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사회’ : 자꾸만 빨라지는 세상

‘가속사회’ : 자꾸만 빨라지는 세상

Alienation and Acceleration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79), 2023.3.22,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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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가속, 속도, 효율, 러닝머신, 불평

1.머리말
2.자꾸만 빨라지는 러닝머신
3.러닝머신이 만들어내는 소외
4.러닝머신 앞 ‘불평’하기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 12일 해외 언론과 BTS의 RM과의 인터뷰가 이슈가 되었는데요.(링크) ‘K팝과 한국 문화가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노력을 강요하는 거 아니냐’라는 외국인 기자의 질문에 그는 “70년 전만해도 아무것도 없던 나라”라며 “(지금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우리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혹독하게 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통상 서구권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인 ‘무한경쟁’ ‘빨리빨리 문화’ ‘혹독한 스트레스’ 등을 역으로 우리만의 훈장(“K프리미엄”)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한편 인터뷰를 둘러 싼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엔 갸웃해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2023년 버전 한강의 기적’을 자축하는 느낌이랄까요. ‘한강’은 기적을 이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fig.1> 1988년 제14회 서울발전상 사진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김연웅씨의 사진 '한강 풍경'(왼쪽) <피지컬100> 첫째 미션 '오래 매달리기'. 힘에 부쳐 떨어지는 순간 '탈락'입니다. 경향신문 DB, 넷플릭스

케이팝이라든지 한국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는 제자리에 있기 위해 죽도록 뛰어야 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엔 대폭 업그레이드 된 GPT4 발표에 이어 엑셀이나 PPT 제작 등 대부분의 사무실 일들을 척척 해내주는 MS의 ‘코파일럿Copilot’이 등장해 충격을 주기도 했고요. 빠르게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적응을 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최신 트렌드에 적응해야 하고, 이직 준비라든지 노후 준비도 미뤄둘 수 없습니다. 멈추는 순간 낭떠러지가 눈 앞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안정감이라든지 여유같은 건 찾아보기 힘든 삶이죠.

하지만 잠깐 멈춰서서 조금 새삼스럽게 느껴질만한 질문들을 던져봅니다. “이제까지처럼 트렌드를 쫓아가며 바쁘게 살면 되는 걸까?”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저 역시 읽어야 할 글들과 해야할 일 목록에 파묻혀 목만 ‘빼꼼’ 내민 채로 해찰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하르트무트 로자의 <소외와 가속>, 닐 포스트먼의 <불평할 의무>를 지팡이 삼았습니다.

【2.자꾸만 빨라지는 러닝머신】

200년 전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약 10~20일이 걸렸지만, 오늘날엔 3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20년 전엔 10mb짜리 파일을 하나 내려받는데 몇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핸드폰으로도 순식간에 다운받을 수 있죠. 어렸을 때 인터넷에서 예쁜 그림을 내려받고 싶어서 ‘저장’을 눌러두고 밥을 먹으러 달려갔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밥을 다 먹고 와도 끝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탁이나 보고서 쓰기, 편지 보내기 등 일상적인 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집니다. 이는 단지 삶을 조금 편리하고 빠르게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사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가는데요. 독일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가속’이라는 단어로 이런 변화들을 묶어냅니다.

하르트무트 로자가 쓴 <소외와 가속>은 제목에 핵심 주장이 담겨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가속’이며 이것이 ‘소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조금 알쏭달쏭하지만, 요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 아니며,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기술, 사회, 삶의 리듬이 우리를 되레 어질하고 시무룩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fig.2> 내려받는 데 막대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파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인터넷 노스탤지어'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던 이미지입니다 (왼쪽) 독일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가속'이라는 키워드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sase.org

우선 저자가 말하는 ‘가속’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는 가속을 ‘기술의 가속’, ‘사회 변화의 가속’, ‘생활 속도의 가속’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눕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교류 속도가 빨라졌고(‘기술의 가속’), 기술이 빨리 바뀌면서 사회도 빠르게 바뀌어 점차 더 과거의 기억이라든지 미래 예측이 정확성, 중요성을 잃게되고(사회 변화의 가속), 이와 함께 사회라는 ‘러닝머신’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 일상적인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생활 속도의 가속’)는 것이죠.

