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을 준비하면서, 인스피아를 처음 준비하던 무렵을 곰곰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제 안에서 인스피아를 기획하고 또 써온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전제가 있습니다. ‘읽고 쓰는 것은 중요하다’는 거죠.

다만 저는 이 말에 대해 또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읽고 쓴다는 것은 단지 ‘중요한’ 것을 넘어서 ‘재밌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읽고 쓰는 것이 재밌기 위해서는 -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이 각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수많은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눈을 빙빙돌게 하고, 그렇다고 책을 읽자니 조금 주눅이 들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진을 쏙 빼놓는 시대에는요. 오늘날 재밌는 글을 읽기 위해선 우리를 둘러싼 콘텐츠 생태계가 어떤지를 알고, 또 그 안에서 어느정도 의식적으로 재미나고 좋은 텍스트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a.) “과연 요즘 사람들은 읽는 것을 싫어하는가?”

b.) “왜 책과 뉴스레터인가?”

c.)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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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예전부터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진짜 재밌는 글’은 (‘문해력 바보(?)’의 시대에도) 여전히 통한다고요.

저는 과거 언론사 SNS운영팀에 있으면서, SNS를 관리하기 위해 1년반정도 기사와 칼럼, 댓글들을 잔뜩 읽었는데요. 이때 신기한 건, 대체로 제가 속으로 ‘이건 진짜 재밌는 글이네!’라고 생각하면서 공유한 게시물은 실제로 꽤 호응을 많이 얻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중 역시 개인적으로 공유하면서 기억에 남는 글이라고 한다면, 유명한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링크)이었는데요. 2018년 당시 저는 추석 연휴 기간에 당직을 서며 졸린 눈으로 멍하게 이날 회사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읽고 있다가, 이 칼럼을 보고 눈이 번쩍 뜨여서 곧바로 공식 SNS에 공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연구자님들도 아시다시피 이 칼럼은 대히트를 기록했고요. 연휴 기간에 기사도 아닌 칼럼이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것도 드문 일이었는데, 흥미로운 건 댓글란에서 재밌는 ‘댓글놀이’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군가 악플을 달았는데(‘왜 교수란 사람이 비싼 밥 먹고 이런 헛소릴 하는 겁니까?’) 그 아래에는 “악플러란 무엇인가”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엔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독특한 게시물이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던 기자와 독자의 문답 코너(‘응접실’)를 갈무리해놓은 것에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며 열렬한 반응을 얻은 것이었죠.

공유된 글들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독자Q : 본지에서 연재중인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 의 저자가 미인이라면 내게 소개시켜 주오. 내가 미남 십만장자의 독자이외다.

기자A : 미남의 아들이라고 미남이라는 법은 아니겠습니다만 부잣집 도련님 심기를 상할까 저어되어 더 딴죽은 안 걸겠습니다. 그리고 저자이신 이무영 선생은 남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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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Q : 요새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만 보면 눈이 빠져라 보고나 있으니 무슨 꼴들인지요.

기자A : 남학생들이 눈이 빠져라 보고 있는 줄 어떻게 아셨는지 답변을 우선 부탁합니다. 대답해주시면 거기에 따라 재답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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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기자는 독자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재치있는 답변을 했고 ‘2023년, 글을 안읽는 시대의 문해력 바보 사람들’은 ‘100년 전의 고루한 종이신문 글’에 진심으로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렇다고 할 때 과연 사람들이 ‘글’을 안 읽는 건 과연 독자들만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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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읽을 수 있는(가독성), 읽을 가치가 있는(효용성), 읽는 재미(즐거움)가 있는’ 글을 좋아해왔습니다.

옛날 신문에는 오히려 오늘날에 비해 훨씬 더 쓸데없는 우스개도 많고 이런저런 읽을거리들이 많이 실려있었고요.

장도리를 그린 박순찬 화백은 과거 한 인터뷰(링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했죠.

Q. “시사 만화에 고양이(냥도리)가?”라는 반응인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A. 원래부터 시사만화가 마냥 진중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처음 시작은 귀족들만 즐기던 회화가 인쇄술 발전을 통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재미나게 권력을 풍자하는 속성을 갖고 있었죠. 50~60년대 신문에 실리던 시사 만화들을 보면 의외로 동물들도 많이 나오고 코믹한 유머들이 많아요. 다만 긴 군사독재시기를 겪는 과정 속, 시사 만화가 엄혹한 시기에 간접적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면서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굳어진 경향이 있죠.

‘뉴스레터’를 선택한 이유 역시 간단합니다.

뉴스레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진지하게 글을 읽을 준비가 된’ 독자가 있는 곳이니까요. 악기 연주로 비유하자면, 음악을 사랑하고 직접 연주회장에 와서 조용히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된 독자랄까요. 연주를 하는 사람이 아무리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열심히 준비를 했다고 해도 냄비를 두드리며 제각기 춤을 추는 데 여념이 없는 청중들만 있다면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가 없습니다.

