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용 독서’의 끝판왕 [10월의김스피]

인스피아 2024년 10월 마지막주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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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사람 : 김스피

받는 사람 : 연구자님

‘과시용 독서’의 끝판왕

[10월의 김스피]

24일 단풍이 든 정동길을 지나가던 시민이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 ⓒ경향신문

>10월 레터의 비하인드 : ‘과시용 독서’의 끝판왕

>10월의 해찰 피드 : #기초 #쓰레기_오비추어리

>10월의 김스피 책장 : 작은 책꽂이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10월 마지막주 편지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서, 홀쭉해진 달력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2024년도 어언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2024년 새해 편지를 보내드렸던 것 같은데 벌써 2025년을 바라보고 있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슬슬 문구점에서도 내년도 다이어리들을 진열해놓고 판매하기 시작했고요.

저는 지난주가 휴재였던 김에 그간 상대적으로 많이 읽진 못했던 소설들을 읽으며 보냈는데요. 날이 선선해서 바깥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어 기뻤습니다. 느리게 날아다니는 모기에 좀 물리긴 했지만요.

연구자님들께선 10월 한달 무엇을 하고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10월 첫째주 편지에서는 텍스트힙(text-hip)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고요.(💌‘텍스트힙’은 나쁜가? : 텍스트힙은 트렌드가 아니라 전통이다) 셋째주 편지에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문학에 대해 해찰해보았습니다(💌노벨문학상: 세상에서 제일 ‘낯선’ 세계문학을 읽는다는 것)

원래 인스피아에서는 반드시 ‘시의적’인 주제만을 다루진 않겠다고 생각하고 주로 그때그때 제 관심이 가는 주제를 다루어왔는데요. 돌아보니 10월 한달은 어쩌다보니 굉장히 시의적인 이야깃거리들로 채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노벨문학상 소식 이후 한강 작가의 책이 날개돋친듯 팔려나가며 제가 첫주 레터(텍스트힙)를 쓸 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풍경이 벌어졌는데요. 심지어 최근까지도 ‘과시용 독서’라는 단어가 실시간 트윗에 오르는 등 큰 이슈가 되기도 했을 정도죠.

지난 19일 SNL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 MZ세대의 독서모임, 공공장소에서 책 읽기, 인스타 독서 인증 트렌드 등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꽁트를 공개했습니다. (왼쪽) 이에 대한 반발로 최근 '과시용 독서'를 긍정하는 물결이 X(트위터)를 중심으로 일기도 했는데요. 많은 출판사들이 공식 계정에서 '과시용 독서'를 위한 벽돌책들을 앞다투어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 쿠팡플레이, X 갈무리

텍스트힙만큼이나 독특한 단어인 ‘과시용 독서’를 두고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로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과시용 독서’라도 ‘독서를 안하는 것보단 낫다’고 말했는데요. 저도 대체로 비슷한 입장이긴 합니다만, 조금은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왜 어떤 과시용 독서는 결과적으로 과시가 아니게 되어버리는가”에 대해섭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시용 독서로 시작한 사람도 ‘찐’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올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죠.

근래 관련해서 생각해볼만한 책을 한 권 읽었기에, 오늘 에세이 편지에선 과시용 독서의 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0월 레터의 비하인드 : ‘과시용 독서’의 끝판왕

만약, 대학 중퇴 후 몇 년 간 집에만 틀어박힌 채 삶의 즐거움 없이 시무룩하게 지내던 일본의 한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청년이, 혼자 힘으로 루마니아어를 마스터하고 그곳에서 동료들을 잔뜩 사귀고 직접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루마니아에서 소설가로 멋지게 데뷔했다면 어떨까요?

마치 ‘짱센 주인공’을 내세우는 웹소설의 대단한 설정 같기도 한데요(‘일본에선 히키코모리였던 내가 루마니아에선 유명 소설가?’).

의외로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당사자인 사이토 뎃초가 직접 쓴 그의 자전적 에세이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에 나오는 이야기죠.

최근 저는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이 책을 오늘 편지에 가져와본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저자야말로 “그야말로 과시용 독서의 끝판왕을 보여주는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상하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요.