이중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생활 속도의 가속’인데요.

사실 과거 사람들은 미래에 기술이 발달하면 모두가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상상해왔습니다. 사람이 직접 한다면 10명이 10시간동안 힘들게 끙끙대야 끝나는 밭일을, 트랙터를 활용해서 1명이 1시간만에 끝내게 된다면 모두가 나머지 시간은 즐겁게 쉴 수 있을 거란 것이죠. 하지만 하르트무트 로자는 아주 의아해합니다. 효율이 좋은 트랙터가 개발이 되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죠.

이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도 같이 발전(?)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빨래가 수월해지면서 훨씬 더 많은 옷을 사서 자주 갈아입게 되고, 색깔이나 질감에 따라 달리 관리해아하고 위생에 대한 기준도 높아지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무실로 시선을 옮겨보자면 24시간 부담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메일, 메신저가 생기면서 편지와 전화, 전보 등만 있던 시절에 비해 훨씬 더 자주 메시지를 교환하게 된 것이죠. 심지어 휴가지에 가서도요.

이처럼 기술이 발전하지만 업무 강도와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현상을 ‘코완의 역설Cowan's Paradox’이라고 합니다.

이메일 기술이 우리의 시간 예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자[...]우리가 읽고 보내는 메시지가 2배로 많아진다면 매일 서신 교환에 드는 시간은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과 똑같다. 그러나 당신은 매일 40개나 50개, 심지어 70개의 이메일을 읽고 쓸지도 모른다. 소통 업무에 드는 시간이 인터넷 발명 전보다 더 많아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백 년 전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나중에 세탁기가 발명되었을 때에도 일어났다. 물론 우리가 이전과 같은 거리를 이동한다면, 그리고 이전과 같은 빈도로 빨래를 한다면 자유로운 시간 자원을 꽤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하르트무트 로자, <소외와 가속>(이하 동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기술이 발전했을 때 이전과 같은 수준에 만족할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옛날 사람들처럼 한 달에 한 번 옷을 갈아입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편지, 메시지와 더 많은 일들에 ‘사서 바쁘게 고생’하는 걸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단지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선은 모두가 더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죠. 제가 MS의 코파일럿을 쓴다면 옆집 바둑이도 쓸테고,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바둑이보다 제가 더 ‘유능’해져서 인정받기 위해선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저의 비교 대상은 코파일럿이 발명되기 이전의 김스피가 아니라, 같은 프로그램을 쓰는 바둑이입니다. 이 때문에 기술이 더 나아졌다고 해서, 제가 빨리 일을 끝내고 많이 놀 수 있는 세상은 절로 오지 않습니다.1)

<fig.3> 옛날 신문에 실린 세탁기 광고. 당시 많은 세탁기 광고들은 '버튼 하나면 끝' '개구장이도 뚝딱' 같은 단어를 쓰며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김덕호는 <세탁기의 배신>에서 오히려 세탁기가 가사노동을 가중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왼쪽) 정신없는 유능한 사람. 경향신문 DB, 게티이미지

또한 세계일주를 하는데는 이제 ‘40일’이 아닌 단 며칠이면 충분하고 어떤 정보에도 빠르게 접근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더 많은 ‘가능성’에 노출되고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한 선택지는 무한대에 가까워지며 따라서 더 큰 부채감에 시달립니다.

예를 들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기타를 수준급으로 배워서 밴드를 할 수도 있고, 전세계의 호텔들을 방문하고 사진을 남길 수도 있고, 집에 앉아서 베트남어에 통달할 수도 있고, 아침엔 태국의 해변에서 요가를 하고 저녁엔 서울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도 있고, 뉴스레터들을 잔뜩 읽고 상식을 쌓을 수도 있고, 취미로 윈드서핑을 할 수도 있고,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걸작 영화를 1000편 보고 블로그에 영화평을 남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온전히 ‘내 탓’이되는거니까요.