2007년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진 바인가르텐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링크)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은 연주회를 열 때마다 수십만원짜리 티켓이 눈깜짝할새에 마감되는 인기 연주자였는데요. 그에게 남루한 옷을 입혀 출근 시간대 지하철역 앞에서 연주를 하게 한 것이죠. 1000여명의 사람이 그 앞을 무심하게 지나쳤고, 잠깐이라도 서서 연주를 들은 사람은 기껏해야 1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연주자’ 뿐 아니라 ‘듣는 사람’의 상황(태도)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깨우침을 주었고,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이탈리아의 시인 주세페 웅가레티는 한 에세이에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시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고요함과 몰두, 일종의 입문 의례를 전제로 한다. 소음 속에서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엄청나게 많고 서로 다른 텍스트들은 소음이다. 형태나 특성의 구별 없이 쌓아 놓은 일련의 뉴스들은, 마치 경제 지표들처럼, 정말로 중요한 뉴스의 확인을 방해한다. 만약 뉴스들 사이에 <비가 온다>는 표현이 있다면, 소나무 숲에 비가 내린다는 것이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제가 위에서 ‘좋은 글’의 중요성에 대해 길게 말했는데요.

하지만 만약 제가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싶었어도, 단지 기존 포털 뉴스창처럼 네이트판을 ‘복붙’한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끼어있어서 고작 한두명정도만 읽었다면 저는 지금까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스피아를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뉴스레터 플랫폼 서브스택Substack의 메인 화면에는 “위대한 독자와 필자를 위한 곳(The home for great writers and readers)”이라는 슬로건이 적혀있습니다.

그간 인스피아를 만들어온 것은 저 뿐 아니라, 이 글을 지금 이 순간 읽어주시는 연구자님들 모두라는 사실은 - 꾸밈 없는 말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독서는 ‘모르기 때문에 읽는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책은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읽지 않는 게 절대적으로 좋습니다. 저 역시 대부분은 모르기 때문에 그 책을 읽고 싶고, 지금까지 그렇게 읽어 왔습니다. 이것은 여행과 비슷합니다. ‘무지로부터 미지로’ 떠나는 여행입니다[...]많은 저자들과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모르기 때문에’ 그 책과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서는 ‘덮여 있던 것을 열어가는 행위’입니다. 이런 독서를 할 수 있다면 독서 오만에도 빠지지 않고 독서 싫증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쓰오카 세이고, <독서의 신>

저는 예전에 이 대목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는데요. 실제로 제가 옛날 문화부에 있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언론사 문화부에는 매주 수십권의 신간이 쏟아져들어옵니다. 그중 어떤 책을 골라서 읽고 서평을 쓰게 되는데요. 저는 어쩌다보니(?) 당시 유전학이라든지 정신의학, 지리학, 우주 등에 대한 벽돌책을 많이 맡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고요. 하지만 재밌게도, 항상 주눅들어서 책을 펼쳤지만 - 좋은 책들은 금세 저의 손을 붙잡아 내가 미처 몰랐던 세계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오히려 나중엔 제가 나서서 낯선 책을 고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상상치도 못했던 글들을 읽을 수 있어, 훨씬 더 재미 있었기 때문이죠.

이는 마치 익숙한 사람을 만나 익숙한 얘기를 하는 것과, 낯선 사람을 만나 낯선 이야기를 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대해서도 부담을 조금만 줄인다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작가나 세계를 ‘빼꼼’ 넘겨다 볼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잘 모르는 책을 거들떠본다고 해서 갑자기 손바닥이 표지에 달라붙거나 하지 않으니까, 딱히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중심 없음’의 읽기는 그야말로 해찰의 본의에 가장 맞는 읽기입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핵심 내용보다는, ‘내가 꽂힌 부분’에 가장 집중하는 해찰이죠.

‘그런 건 책을 너무 멋대로 읽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글이든 결국 이런 식으로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큰 인기를 얻었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는 저 역시 재밌게 읽은 책인데요.

조금 엉뚱한 차원에서 이 책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 책은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한 깐깐한 학자의 자서전(그리고 <자연에 이름 붙이기> 등)을 읽어낸 자기만의 ‘독서’ 과정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만의 간절한 욕망, 절박한 질문에 좀더 파고들며 어떤 글을 읽을 때 훨씬 더 자기만의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요.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그 모든 게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하는 그 질문.”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제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자서전을 직접 읽고 글을 썼다면, 당연히 완전히 다른 결의 글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누군가의 독서가 ‘틀렸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처럼 모두가 중심 없음의 책읽기를 할 때 책을 둘러싼 생태계는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대책 없음’의 책 읽기는, “그래서 뭐!”라는 다그침을 살짝 옆으로 치워두는 책읽기입니다.

우리는 통상 책 뿐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뭐!”라며 결론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해찰하는 책읽기는 어떤 명확한 결론보다도, 책을 읽으면서 곰곰 ‘어쩌면’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는 것을 추구합니다. 통상 우리는 기사를 쓰고 읽을 때 현실적인 무언가를 갈구하곤 하는데요. 하지만 ‘어쩌면’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넣고 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를 넘어서 먼 과거 혹은 다른 나라의 일을 가져와 차원을 점프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어쩌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볼 가능성이 커지고요.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이자 비평가인 C.S 루이스는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선 자리에서 ‘훅’ 하고 날아올라 색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 책들은 그 내용이 옳은 경우에는 우리에게 이미 어설프게 알던 진리를 줄 뿐이고, 틀린 경우에는 이미 중병 수준인 우리 과오를 가중시킬 뿐이다. 유일한 완화제는 우리 머릿속에 ‘역사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계속 쐬는 것인데, 그러려면 고서를 읽어야 한다 [...]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어느 한쪽이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둘이 똑같은 길로 잘못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C.S.루이스, <책 읽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