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세상에서 제일 ‘낯선’ 세계문학을 읽는다는 것
Nobel Prize in Literature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38), 2024.10.16,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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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노벨문학상, 세계문학, 소설, 낯섦,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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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2.‘내가 모르는’ 이집트, 탄자니아의 역사 3.문학이 ‘고통’을 다루는 복잡하고도 명료한 방법 4.맺음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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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그간 한강 작가의 우리나라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저는 발표 당시 별 생각 없이 도서관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는데요. 연구자님들께서도 많이 놀라고 기쁘셨을 것 같습니다.
며칠 새 백만 권 가까이 팔리며, 오프라인 서점에도 한강 작가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는 신기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죠.
저는 잔뜩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인터넷에서 노벨문학상과 관련된 이런저런 기사를 보다가, 우연히 1901년 이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역대 수상자들 목록을 클릭해서 보게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총 40개국, 총 121명이 선정되었다고 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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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1> 2016년 소설 <흰>의 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한강 작가 (왼쪽) 노벨문학상 발표 다음날인 1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본점에 한강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서점이 열리기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서기도 했습니다. /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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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목록을 곰곰 쳐다보다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영광이 워낙 커서 깜빡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실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어쩌면 우리가 늘상 봐오던 매대의 친숙한 문학 베스트셀러들, 온라인 서점 인기 톱10, 고전 목록에 비교해 가장 ‘엉뚱하고 낯선’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노벨문학상은 기본적으로 영미권 등 주요 선진국만이 아닌 ‘전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하며, 대중성만 기준으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생존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끊임없이 재번역본이 나와 잔뜩 팔리며 인기 순위 상위권을 차지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다자이 오사무나 프란츠 카프카, 호메로스(!) 같은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번에 한 출판사에선 편집자들이 예상 후보로 앤 카슨(링크), 찬쉐(링크), 다와다 요코(링크)를 꼽았는데 - 평소 해외 문학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독자가 아니라면 이름조차 생소할 가능성이 높고요.
심지어 지난 2020년(루이스 글릭·미국)과 2021년(압둘라자크 구르나·탄자니아)에는 2년 연속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 중 국내 번역된 작품이 ‘0권’이라 “어떤 출판사도 노벨문학상 특수를 누리지 못하는” 웃픈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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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2>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진행한 민음사TV 라이브 방송에서 세명의 해외문학 편집자들이 수상자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왼쪽) 2020, 2021년 노벨문학상의 경우 2년 연속 수상자들의 국내 번역본이 '0권'일만큼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었는데요. 두 작가 모두 수상 이후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 민음사TV(영상), 매일경제(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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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니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외의 낯섦에 주목해보는 것이 흥미롭지 않을까? 한거죠.
우리는 노벨문학상을 통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단신기사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나라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통을 당했고, 어떤 혼란을 겪어왔으며 또 그 고통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구 반대편의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 나라지만, 그리고 그게 당연하지만 -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을 통해 공감의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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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계기로2), 오늘 편지에서는 실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들 가운데, 다소 우리에겐 생소할 수 있는 나라 의 작품을 직접 읽으며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슬쩍 상상해보기’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탄자니아·2021년 수상)의 <낙원>, 나기브 마푸즈(이집트·1988년 수상) <미라마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2015년 수상) <아연소년들> 등을 펼쳐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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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958), 장 폴 사르트르(1964) 거부. 하지만 파스테르나크의 경우 노벨상 거부의 배후에는 당국(소련)의 압력 등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노벨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죠.(링크) 1989년 아들 예프게니 파스테르나크가 대신 수상했습니다.(링크)
2) 처음엔 한강 작가의 작품을 다룰까 생각했는데, 아직 책을 못 읽고 계시는 분 등 조만간 직접 읽으려고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아 오늘 레터에서는 간접적으로만 다루기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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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가 모르는’ 이집트, 탄자니아의 역사】
연구자님은 이집트에서 발생한 1952년 혁명*에 대해 잘 아시나요?
*1952년 혁명 =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1956~1970 재임) 등 자유장교단이 주도한 혁명 혹은 잔지바르 1964년 혁명* 당시 민간인 수천명이 무참히 살해, 추방당한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잔지바르 혁명 = 잔지바르 인민공화국(현 탄자니아)이 설립된 계기가 된 혁명.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계, 인도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수천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 참고로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1946~1991) 역시 잔지바르 출신의 인도계로, 1964년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아마도 해당 국가,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잘 모르는 게 당연할텐데요.
우리는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시선에서 복잡한 고통과 삶을 느끼고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생생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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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출신의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 그리고 이집트 작가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는 다른 시기의,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요.
우선 이 작품들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테니 이해를 위해 아주 간단하게 정보를 소개하자면,
<낙원>은 19세기 동아프리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긴데요. 주인공 소년 ‘유수프’가 어릴 적 상단에 노예로 팔려가면서 겪고, 본 일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입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원주민, 노예 문제 등을 냉철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이죠.