개인은 스스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늘어나고 과도해지는 사회적 요구의 목록이 자신을 빈틈없이 지배한다고도 느낀다[...]이제 정말 일하러 가야 해, 세금신고서를 작성 해야 해, 건강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돼, 외국어를 배워야 해,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를 즉시 업데이트해야 해, 뉴스를 놓치지 않아야 해...이런 목록은 끝이 없고, 종국에는 ‘느긋해지고 진정하려면, 좀 쉬려면 정말 무언가 해야 해’까지 이르게 된다[...]이런 규범은 죄있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압도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하루가 지나갈 때 우리는 기대들을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결코 ‘할 일 목록’을 다 처리할 수 없다. 이 목록은 매일 더 높이 쌓여간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요. 마침 제 앞에는 ‘할 일 목록’을 잔뜩 적어둔 메모지가 붙어있고요.

케네스 거겐은 이런 부채감에 대해 “(현대인들이) 매일매일 살면서 요구들의 바다에 익사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종류의 탄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어느정도 공감을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평소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해보지 못했었습니다만. 이 기회에 잠시 눈을 감고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끝없는 ‘할 일 목록’을 끝없이 갱신하고 체하듯 쫓아가는 것만이 답일까? (저 식탁에 잔뜩 쌓인 잡지, 신문 좀 봐!) 모든 새로운 소식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나도 뉴스레터를 쓰고 있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할 일 목록에(‘교양인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정보!’) 돌멩이를 하나 더 얹어주는 처사가 아닐까? 우리는 몹시 바쁘게 어제는 영어를 배우고 오늘은 GPT4을 배우고 내일은 내일의 신기술을 배우면 되는 걸까(배운다고 배워지는 걸까)? 언젠가 지쳐서 이 러닝머신에서 ‘자동탈락’ 될 때까지?...’

1)이 부분에선 '분배'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적게 일하고도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면 굳이 '더 빨리 더 많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테지만, 이로써 소득이 줄어든다면 남은 시간에 더 바쁘게 n잡을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3.러닝머신이 만들어내는 소외】

‘가속’ 사회에서 우리는 빠르게 맡은 일을 해치워두고 남은 시간 동안 많이 놀 수 있는 게 아니라, 더 많은 ‘할 일 목록’도 떠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이 때문에 스스로부터도 소외되어 “좋은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죠.

이 책에선 소외의 뜻을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의지로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하기를 원하지는 않음’이라는 정서”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누군가 저를 억지로 붙잡고 강제로 웃기는 강아지 유튜브 2시간을 보게 하진 않았지만, 과연 그게 내가 진정으로 하기 원했던 일인가?하는 점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 때 저는 유튜브를 본 경험으로부터 소외를 느꼈다고 볼 수 있는 거겠죠.

저자는 가속 사회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소외로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하는데요.(1.공간으로부터의 소외 2.사물로부터의 소외 3.자기 행위로부터의 소외 4.시간으로부터의 소외 5.자신, 타자로부터의 소외)

뭔가 어렵고 복잡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형을 예시와 함께 읽다보면 깜짝 놀랄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경험이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그간 인스피아에서 따로 각 회차로 다루었던 주제들도 많고요.2)

우선 ‘공간으로부터의 소외’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지에 갈 땐 그 도중에 한눈을 팔지 않고, 평소엔 디지털 공간에 주로 머무르게 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보금자리같은 공간이 자꾸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어릴 때 자주 돈 없이도 죽치고 앉아있던 동네 문방구가 떠올랐는데요. 여기서 간식을 먹고 오락을 구경하고 친구들을 기다리다보면 심심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런 따뜻한 장소와 반대로 아무런 교류, 기억도 없는 장소를 ‘비장소’라고 한다는데요. 누구나 쏜살같이 스쳐갈 뿐인 공항, 정류장 등입니다. 가속 사회에선 이런 비장소가 늘어나면서 사람들과의 교류는 점차 줄어들고 모두 외로움을 느끼게 되죠(‘자신, 타자로부터의 소외’).