앞서 말했듯, 저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측면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1.과시용 독서 : ‘텍스트힙’의 끝판왕
2.과시용이 진심이 되는 힘 : 선물같은 헌신들

우선, 이 책의 핵심 키워드라고 한다면 역시 ‘텍스트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책의 소개문엔 ‘힙키코모리(힙+히키코모리)’라는 재밌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죠.

저자는 무려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요.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라면 저자가 원래 어렸을 때부터 소설이나 시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진지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인생의 고뇌를 탐구, 파악하기 위해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처럼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가 언어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체로 ‘과시용’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그 계기들을 책에서 털어놓죠.

* 중고등학생 시절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소설로 예를 들면, 주변에서는 라이트노벨을 읽는데 나쓰메 소세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는 나, 대박 멋있다. 영화로 치면, 주변에서는 할리우드나 일본의 오락 영화를 보는데, 장뤼크고다르를 보는 나, 완전 힙하다…이런 자의식과잉은 결국 바보 취급을 받는다 […] 그래도 나는 이런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자신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도 좋다고 본다. 이런 자의식을 사춘기의 방황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인생의 미학으로 키워가는 놈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나는 이런 독아론, 즉 하나뿐인 자기 자신을 끝끝내 파고들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나르시시즘에 인생을 걸었다. 그건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어에 인생을 거는 것이기도 했다.

* 아무도 루마니아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마이너한 언어를 배우려는 나, 완전 힙해…

-사이토 뎃초,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이하 동일)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너무 솔직하게 과시적(?)이라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이어 그는 자신이 처음 ‘시’와 만난 계기가, 바로 중학교 1학년 때 <블리치>라는 만화를 통해서였다고 하는데요. 이 만화의 권두에는 멋진 시들이 실려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블리치 세대의 시인’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하죠.

사이토 뎃초가 쓴 책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책 표지 (왼쪽·링크) 2001~2016년 일본에서 연재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소년 만화 <블리치>(구보 다이토). 저자는 해당 만화의 권두에 실린 '시'들을 보고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 북하우스, 점프코믹스

<블리치>가 내뿜는 멋짐에 완전 녹다운되었다. 이야기도 작화도 멋진 것은 당연하고, 단행본 서두에 늘 멋진 시가 실리는데 인상 깊은 것이 많았다. 내가 시와 접한 경험은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다니카와 슌타로나 데라야마 슈지보다 <블리치>가 먼저였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작품, 연재 당시에는 ‘오사레*’라는 인터넷 용어를 쓰며 대놓고 욕을 먹었다. 삐뚤어지게 살았던 중학생인 나도 덩달아 무시했다. 그래도 나는 사실 그런 멋짐에 끌렸다 [...] 이렇게 보면 나는 <블리치>와 구보 다이토에게 대단히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게 정말 자랑스럽다 […] 나를 ‘블리치 세대’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정도다.
*오사레 = 단순히 세련된(오샤레, おしゃれ) 의미가 아니라, 창작자 본인은 멋지다고 생각했겠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과해서 딱하다는 뉘앙스

이런 솔직함은 꽤 흥미로웠는데요. 보통은 어디까지나 과시용 독서에 머무르는 사람이든, 학자든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이 어떤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말하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처음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요?

실은 저도 학창시절 도서관에서 어떤 작가의 이름이 제일 멋지기 때문에 골라서 읽기도 했었습니다(이왕이면 작가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 어려울수록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가 ‘다소 가벼워보이는’ 과시욕구로 시작했더라도 - 계속 관련된 역사, 문학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결국 루마니아어와 루마니아라는 나라에 푹 빠져들어, SNS를 통해서 수많은 친구, 문학 동료들을 사귀고 이윽고 직접 루마니아어로 소설까지 쓰기 시작했다는 거죠.

거기서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요.

2. 이어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과시용 독서가 진심이 되는 힘’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섭니다.

