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31일, 수사기록을 보고받은 윤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 ”라며 격노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른바 ‘VIP 격노설’입니다. 같은 날 대통령실 번호(02-800)로 여러 차례 이종섭 전 장관에게 전화가 걸려 온 일도 확인됐습니다. (한겨레, MBC 보도)

지난해 8월 2일, 채 상병 사건이 경북경찰청으로 이첩되었습니다. 이날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사용하던 폰으로 여러 차례 사건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해외 출장 중이던 이 전 장관과 세 차례 통화를 했습니다. 이 통화 이후 박정훈 수사단장은 보직해임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후 윤 대통령 → 대통령실 국방비서관 → 국방부 법무관리관 → 경북경찰청 수사부장 순으로 통화가 이뤄진 뒤, 채 상병 사건 기록이 경북경찰청에서 회수되었습니다.

다음날인 3일, 국방부 검찰단은 집단항명 수괴 등의 혐의로 해병대수사단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 재검토를 시작했고, 같은 달 24일 재검토 결과를 경북경찰청에 이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성근 사단장 등 6명이 혐의자에서 제외됐습니다.

관련 책임자들이 회피하는 상황. 대통령은 이종섭 전 장관을 호주로 보내다가 반발에 부딪혔고,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임 사단장은 탄원서에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써 국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21일 열렸던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서 이 전 국방부 장관과 임성근 전 사단장은 증인 선서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증거가 채 상병 수사외압 의혹의 중심에 대통령실이 있다고 가리키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의 ‘격노’가 쏘아 올린 수사외압은 왜 문제가 될까요? <시사IN> 전혜원 기자가 ‘VIP 격노’가 무엇이 잘못된 건지 짚어봤습니다. 같은 매체에서 채 상병이 순직하던 날 동료들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기사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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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사건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지난 5월에는 가혹한 군기훈련(얼차려)으로 훈련병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매년 군대에서 80명~100명이 사망합니다. 언론에는 소수의 죽음만 보도되지만, 사실상 3일에 한 명씩 군인이 죽는 거죠. 사망한 군인의 평균 나이는 28세였습니다. 국방부가 밝힌 군 사망사고자의 사망 원인 1위는 자해사망(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으로, 전체 사망사고자의 70%가량을 차지합니다. 그 뒤로 교통사고, 임무 중 사고, 개인 안전사고 등이 이어집니다.

군 사망사건 건수는 10년 전과 비슷합니다.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언론 보도가 있을 때마다 사회가 이렇게나 분노하는데도, 왜 사망사건은 줄지 않을까요. 이번 파트가 쫓아갈 질문입니다. 군 사망사고가 줄려면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군사망규명위(군의문사위의 후신) 조사입니다. 군의문사위와 군사망규명위는 잘못된 군의 판단 바로잡는 기관인데요. 두 기관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린 사건만 967건에 달합니다. 진상규명은 군에서 발표한 사인이 사실과 다르거나, 또 다른 사망 원인이 밝혀지는 경우 등에 결정됩니다. 그러니 967건의 진상규명 결정은 967번의 초동수사 부실, 책임 회피, 왜곡의 가능성을 의미하죠.

이번에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는 군이 사망사건의 원인을 ‘개인 문제’로 돌려왔다고 지적합니다. 총 157건에 대해 군이 발표한 수사결과 요지와 진상규명 기관 조사를 비교한 결과, 군은 ‘군인을 잃은 조직의 문제’보다 ‘군인이 되기 이전의 배경’에서 사망 원인을 찾는 데 주력했다는 게 드러나요. ‘비만형 허약 체질’, ‘내성적 성격’, ‘업무 미숙’, ‘가족 문제’ 같은 게 군이 말하는 대표적 사망 원인입니다. 실제로 군 수사결과 요지에서는 사망 원인으로 개인적 사유만 거론한 경우가 대다수였어요. 그러나 군사망규명위 조사 결과는 군의 설명과 정반대였습니다. 전체의 98.1%가 병영 부조리 또는 군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주된 요인이었거나, 그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확인됐죠.