<fig.4> 약 40년째 운영 중인 부산의 한 문구점의 모습. 이런 문구점은 요샌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왼쪽·링크) 일본의 신인 '츠쿠모가미(付喪神)'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깃든 영혼인데요. 어떤 물건을 함부로 버리면 츠쿠모가미가 화가 나서 장난을 친다는 설도 있고, 반대로 오늘날엔 영혼을 얻을만큼 어떤 물건들이 사람에게 쓰임받지 못하고 빨리 버려지기 때문에 츠쿠모가미가 깃들지 못한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림엔 스마트폰, 전화기, 컴퓨터 등도 보이네요. 경향신문, 하이문공방(링크)

‘사물로부터의 소외’는 쉽게 말해, “내 물건은 맞는데 왠지 내 마음에 친근하지 않아...”라는 쓸쓸한 마음입니다. 최신 핸드폰, 노트북일수록 내가 임의로 꾸밀 수 있는 부분은 점점 줄어드는데다가, 고장이 나도 내가 스스로 기계 뚜껑을 열어 고칠 수 없죠. 마치 블랙박스같이요.

점점 사람들은 전자기기를 친숙하게 다루지 못하게 되고, 그것에 별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죠. 어차피 ‘약정기간’이 끝나면 새 폰으로 바꾸는 편이 이득이니까요. 물건들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빠른 속도로 신기술, 신제품이 출시되는 가속 사회에선 이쪽이 ‘바람직한’ 소비자의 자세겠죠.

자동차나 휴대용 라디오나 양말이 다 닳거나 망가질 때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고 거꾸로 당신이 그것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그러나) 가속사회에서 사물은 수리되지 않는다[...]점점 스마트해지고 있지만 그것들과 나의 거리는 여지없이 멀어진다[...]사물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을 다루는 나는 점점 몽매해진다. 문화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잃게되는 것이다. 이는 혁신 때문에 기존 경험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현상으로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행위로부터의 소외’는 ‘시간으로부터의 소외’와도 연결이 되는데요.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핵심입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듯, 저는 자기 전에 ‘신묘한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추천된 유튜브를 두시간 동안 보다가 잠을 설쳤는데요. 분명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한만한 영상을 추천했고,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이를 눌러보았고 2시간 내내 영상을 봤습니다. 여기서 어떠한 강제도 없었지만 이 ‘행위’가 끝난 뒤 찝찝하고 화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서랍안에 넣어둔 채 초조하게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fig.5> 충성 고객 모집을 위해선 적당한 인간의 욕망과 '중독성'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르 이얄은 <훅hooked>에서 긍정적인 디자인의 예로 '메일을 전부 읽고 나면 만세 그림이 나오는 서비스'를 들기도 했는데요. 한편 이 task-성취감 로테이션 안에서, 과연 이 메일을 내가 다 정리해야 하는 거였나? 뭐가 가장 중요한 일인가? 하는 질문은 사라집니다(왼쪽)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서 멍 때리다보면 이런 영상들을 잔뜩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존, 인스타그램 갈무리

우리는 이럴 때 흔히 ‘의지 박약’이라며 한탄하고 부끄러워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가속 사회는 사람들이 인상적인 추억을 남길만한 ‘장기적인 경험’에 몰두할만한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할 일 목록에 치이는데 어떻게 자신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느긋하게 예술을 감상하거나 할까요? 그 시간에 차라리 ‘빠르고 간단한 소비’나 ‘유튜브 시청’으로 빠른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플랫폼의 목적은 ‘제가 멍하니 오래오래 쇼츠(shorts) 등의 영상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쇼츠 소비’가 ‘길게’ 이어지는 역설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남는 것도 없이요.