실은 우리는 삶에서 꼭 독서 뿐 아니라 수많은 과시용 취미, 우아한 소일거리, 뽐낼거리들을 어슬렁대며 살펴보곤 합니다. 그렇게 취미용품 산업의 소비자로서 이런저런 경제적 기여를 하게 되죠. 하지만 대체로 그 중 ‘과시용 취미’로 시작한 것이 실제로 삶을 바꿀 정도의 무언가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물론 독서 역시 ‘과시용 독서’가 무조건 ‘진지한(?) 독서’로 이어지리란 법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은 과시용 책을 사두고도 앞의 몇장만 넘겨보다가 침을 흘리거나 베개로 쓰기로 결정합니다. 멋져보여서 사둔 책들이 책꽂이에서 오랫동안 먼지만 먹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과시용 독서가 실제로, 상상 이상의 파장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수 년간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있던 히키코모리를 언어 마스터, 소설가로 만들 정도로요.

이 책에서 특별하게 강조되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 책에서 저자가 ‘과시용’의 세계에서 ‘진지한 루마니아어 예술(문학,영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포인트에 주목했습니다.

[루마니아어로 된 ‘쫌 멋진’ 영화] 죠.

저자는 히키코모리 시절 우울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요. 결정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 일차적인 계기는 영화를 보고 그것의 평을 개인 블로그에 꾸준히 올리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심연에 있었다. 돈 없고 직업 없고 친구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 그때 나를 매료한 대상은, 남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기가 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에 영화 이야기를 마구마구 써대는 재야의 시네필들이었다. 온라인 세상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니 일본에 공개되지 않은 영화에 관해서도 글을 쓰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구작이나 신작이라는 구분도 없고, 국경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글을 게걸스럽게 읽었고, 수십편이 넘는 작품을 감상하다가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때 저자는 방에 틀어박혀 국적이나 언어, 장르 등을 불문하고 ‘좋은 영화’를 게걸스럽게 보다가 우연히 한 영화에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루마니아어의 동사 변화를 절묘하게 예술적으로 활용한 루마니아의 예술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그가 ‘루마니아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죠.

딱 한편,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작품은 말하고 싶다.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의 루마니아 영화 <경찰, 형용사Polițist, adjectiv>다. 내 뇌를 루마니아어 사전으로 후려치고 반강제로 루마니아 문단으로 끌고 간 대단한 은인이다 [...] 루마니아어를 배우게 된 계기로서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언어, 바로 루마니아어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 이를테면 유튜브에서 흘러나온 왕년의 명곡을 듣더니 루마니아어 수사법을 토론하기 시작하거나 주인공이 연인과 말다툼하는데 왜 그러나 지켜보면 정관사를 잘못 쓴 게 원인이다. 즉 언어학적 통찰, 그것도 보편성보다는 루마니아어의 독특함을 둘러싼 통찰이 풍부하다 [...] 루마니아어 뿐 아니라 이 정도로 언어를 사색한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 없다 [...] 돌이켜보면 지적 호기심은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가스등과 같았다.

이후 저자는 영화 뿐 아니라 루마니아 작가들이 쓴 소설, 양질의 글들을 읽으며 ‘뭔가를 해보자’는 에너지를 얻고 직접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기에 이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좋은 작품’이 품고 있는 진정성, 고집, 바보스러운 헌신이 반드시 사람들에게 ‘미지의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령 그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도요.

오늘날 생성형 AI가 ‘뚝딱’하면 줄글과 수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에도, 여전히 바보스러울만큼 자신의 진심과 전력을 담아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고집쟁이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저는 퇴고 작업 자체를 너무 좋아해서(!) 자신이 쓰는 글을 최소 60~80번 이상은 두고두고 퇴고한다는 나이든 시인의 에세이(링크)를 읽고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런 작품이 단순히 ‘메시지’로만 - 스위치를 누르면 펀치가 나가는 장난감처럼 직선적인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내 앞의 작품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지 못해도 왠지 모르게 좀 눈물이 나고, 곰곰 쳐다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내 인생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왠지 모르게 살아갈 힘이 나기도 하고 그런 것이죠.