군 사망사건을 은폐하고, 개인 탓으로 돌리는 한 사망사건을 초래하는 군 내 부조리는 해결될 수 없겠죠. 그나마 군의 왜곡을 뒤늦게라도 바로잡았던 군사망규명위는 윤 정부가 폐지 방침을 밝히면서 지난해 9월부로 활동을 종료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군 사망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기관이 국방부 조사단과 인권위 정도밖에 없어요. 그런데 국방부 조사단은 외부 기관이 아니라는 한계가 명확하고, 인권위는 반인권적 행보를 걷는 일부 상임위원으로 인해 내홍을 겪는 중입니다. 반복되는 비극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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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예비역이 윤석열 정부와 여당 국민의힘에 집단으로 항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채 해병의 죽음은 다른 병사의 죽음과 자못 다릅니다. 분노의 표면에는 정권이 억울한 죽음을 밝힐 기회를 뭉개고 책임을 물을 기회는 박탈한다는 불의가 있습니다. 근원에는 배신감이 있습니다. ‘보수 정권’이 어떻게 군인의 명예와 권익을 저버리느냐는 거죠. 오프닝에서 나온 정원철 회장의 말처럼, 가장 보수일 것 같은 해병대가 ‘보수’로 불리는 국민의힘과 척을 진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보수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한국 보수는 한마디로 군대는 좋아하는데 군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국 보수는 반공주의를 핵심 논리로 삼아 권력을 쥐고 성장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그 이념인 사회주의를 막아야 할 적으로 규정한 뒤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어 안보를 강조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군대는 ‘보수 정권’과 긴밀한 존재가 됐습니다. 동시에 한국 보수는 북한을 막는 게 우선이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반공주의와 국가에 무조건 충성하고 명령에 잘 따를 것을 강요하며 사회를 병영처럼 조직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폭력으로 다스렸죠. 보수 정권에서 군인은 예우받았지만, 그 대상은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 권력을 찬탈한 상층 군인뿐이었습니다.

반공주의 이야기가 쌍팔년도 군사독재 시절 옛날 일로 느껴지시겠지만, 한국 보수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논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정부 또한 반공주의 논리를 계승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임 전 사단장은 부하에게 위험한 지시를 억지로 내리고, 결국 채 해병이 사망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그런 사단장을 보호했다고 의심받고 있습니다. 예비역은 보수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 보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본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보수’란 개념을 처음 만든 사람은 1700년대 말 영국에서 활동한 에드먼드 버크란 인물입니다. 그는 보수가 전통을 중시하고, 변화할 때는 신중하면서도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번 폴라리스에서는 사회 변화에 맞춰 ‘자유’를 이해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합니다. 민주화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게 된 현실에 맞춰, ‘자유’를 북한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로 바꿔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취지를 담은 윤석만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글을 읽을 기사로 선정했습니다.

보수가 변화할 수 있을지 회의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보수 정치가 변화에 실패한 역사를 분석한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칼럼이나 ‘한국 보수’엔 지켜야 할 바람직한 전통이 없었다고 논평하는 이종태 <시사IN> 기자의 글도 읽을 만합니다. 다만 역사는 변화를 받아들인 보수가 도태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총선에서 대패한 한국 보수 세력, 혹은 ‘참칭 보수’ 세력이 채 해병 사건으로 갈림길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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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존 스타인벡(1902~1968),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 중.

김승욱 옮김, 민음사, 2008

약 다섯 달 만에 에디터 레터를 씁니다. 그사이 저는 한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언론사에 기자로 취직하기를 꿈꿨지만 아쉽게도 다른 회사입니다. 매일 좋은 기사를 찾는 삶을 그만두니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지고 시각이 얄팍해진 느낌입니다. 그래도 폴라리스 독자 여러분께 질 좋은 레터를 드리고자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채 해병 특검법’이 모든 언론을 달군 최근 며칠 동안 저는 출퇴근길에 한 노래만 들었습니다. 크라잉넛이 쓴 <말 달리자>입니다. 제 나이와 별 차이가 없는 낡은 노래입니다. 난데없이 왜 옛 노래에 꽂혔나 생각해 보니, 불만이 크게 쌓였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 달리자>는 무지막지하게 시끄럽고 거칠며 돌진하는 노래입니다.

저는 채 해병을 죽게 한 책임이 있는 해병대 수뇌부와 은폐를 시도한 윤석열 정부에 실망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명령은 평시 상황에서 내리면 안 됩니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하면 기꺼이 죽어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37년 전 현행 헌법을 만들며 인간 존엄을 규정한 이후, 한국 사회는 사회 어디서든 개인의 존엄을 보장해야 한다는 공감을 형성해 왔습니다. 해병대 수뇌부는 이를 역행했습니다.

저는 현 정부가 죽음 앞에 무심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물에 잠긴 관악구 반지하 주택과 오송 지하차도에서,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골목에서, 분신한 두 노동자 앞에서요. 12사단에서 훈련을 받다 사망한 훈련병의 영결식을 치른 날,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 훈련병이나 채 해병은 언급하지 않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는 채 해병 사건 수사에 압력을 넣으려 했다고 의심받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얄팍해졌다고 느끼지만, 저는 윤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정부에 한 인간의 고통에 공감할 역량과 의지가 남아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보수는 이번 사건으로 군대는 좋아하지만 군인에는 관심이 없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지지층에 배신감만 안겨주었습니다. 인간 앞에 예의를 지킬 의지가 없는 정부를 보며 분노의 포도가 익고 있습니다.

제게는 남다른 사건이었습니다. 해병대에 복무하지 않았고 채 해병과 동료 병사처럼 가혹한 환경을 겪지도 않았지만, 공군에서 2년간 복무하며 상사로부터 힐난과 질책을 얼마간 홀로 받아낸 경험이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순직한 채 해병에게 명복을 빌고 그의 가족과 친지에게 안녕을 바라며 레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