저는 아래 대목을 읽으면선 눈물(하품)로 베개를 적셔가며 유튜브를 보다가 퓨즈가 끊어지듯 잠에 빠져들곤하는 제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즉,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기를 원하는'일은 거의 안하고 그 대신 (물론 전혀 강제가 없이) 실제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이 새롭고 기이한 형태는 자가발전하는 경쟁 및 가속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속도의 명령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욕망의 장기적 발전(바이올린 연습)보다는 욕망의 단기적 실현(텔레비전 시청)을 추구하는 편이 낫다[...]이런 세계에서는 실제로 사용할 재화보다는 또 다른 '가능성'과 선택지를 구매하는 쪽으로 이끌린다[...]우리는 책, CD, DVD, 망원경, 피아노 등을 예전보다 많이 소유하지만 소화하지는 못한다.

다섯가지 소외의 유형은 얼핏 보기엔 제각기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가속’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보면 대체로 정리가 됩니다.

만약 길을 갈 때도, 물건을 가질 때도, 체험을 할 때도, 무언가 시간을 때우려 할 때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무언가를 할 땐 항상 다른 수많은 가능성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들이라면 - 정작 잔뜩 분주하고는 마음에 남는 경험이라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가속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한 경쟁에 시달릴 뿐 아니라 - 나를 둘러싼 물건이나 장소, 사람들, 시간, 심지어 ‘나’로부터도 소외당하며 “좋은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게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조차도 없는 상황이죠. 가속은 ‘좋은 거’니까요.

✏️

“...이와 똑같은 언짢은 소외 경험은 수백만명, 아니 수십억명의 인터넷 사용자가 겪는 일이므로 나의 개인적 허약함으로 치부하기 어렵다”-하르트무트 로자, <소외와 가속>

2)다섯가지 소외 유형 관련해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을만한 지난 레터들을 소개합니다. 해당 레터에서 소개된 책들을 참고삼아 더 해찰해보셔도 좋습니다. 1.공간으로부터의 소외(💌노키즈존:죽은 도시에서 아이 키우기) 2.사물로부터의 소외(💌아이폰을 고쳐 쓸 수 있을까:수리할 권리) 3&4.자기행위/시간으로부터의 소외(💌‘관심경제’에서 ‘우리’를 지키는 방법) 5.자신, 타자로부터의 소외(💌외로움 산업의 소비자:함께 외로운 사람들)

【4.러닝머신 앞 ‘불평’하기】

<소외와 가속> 책을 덮으면서는, 생각보다 정말 많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문제와 고민들이 ‘가속’이라는 키워드로 묶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하면 가속 사회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일단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실은 ‘러닝머신 전원 끄기’는 아닙니다. 그게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혼자서 ‘러닝머신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며 유유자적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회 전체에 대한 해답이 될 순 없을 것입니다.

하르트무트 로자는 이 책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해답’을 내놓진 않습니다. 대신 그는 이런 문제들을 우리 앞에 구불구불 펼쳐놓고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죠. “이것 보세요. 가속 문제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하죠? 앞으로 함께 고민해봅시다...”

저는 “그럼 뭘 해야 할까...” 궁리하다가, 닐 포스트먼의 <불평할 의무>(1988)를 꺼내들어보았습니다.

닐 포스트먼(1931~2003)은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이자 교육자로 생전에 ‘새로운 기술(TV)이 우리 삶에 가져올 변화’에 객관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온 사람인데요. 그는 모두가 신기술을 무조건 ‘좋은 거’라고 환영할 때, 만약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좋은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반대를 외쳐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죠.

