는 지역사회의 손실을 복구하고, 관련 당사자의 재통합을 추구하는 범죄대응 양식을 말합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대립하고 판사가 중립적인 위치에서 판단하는 구조가 아닌,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하는 협력적 구조를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해자의 재범 억제와 피해자의 회복 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과학자나 전문상담가와 같은 다양한 법률외적 전문가들이 깊게 관여하기도 합니다. 사법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회복적·치료적 사업을 통한 판결 선고 후 3년 내 재범률은 14.3%로 전체 범죄자의 평균 재범률인 44.3%보다 현저히 낮습니다.

‘응보적 사법’의 한계는 피해자를 돌보지 못한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가해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불이익을 주는 응보적 사법론은 ‘가해자 중심’의 형사 절차를 구성합니다. 피해자가 수동적인 주변인에 머무르게 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거죠. 반면 회복적 사법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받은 피해와 상처를 전하고,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를 능동적으로 요구할 수 있죠.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사법 패러다임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 지원도 필요합니다. 범죄사건 현장에서 생존한 피해자들은 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일터에 나갈 수 없게 되면서 당장의 치료비나 생활비부터 감당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트라우마가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가정 경제가 무너져 내리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해 평균 발생하는 강력 범죄 건수가 30만 건인데 비해 피해자 지원 건수는 2만여 건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피해자에 대한 치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치유 또한 완성될 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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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흉흉하다’는 말이 딱 적당해보이는 시점입니다. 여러 건의 흉기난동 사건과 살인예고글에 폭탄테러 예고까지.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다가다 죽을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사회를 뒤덮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흉흉한 시점에 이상동기범죄에 관한 레터를 적으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강력한 형법적 대응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병리성을 해결해야한다’는 논지가 상투적일 뿐만 아니라, 어찌보면 무책임한 수사에 그치지 않을까가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으면서 잔혹한 범죄자의 죄를 경감시켜주는 것처럼 느껴질까도 우려스러웠습니다. 무수한 살인예고글들이 불안에 떠는 시민들을 비웃으며, 길거리의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만든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제 고민은 ‘사회의 병리성이 진짜 문제다’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흉기난동사건에 이어진 수많은 살인예고글들을 통해, 재발을 막을 핵심은 ‘반사회적 분노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언론들이 흉기난동 범죄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사회적 고립에 따른 피해의식이 범죄로 이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많은 살인예고글에 대해서도, ‘정서적으로 고립된 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라도 관심을 끌고 인정을 받으려 하는, 병리적 형태의 인정 투쟁이나 주목 경쟁이 격화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결국 상투적인, 진부한 얘기지만, 흉기난동이 만연한 사회를 막기 위해선 사회구조적인 고립을 해소할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번 흉기난동사건이 왜 우리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두운 밤 골목길이 아닌 대낮 도심 한가운데의 사건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앞으로 우리에게 안전한 곳은 없을 거라는 두려운 예고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도 안전한 공간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넘어 좌절까지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의 칼럼 한 구절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공교육 현장에서조차 최소한의 교우관계와 사제관계가 사라지는 현상, 만혼과 비혼을 거쳐 이제는 연애조차 하지 않는 생물학적 고립, 어려울 때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회적 고립이 OECD 회원국 중 최고로 나타나는 현상,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찾기를 포기한 청년세대의 증가 등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이들의 좌절과 사회적 고립을 치유해야 한다. 여기에 실패한다면 우리도 미국처럼 부자 되어 이사 가는 방법밖에 없는 사회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표적 중산층 공간인 서현역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은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칼럼이 말해주듯 중산층의 공간조차 안전과 치안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논의해야하는 건 병리적인 사회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번 레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