저는 사이토 뎃초가 훌륭한 영화와 작품들을 감상하며 불가사의하게도 점차 ‘뭐든 할’ 힘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읽으며,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사이토 뎃초가 '삶을 바꾼 한 편의 영화'로 꼽은 <경찰, 형용사>의 포스터 (왼쪽)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을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에서 바베트가 차려낸 호화로운 만찬을 맛보는 동네 노인들의 모습. 처음엔 '낯선' 음식들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점차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 Wikipedia, 영화 갈무리

이자크 디네센이 쓴 <바베트의 만찬>은 이런 ‘예술가의 바보스러운 헌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그저 값 없이 나누어 주는지에 대한 이야긴데요.

이 작품에서 바베트라는 고급 식당 주방장 출신의 프랑스 여성은 유혈 혁명으로부터 노르웨이로 피신해 한 청교도 목사 가정에서 주방 일을 돕게되는데요.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마른 빵’만 먹고 삶의 즐거움과 동떨어져 지내는 동네였죠. 어느날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는 막대한 당첨금을 얻게 되고, 그 당첨금을 고스란히 동네사람들을 초대한 성대한 ‘만찬’에 쏟아붓습니다.1)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값비싼 식재료, 솜씨를 아낌없이 전력으로 베풀어 만찬 탁자엔 그야말로 ‘예술’이 펼쳐지죠.

처음에 동네 사람들은, 난생 처음보는 호화롭고 낯선 음식들을 찡그리며 쳐다봅니다. 하지만 일단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하자 평생을 냉정하고 무뚝뚝하게 살아온 노인들 사이에 깜짝 놀랄만큼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한때 서로를 욕했던 두 늙은 여인은 앙숙 같은 사이가 되기 훨씬 이전, 둘이 함께 견진성사를 준비하며 손을 맞잡고 끝도 없이 노래 부르며 베를레보그 거리를 돌아다니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고.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그래요. 형제님.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해요.”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이 작품에서 바베트는 그저 자신의 작품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예술가’를 상징하는데요.

저는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서, ‘아무런 안목도 없는 사람들, 어리둥절한 채 입에 일단 음식을 넣은 노인들조차 만찬을 먹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이 작품에서 바베트가 차려낸 만찬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고 경악한 사람은 마을 바깥에서 온 장교 뿐이죠(충분한 감식안, 교양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 하지만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이 뭔지 모르고 그저 최고의 만찬을 입에 넣은 동네 노인들(취향도, 교양이나 감식안도 없고, 식대를 지불하지도 않은 일반인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도> 마음에 뜨거운 불씨를 안게 되고 - 세상의 자잘한 분노와 증오, 욕심을 잊고 풍요로움을 한껏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영혼, 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만찬을 통해서요.

저는 좋은 작품을 읽다가 가슴이 벅차서 잠깐 가슴 위로 책을 덮어놓을 때마다 <바베트의 만찬> 속 부산을 떠는 노인들의 장면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만찬’에 초대받은 것은 비단 진지한 손님 뿐 아니라, 과시용 독서의 문외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를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자가 가장 우울하고 외로웠던 시절, ‘좋은 작품’들을 찾아 보는 대신 - 같은 시간에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부유하며 혐오성 글들, 단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증오를 조장하는 글, 양산형으로 쌓여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자극적인 영상들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분노하고 악플을 다는 방식으로만 열심히 세상과 ‘소통’했다면, 뭔가 재미난 것을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고요.2)

한강의 소설과 커뮤니티의 자극적인 썰, 영화 <기생충>과 양산형 AI 쇼츠, 바베트의 만찬과 인스턴트 라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게 “엘리트주의”라고 누군가 제게 다그친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3)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트주의는 모르겠고, 일단 작품 속 '바보스러운 고집과 헌신'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요.

그리고 그 바보스런 헌신이 때로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꾸거나, 혹은 그냥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요.