<fig.6> <죽도록 즐기기>의 영어판 표지(왼쪽) TV 매체가 가져올 '경험'과 '사회'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주장해온 미디어비평가 닐 포스트먼의 모습. 펭귄북스, 게티이미지

<불평할 의무>의 영어 원제는 ‘양심적인 반발Conscientious objections’인데요. 저자에 따르면 여긴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우선 그 ‘반발’이 ‘징징거림’이 아닌 ‘의미있는 저항’이 되기 위해선 “독특하고도 빈틈없는 형식”을 지녀야한다는 의미고요. 이어 그 ‘반발’은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자신의 나라나 중요한 인간적 전통에 대한 의무감”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이 책에서 TV라는 깜짝 놀랄만한 신기술이 가져온 ‘변화’를 면밀히 살핍니다.

저자가 이 책(<불평할 의무>),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죽도록 즐기기>(1986)를 썼을 당시엔 누구나 칼라 TV, 새로운 형식의 뉴스쇼라는 ‘신기술’에 열광했습니다. 당시 정치인들은 긴 토론 대신 ‘30초 이미지 광고’로 어필했고, 방송국들은 앞다투어 과학 교육을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화려한 15분짜리 연속극을 만들기도 했죠.
사람들은 TV라는 흥미진진한 신기술을 통해 무조건 더 나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들 생각했습니다. 신기술은 진보의 결과이고, 진보는 옳으니까요.

하지만 닐 포스트먼은 여기에 대고 “NO!”를 외친 것입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불평할 의무>의 가장 첫 머리부터 등장하죠.

작가로 살기 제일 좋은 나라 두 곳을 꼽자면 미국과 러시아다. 둘 다 역동적인 제국의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실수를 저지르곤 하기 때문이다[...]작가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운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다. 마찬가지로 사회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운 작가가 제일 좋은 작가다.
-닐 포스트먼, <불평할 의무>(이하 동일)

포스트먼은 TV라는 새로운 매체가 집집마다 놓일 때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면밀히 살핍니다. 그에 따르면 TV는 단순히 책과 ‘다른 형태의 중립적인 매체’가 아니라, 아예 우리의 사고하고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도구죠. 이 때문에 물론 그는 “TV를 다 부수자!”라고 하진 않지만, 강도높게 그 폐해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의 문제는 전부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한 시간동안 뉴스 보도에 나오는 모든 말을 신문지 한 장에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한 페이지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매체가 움직이는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말만 하는 대가리들talking heads’, 즉 그저 카메라 앞에 나와서 말만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매일 저녁 뉴스라는 극장에서 공급되는 것은 결국 고도로 시각적이고, 몰역사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이런 위기인 셈이다[...]텔레비전 뉴스의 무정부주의는 방송의 상업적 구조로 인해 생긴 직접적인 결과다. 방송의 상업적 구조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하게 뉴스의 판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만 향하게 한다. 사람들이 계속 텔레비전을 보게 해야 한다는 불가항력의 필요 말이다.”

또한 그가 TV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은, TV의 형식이 ‘소외’를 불러오기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사람들이 TV를 통한 ‘분절되고 얕은 체험’에 집중하게 되면서 의미있고 깊이있는 사고와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적 풍조가 황폐화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문화가 감옥이 되는 오웰식이다. 두번째는 문화가 스트립쇼와 같이 저속해지는 헉슬리식이다.[...]“멋진 신세계에선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올더스 헉슬리)”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이런 종류의 ‘문제점’들은 2023년 시점에서 볼 땐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글이 쓰여진 것이 198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간다면, 느낌이 크게 달라집니다. 포스트먼은 모두가 ‘YES’를 외칠 때 외롭게 ‘NO’를 외쳤던 것이죠.

또한 만약 닐 포스트먼이 2023년을 살아간다면 TV 대신 무엇에 불평꾼 기질을 내세우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떠올려보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책을 ‘1980년대 TV비평’으로 읽는 것보다는, 그쪽이 저자의 의도에 맞게 이 책을 2023년에 읽는 방법이겠죠.

【5.맺음말】

오늘날 “좋은 삶”을 궁리한다고 할 땐, 그 사회의 바탕이 되는 기술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이를테면 물고기가 좋은 삶을 말하기 위해선 자신을 둘러싼 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듯이요.

