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해의 반이 거의 갔습니다. 직장인의 상반기 마무리, 자영업자의 월말, 학생의 학기말입니다. 자영업자인지 프리랜서인지 헷갈리는 저는 여전히 하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나요?
2. 요 며칠 동안은 모처럼 원고 마감이 없었습니다. 원고 작성과 마감은 제 일의 일부(체감상 40% 이하)라 원고가 없어도 일은 계속 있습니다만, 원고 마감일이 없는 날에 조금 느슨해지긴 합니다. 변두리에 살면서 '허 오늘은 납품 마감이 없구먼' 이라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는 납품 자영업자의 모습을 떠올려주시면 됩니다.
3. 구독자 역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디서 보고 오셨는지
말씀이라도 해 주신다면 참 도움이 되겠지만 여러분 입장에서도 귀찮은 일이겠죠. 저는 각종 답글이나 의견을 한 번도 남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침묵만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그래도 밤하늘에 분무기를 뿌리는 마음으로 뉴스레터를 적고 메일을 보내다 보면 '누가 받아 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나'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심심하실 때 한번씩
의견 보내기로 들어가셔서 저에게 이런저런 말씀 해주시면 저의 자영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5. 납품 아니 마감 일정이 잠깐 없는 덕에 이런저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라봐야 책읽기나 세탁기 돌리기나 저의 낡은 물건들을 고칠 때 쓰는 낡은 부품 구하기 정도입니다. 적고 나니 셋 다 저에게 중요한 일이긴 하군요.
6. 마침 저의 일들이 한소끔 가라앉을 때쯤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습니다. 저는 1986년작
<탑건>을 몇 년 전(1990년대가 아니라) 극장에서 보고 아주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제 일 때문에 더 즐겁기도 했습니다.
7. 제가 생각하는 제 직업은 글쓰는 일이 아닙니다. 원고 작성은 제가 하는 일의 일부일 뿐, 제가 생각하는 제 일은 '각 분야 전문 인력과 함께 정지화면 상태의 페이지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 간단히 말하면 페이지를 채워 뭔가 전하는 일입니다. 글은 페이지를 채우는 방법 중의 일부고, 마침 저는 그걸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림이나 디자인을 잘 했다면 다른 방법으로 페이지를 채웠겠죠.
8. 때문에 저는 사진가와의 작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지 화면 페이지를 채우는 방법 중에서도 저는 사진가와 팀을 맞춰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게 제가 잡지 에디터라는 일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9. 그리 생각하다 보니 헐리웃 영화는 장르와 완성도를 떠나 압도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탑건> 역시 그랬습니다.
첫 장면부터 '아니 대체 항공모함은 어떻게 섭외하는 거야. 저 비행기가 뜨는 걸 찍는데 실수를 하면 재촬영 옵션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재촬영 옵션이 있으면 기름값은 누가 내는 거야'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생각만 해도 괜히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낄낄거리며 영화를 보게 됩니다.
10. 그래서 <탑건:매버릭>을 보러 가려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탑건과 달리 이 영화는 개봉한 곳도 많지 않은데 곧 상영이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 평소에 잘 가지 않는 동네에 신발끈을 매고 가서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11. 1978년작
<디어 헌터>입니다. 최근 한국에 감독판이 개봉했습니다.
12. <디어 헌터>와 <탑건>의 공통점을 찾는 건 억지같은 일이지만 둘의 공통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미군이 등장하는 미국 영화라는 점입니다.
13. <탑건:매버릭>에 나오는 미군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영화 속 톱 클래스 파일럿들은 전화번호부만한 두께의 F-18 전투기 매뉴얼을 달달 외우고, 몸을 바위처럼 누르는 중력가속도를 견디고, 웃통을 벗으면 아베크롬비 모델같은 모습이 됩니다. 아베크롬비 모델 룩으로 비치 풋볼을 즐기는 장면을 보니 제 왼손에 들려 있던 5000원짜리 팝콘 라지가 새삼 한심해 보였습니다.
14. <디어 헌터>에 나오는 미군들은 다릅니다. 이들은 피츠버그 근교 소도시 클레어턴에 살고 있는 철강회사 근로자들이고 오랜 동네 친구들이며 우크라이나께 이민자 미국인입니다. 친구들의 소도시 생활은 늘 비슷합니다. 주중엔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시간을 내서 사슴 사냥을 가고 그러는 동안 내내 남자들끼리 장난을 칩니다. 그 무리 중 셋이 베트남전 징집을 받아 미군이 됩니다.
15. 올해 개봉한 <디어 헌터> 감독판은 영화 주인공들의 고향 생활을 길게 편집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과 영문도 모른 채 전쟁에 나가야 하는 일반 병사의 운명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일반 병사에 가까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에 더 몰입합니다.
17. <디어 헌터>는 대표적인 반전 영화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리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영화를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놓였을 때의 일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습니다.
17. <디어 헌터>는 워낙 유명한 영화라(저는 영화를 잘 안 봐서 모르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다더군요)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안 보신 분들은 이참에 보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18.
<디어 헌터>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국가의 전쟁과 청년들의 모험이 끝난 후 고향의 청년들이 그때 그 술집에 다시 모입니다. 그들은 둘러앉아 조용히 '갓 블레스 아메리카' 를 부릅니다. 영화 내용상 이 상황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건 대단한 역설입니다. 그러나 그 역설이 이 장면에 더없이 기묘하고 슬프고 아름답게 스며듭니다.
19. <디어 헌터>를 다 보고 몇년 전 선물받았다 읽지 못했던 그 책을 읽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다른 곳에 있어서 문을 닫기 직전의 서점에 가서 책을 샀습니다. 이렇게라도 책이 한권 더 팔리면 좋은 일이니까요.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