1) <바베트의 만찬>은 과거 '지루함과 여가'에 대해 다루었던 뉴스레터에서도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링크).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손님들의 '즐거움'보다도, 만찬이 끝난 뒤 산더미같은 냄비들 사이에 지친 채 홀로 앉아있던 바베트의 모습이 신경이 쓰였었는데요. 바베트는 만찬으로 돈을 벌기는 커녕 막대한 당첨금을 죄다 써버렸음에도 '오직 나를 위하여 요리를 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만든' 바베트의 만찬은 '선물'이 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2) 레터의 분량상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의 내용을 아주 자세히 다루진 못했는데요.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루마니아에 '지인'이라든지 '연줄' '유학/방문 경험'이 전혀 없이 [오로지] 페이스북 등 SNS만으로 루마니아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투고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 루마니아의 문학평론가는 그를 두고 '실체 없는 유령("관절이 분리된 인터넷 밈") 아니냐'며 의문을 품기까지 하죠)

이런 일까지 가능하도록 할 정도로 인터넷은 분명 '도구'로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건 단지 멍하니 커뮤니티, 쇼츠 등을 보는 걸 통해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 바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고요.

3) 최근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생태계 등에서의 '이미지, 글의 과잉'이 문제라고 할 때, 어쩌면 [진짜 문제]는 과잉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가 정말로 사랑할만한 작품, 의미있는 글을 만나는 [좋은 경험]이 줄어든다는 점이 아닐까하는 거죠.(인터뷰)

“오즈 야스지로가 두개의 이미지를 볼 땐 하나를 보고 눈을 씻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즘은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져서 거의 무기처럼 인간의 눈을 폭격하고 있다...이미지가 과잉되면 결국 오염될 것이다. 하지만 혹시 아는가. 젊은 세대가 우리의 눈을 보호해달라고, 자신의 관점을 주체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고 요구할지...나는 영화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월의 해찰 피드 : #기초 #쓰레기 오비추어리

10월 한 달간 SNS에서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기사, 이슈가 된 사건 등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좋은 칼럼 등을 소개합니다.

#기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SNS나 언론을 통해 정말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역사학자 박찬승의 페이스북 글이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한강 작가가 5.18과 4.3에 대한 소설(<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을 쓰면서 구술사 채록, 연구 자료들을 많이 읽고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그는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구술사 연구들이 다양한 분야의 연구, 집필에서 큰 역할을 하고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많은 창작물, 작품 등의 결과는 '천재 한 명'의 성과라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 쌓아온 단단한 기초-'생태계' 위에 비로소 세워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기초를 세우는 일은 잘 티가 나지도 않고 수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간과되곤 하죠. 우리 사회는 과연 기초를 제대로 보존하고 가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45만권을 구해라!” 도서 구출 대작전

독서 시간: 약 12분 / 글자수 : 약 9500자

👤글 속 한문장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서양의 고서들도 분야별 목록마다 발견됐다. 19세기 영국 언론인·작가 찰스 매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1841년 출간) 1852년 판본도 보였다. 인간의 비이성적 군중심리와 집단사고를 파고든 고전이었다. “그 귀한 책들이 그냥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박정희 국문과 교수)던 인문대 교수들은 다급해졌다. 역할을 나눠 ‘책 구출’에 나섰다.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7월5일 노경희 교수가 울산대 전체 교수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학교의 짧은 공문만으론 파악되지 않는 폐기 도서의 ‘실상’과 추진 과정의 폐쇄성 등을 알리며 ‘사태’ 해결에 관심과 동참을 호소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SNS에서도 이슈가 된 기사입니다. 최근 울산대학교 측이 중앙도서관 재정비 계획을 내놓으며 당장 장서 가운데 45만권을 '폐기'하겠다는 통보를 했죠.

그러자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학생들을 중심으로 귀중한 자료 서적을 수호하기 위한 '작전'이 펼쳐졌고, 결과적으로 모든 책을 지키진 못했지만 그중 18만여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중에는 홍콩 제4대 총독 존 보링이 쓴 ‘십진법 시스템’의 1854년 초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잡지 ‘조선’(朝鮮) 50여권(1920~1940) 등이 '과자박스가 될 뻔했던' 운명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고합니다.