빠른 속도는 우리의 삶에 편리함도 주었지만, 한편 피곤함과 소외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르트무트 로자와 닐 포스트먼의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 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어쩌면 “좋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던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대체로 신기술들은 “이게 바로 좋은 삶이예요!”라는 포장과 함께 출시되기도 하고요. 우리는 선물을 받는 사람처럼 신나서 신기술들을 쳐다보지만, 정작 경쟁으로 인해 탈진되고, 우울하고, 쓸쓸해하는 나의 마음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오늘 읽은 책(<소외와 가속>)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조금은 엉뚱하게도 - 하르트무트 로자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소외’ ‘비판이론’ 같은 무거워보이는 이야깃거리를 꺼내들면서 서문에서 함께 제기했던 질문입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저 역시 오늘 레터 서두에서 이 질문을 던져보았는데요. 어쩌면 이 질문이 새삼스럽게 들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이 질문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왔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기실 도서관에 잔뜩 쌓인 매우 어려워보이는 책들도, 사회 이론도, 궁리도, 기사도, 기술도, 우리의 일상의 수많은 발버둥과 노력들, 그리고 수많은 순간들도 결국은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멈춰 서서 닐 포스트먼처럼 ‘양심적인 불평’을 제기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졌다고 해서 제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산더미같은 할 일 목록’에서 자유로워지진 못할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도 느릿하게 해찰하는 삶을 지향하면서, “좋은 삶은 무엇일까?”라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연구자님들과 함께 품고 걸어가보려 합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하르트무트 로자, 김태희 옮김, 『소외와 가속』, 앨피, 2020.

-이 책의 부제는 '후기 근대 시간성 비판'입니다. 최근 한 연구자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읽어본 책인데요. 저의 최근 질문과 맞닿아있어, 바로 레터에서 함께 다루어보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엔 어려워보이는 책이지만 의외로 읽어내려가다보면 “오늘날 좋은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 아래 굉장히 명쾌하고 간결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에세이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문제'들이 하나로 묶이긴 어려울정도로 넓어보이기도 하는데, 한편 이처럼 산재한 문제들을 한 마디로 묶어내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편 제가 ‘빨리 감기’에 대해 다루었던 이전 레터(💌)의 맺음말에서 “어쩌면 이런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게 단순히 콘텐츠 업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었는데, 이 책이 마치 그 당시 막연한 '어쩌면'의 대답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닐 포스트먼, 손화철 옮김, 『불평할 의무』, 씨아이알, 2016.

닐 포스트먼, 홍윤선 옮김, 『죽도록 즐기기』, 굿인포메이션, 2020.

-오늘 레터에서 다룬 닐 포스트먼의 저작 두 권입니다. 이 두 책 모두 원작은 1980년대에 출간되었으며, <죽도록 즐기기>의 경우 닐 포스트먼의 사후 2006년에 아들 앤드류 포스트먼이 출간 20주년 후기를 덧붙여 개정판이 출간되었고 국내엔 리커버 개정판이 2020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의 이력 자체가 포스트먼이 당시 던진 메시지가 틱톡과 유튜브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방증이겠죠. 생전에 그가 스스로를 학자라기보다는 작가로 소개하길 좋아했던만큼, 그의 글은 호쾌하고 때론 유머러스합니다.

2023년의 저야 다소 느긋하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아래와 같은 대목을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비난에 시달렸는지, 또한 그런 스트레스마저도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강인한 태도로 이겨내며 ‘양심적 불평꾼’의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스웨덴의 텔레비전 상황에 대한 저의 평가가 틀렸다는 지적을 해주실거라면, 부드럽고 신중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에 나쁜 소식을 너무 많이 들으면 제 건강을 해치게 될지도 모릅니다.”-닐 포스트먼, <불평할 의무>