물론 이는 울산대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대학에서도 꾸준히 폐기는 진행되고 있는데요.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 유지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노벨상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독서 시간: 약 4분 / 글자수 : 약 1800자

👤글 속 한문장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1947년 이래의 제주 4·3 학살을 다룬다. 당대의 비극과 이후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작품을 위한 방대한 자료 조사가 필수였다...기초연구는 빛나지 않는다. 나도 고전 사회학 저작 한 권을 몇 달째 번역 중인데 훌륭한 책이라 번역에 나섰지만 역시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돈도 업적도 안 되는 일이라 학계에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우리 학문의 토대가 부실한 이유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사회학자 조형근이 쓴 교수신문 칼럼입니다. 저는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못 읽고 있다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에 구해 읽었는데요. 마지막장을 넘겼을 때 '참고한 도서 목록'에 구술사 채록집 등이 적혀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구술을 채록한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문득 생각했습니다. 분명 이런 이야기들을 '돈이 되지 않더라도' 수고를 들여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직접 듣고 분류하고, 보존한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들을 더 잘 기억하고, 사회적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고요. 그렇기에 기초 학문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레기 오비추어리

저는 최근 겨울옷을 구입하기 위해 의류 매장에 갔습니다. 지난해와 또 다른 유행의 새로운 옷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든 몇 벌을 골라 즐겁게 가게를 나서며 생각합니다. 과연 저 많은 옷들이 모두 팔릴까? 만약 팔리지 않는다면, 남은 옷들은 대체 어디로 갈까?...

'오비추어리obituary'란 부고 기사라는 뜻인데요. 경향신문 취재팀은 우리가 버린 옷 등 쓰레기의 경로를 끝까지 추적해보며 대량 생산, 소비 사회가 만들어내는 쓰레기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기획을 내놓았습니다. 한번도 걸쳐지지 않은 옷들이 그대로 폐기물이 되는 경우도 많으며, 헌옷들은 '재활용'되는 대신 불태워지고, 폐기물이 되어 제3세계로 흘러갑니다. 그 과정에서 환경은 오염되고 싼값에 새로운 옷을 계속 생산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리게 됩니다. 화려한 매장과 멋진 옷 뿐 아니라, 그 뒤의 것들을 살펴본 기사들입니다.

나이지리아로 간 헌 옷, 옷의 장례길

독서 시간: 약 11분 / 글자수 : 약 7200자

👤글 속 한문장

“해외로 수출된 헌 옷이 100% 재활용될 거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2019년 기준 가나에 들어온 총 6500만t의 중고의류 중 40%가 판매되지 않고 폐기됐다. 폐기물은 매립지에 버려지거나 바다로 흘러간다.

유럽에서 중고의류를 자체 처리하지 않고 수출하는 이유는 “비용 압박” 때문이다. 의류 분류 작업에 드는 인건비와 자원순환을 고려하지 않은 혼합섬유 재질의 옷이 증가하는 현상 등이 비용을 늘렸다. 일부 개발도상국은 폐기물 처리 규제가 약하기 때문에 처리가 쉬운 국가로 중고 옷을 수출하는 것이 ‘경제적’ 선택이 된다. 칠레와 캄보디아는 환경 규제가 심하지 않은 나라로 꼽힌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날 선진국,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편리하게 구입해 빠르게 배송을 받고, 쓰레기가 생길 경우는 죄책감없이 버리죠.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 있는 셈인데요. 그 물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산이 되었으며, 어떻게 내게 오게 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폐기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뒷단'의 문제를, 옷의 폐기 과정을 통하여 짚은 심층 기사입니다.

전체 기획을 보고 싶으시면 이쪽 링크(쓰레기 오비추어리)를 클릭해주세요.

초저가 쇼핑몰과 뽑기, '딜리버리-스루'

독서 시간: 약 7분 / 글자수 : 약 4800자

👤글 속 한문장

“서울에 사는 직장인 A씨(37)는 지난 1월부터 “사재기하듯이” 옷을 사기 시작했다. 중국 전자상거래 사이트 ‘타오바오’를 알게 되면서다. 반팔 티셔츠 한 장이 3000~5000원 정도라 부담은 없었다. 같은 옷을 흰색, 검정, 남색 등 색상별로 사들인 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A씨의 ‘딜리버-스루’소비는 얼마나 많은 탄소발자국을 남겼을까. 경향신문은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A씨가 타오바오를 통해 구매한 물품 163건의 목록과 처분 내역, 생산지 정보 등 자료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전과정평가팀에 주고 탄소발자국 평가를 의뢰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앞선 기사에 이어 기획 기사 중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글입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도 테무, 타오바오 등 '초저가쇼핑몰'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티셔츠 3000원, 전동 마늘다지기 2000원...등처럼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괜찮은 상품도 있었지만, 엉망진창인 상품도 있었고 (카페트를 3000원에 구입했는데 배송온 걸 보니 모양만 똑같고 수건(!) 크기라든지...) - 하지만 워낙 가격이 저렴하다보니 '일단 다 사고 불량품이 오면 그냥 버리는 게 이득'이라는 심리로 잔뜩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이런 '언박싱' 콘텐츠가 유튜브에서도 인기를 끌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불량품은 그냥 고개를 저으며 냉큼 버렸고, 이런 소비를 '딜리버리-스루(배송 즉시 버림)'라고 부릅니다. 이런 소비가 과연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색해본 기사입니다.

💌10월의 김스피 책장 : 작은 책꽂이

10월 신간 가운데 주목할 만한 책을 소개합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창비, 2024 (링크)

-지난 29일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이태원에서 159명이 사망한 날입니다. 참사2주기를 맞아 언론에서도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요(링크). 참사 이후 730일 간 유가족들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히고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과연 그 이후로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갔을까요. 작가기록단이 직접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날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잊지 않고, 한걸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섭니다.

📚올루페미 O. 타이워, 권순욱 옮김, <엘리트 포획>, 두번째테제, 2024 (링크)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철학자 올루페미 타이워가 쓴 <엘리트 포획>의 부제는 "엘리트는 어떻게 정체성 정치를 (그리고 모든 것을) 포획하는가?"입니다. 최근 수 년 간 우리나라에서도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중요한 의제였는데요. <엘리트 포획>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정체성 정치 자체'의 시비를 가리는 것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고 - 우리가 그보다 주목해야할 것은 어떤 움직임이든 '엘리트 포획'의 덫에 걸리면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점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관련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잉그리드 로베인스, 김승진 옮김, <부의 제한선>, 세종, 2024 (링크)

-이 책의 부제는 '1% 슈퍼 리치는 왜 우리 사회의 중산층,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가?'입니다. 띠지의 강렬한 문구 "왜 우리는 가난에만 주목하고 부의 제한선은 이야기하지 않는가?"가 눈에 훅 들어왔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가난의 문제를 '비참함, 아래의 문제'로 생각하곤 하는데 전체적인 구조로 보면, 분배의 문제-'위'까지 함께 다루어야 하는 문제겠죠. 나의 소득을 적으면 '키'로 표현해주고, 어느정도 위치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인포그래픽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링크)

📚우치다 다쓰루, 박동섭 옮김, <무지의 즐거움>, 유유, 2024 (링크)

-'호쾌하고, 핵심을 꿰뚫는 필치'로 유명한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의 신간입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일본 저자의 책이지만 일본책의 번역본이 아니고 한국에서 기획 출간이 되었고 배움, 읽기, 공부 등 스물다섯개의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꾸려져있습니다. '쓸모있는 학문만 배워야 할까?' '어떻게 정보의 홍수 속 나만의 주관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등에 대해 참신한 시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치다 다쓰루가 친근한 독자들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즐겁게 읽을 만한 책입니다.

📚클레어 데더러, 노지양 옮김, <괴물들>, 을유문화사, 2024 (링크)

-내가 수십년 간 너무 사랑하던 예술가가 알고보니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다면? 혹은 도저히 존경할 수 없을 만한 삶을 살았다면? 이럴 때 우리는 과연 '작품'과 '작가'를 따로 두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작가를 캔슬하는 것과 옹호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걸까요?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이 책에서 캔슬 컬처(*저명한 사람의 실책이 밝혀졌거나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경우 지지를 철회하는 현상)에 대해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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