김덕호, 『세탁기의 배신』, 뿌리와이파리, 2020.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해봤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죠.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세탁기의 발명이 오히려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늘렸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술의 겉모습만 볼 게아니라, 어떤 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재배열하는지 얽힌 모습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저자가 미국에 체류하며 연구, 집필하여 책의 모든 사례가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현재 세탁기를 쓰고 있는 나라라면(!) 공통적으로 적용될만한 내용이라 흥미롭게 읽힙니다. 참신하고 풍부한 예시, 자료들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도 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기술 발전 앞 선택지는 두 갈래 뿐일까?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4700자

🖍글 속 한 문장

“<터미네이터2>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저항이 가능하며, 또 그리해야 한다고 말한다[...]나는 이 영화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라는 급진적인 이상, 그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라 코너의 화해와 다이슨의 윤리, T-800의 편위처럼, 그리고 존 코너의 연대처럼, 최소나 최대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최소와 최대의 허점을 동시에 공략하고 보완하는 절충적 개입의 형태를 띤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터미네이터2>를 지팡이 삼아 AI 등 기술 발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살아갈까?를 고민한 박승일(<기계, 권력, 사회> 저자)의 칼럼입니다. 친근한 영화를 통해 기술에 대처하는 자세를 살펴보는 다른 회차의 칼럼들도 추천합니다.

세탁기는 여성을 ‘해방’시켰는가?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3500자

🖍글 속 한 문장

“‘전기하인’이 단추 한 번만 누르면 ‘허드렛일’로부터 주부들을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가정적인 엄마들’이 집 안에서 편리함과 청결함을 만끽하는 이미지가 지면을 덮었다[...]전기세탁기가 힘든 빨래를 힘이 덜 들게 하고 과정을 좀 더 단순화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20세기가 지나면서 개인위생과 더불어 청결 기준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잠깐 소개한 <세탁기의 배신> 서평입니다. 흥미로운 책이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한번 직접 책을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선 꼭 '세탁기'가 아니더라도, 이런식으로 나의 삶을 모르는 사이에 바꾸어버린 도구가 또 있을까?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직업-실적-과제: 어디까지 쪼개질까?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1000자

🖍글 속 한 문장

이러한 변화는 일을 ‘직업’으로만 보는 대신 각각의 ‘과제’라는 요소로 나눠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높인다. 서스킨드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직업도 살펴보면 단순 반복업무와 판단이 필요한 비반복적인 업무들이 섞여 있다”며 “반복적인 업무는 기계가 쉽게 대체할 수 있고, 비반복적 업무과제 역시 상당부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대니얼 서스킨드의 강연 내용입니다. 사실 위에 인용한 ‘글 속 한문장’ 내용은 AI 발전과 관련해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인데요.

그럼에도이 글을 소개한 이유는 <소외와 가속>을 읽을 때 '인정투쟁(악셀 호네트)'의 장이 점차 '위치'에서 '실적'으로 옮겨가며 경쟁 강도가 한층 극심해진다는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위치'에서 '실적'으로 - 또 거기서 '과제'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단타’ 가속사회의 금융 리스크

NYT / 영문

🖍글 속 한 문장

"SVB 붕괴에 대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지난 목요일 단 몇시간 만에 약 420억 달러(예금의 1/4)가 대부분 디지털 수단을 통해 기관을 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은행 얘기가 아니다. 암호화폐의 빠른 상승과 하락에서 밈 주식의 기묘한 순간, 2010년 플래시 폭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금융의 디지털 가속화를 반영한다. 수년 동안 금융 규제의 가장자리에 잠복해 있던 질문이 있다. ‘시스템을 인간이 작업할 수 있는 속도로 다시 낮춰야 할까?’

👤김스피의 블라블라

에즈라 클라인의 지난 18일 오피니언 칼럼입니다. 사실 처음 '가속 사회'라는 키워드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 중 하나가, (아무래도 현재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SVB 파산 사태였는데요.(링크) 하르트무트 로자의 책에 금융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진 않지만, '가속'이라는 키워드로 이 사태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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