<미라마르>는 이집트의 한 펜션 이름인데요. 이곳을 배경으로 다섯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숙박객들이 머무르는 동안의 일을 다섯명의 시선으로 그린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1952년 혁명 이후 이집트의 정치 상황을 둘러싼 시선들이 폭넓게 드러납니다.
*
이 두 작품은 두 가지 느슨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요. (대체로 좋은 문학 작품이 갖고 있는 특징과도 같습니다)
1.자신이 처한 사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2.‘구호’가 아닌 ‘예술’로 승화해냈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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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3>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낙원Paradise> 영문판 표지. 주인공인 흑인 소년 '유수프'는 노예로 팔려가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작품에서 다양한 언어, 배경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국가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다민족'이 섞여 살아온 역동적인 역사를 반영한 것이었죠. (왼쪽) <미라마르Miramar> 표지.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다섯명의 남자 손님들과 펜션의 주인, 심부름꾼(조라)의 그림이 그려져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국내 번역본이 있습니다. / Amazon, 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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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의 독서 경험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이 작품들을 몰입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레터를 써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머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의 두 공통점을 다르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으니까요.
1.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 이집트와 탄자니아의 단순한 정치 상황 뿐 아니라 수백년에 걸친 오랜 통치 역사, 문화, 경제, 국제 관계, 계급, 사회적 정황을 입체적으로 촘촘하게 그려낸 이야기를 2.‘구호’가 아닌 ‘예술’로 승화해냈다 => ‘한줄 요약’ 불가능한 방식으로 모호하고 밀도높게 그려냈다.
이런 소설들은 아마도 ‘소설 할아버지’가 와도 쉽고 명쾌하게 요약은 불가능할 겁니다. 특히나 짧은 레터에서는 소설의 줄거리 뿐 아니라 각 국가의 상황 및 배경지식을 충분히 다루기 어렵습니다.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제가 이 책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생각한 과정을 이야기한 이유는, 제가 두 권의 소설을 책상 앞에 놔두고 곰곰 생각하다가 번쩍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면 한계상(?) 작품에 얽힌 모든 역사, 정치 상황과 관련된 복잡한 정보를 죄다 레터에 다룰 수 없다는 점이 문제라기보다는, 애초에 소설을 읽을 때 모든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핵심일 수 있다는 거죠.
즉, 저는 이름조차 낯설고 배경지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국가에 대한 밀도 있고, 어떤 기사에서도 읽을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깊게 공감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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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저는 이 소설들을 읽을 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일단 모르는채로도’ 충분히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가족 등 사람과 관계를 맺고, 질투를 하고, 외롭고, 다투고, 죽고, 때로 위안을 얻는 것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은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읽어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주 낯선 소설 속 인물에 이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테면, 구르나의 <낙원>에선 노예가 된 주인공 유수프가 자신을 노예삼은 주인 아저씨(아지즈)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땅의 복잡한 역사에 대해 듣습니다.
아래의 기나긴 대목을 읽을 때는, 저도 마치 주인공 소년이 된 것처럼 골똘히 이야기를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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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독일인들이 철도를 이곳까지 연결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있다. 법을 만들어 지배하는 것은 이제 그들이다 […] 너는 그렇게 많은 아랍인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됐을지 궁금하겠지. 그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 지역에서 노예들을 사는 것이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것과 같을 때였다 […] 인도 상인들은 상아와 노예들을 거래하려고 그 아랍인들에게 외상을 줬지 […] 아랍인들은 돈을 훔치고 이 근처의 야만적인 술탄들에게서 노예를 사서 밭에서 일을 하게 하고 편안한 집들을 지어 살았지. 이 도시는 그렇게 커진 거란다 [...] 후임으로 독일인 사령관 프린지가 왔어. 그는 즉시 전쟁을 선포하고 술탄과 그의 자식들을, 아니 보이는대로 다 죽였지. 처음에는 아랍인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 부리다가 나중에는 쫓아버렸어 […] 아랍인들은 […] 떠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 이제는 인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어. 독일인을 상전으로 모시고 야만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리면서 말이야.”
-압둘라자크 구르나, <낙원>(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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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작가가 살았던 시점보다 1세기 정도 이전의 시대적 배경을 가진 이야긴데요. 그렇다고 해서 저자와 완전히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순 없습니다.
실제 작가의 고향인 진자바르 지역은 수백년 동안 여러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고3),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며 살았지만 그만큼 갈등의 골도 깊었죠. 저자는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1964년 학살(링크)으로 16세에 영국으로 도피해 거의 평생을 망명객으로 살아왔습니다. <낙원>은 어찌보면 1964년 학살의 근원을 추적해가려는 노력입니다. 과거 저자는 말했죠.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모든 공동체가 축출되고 수백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어진 유혈극과 박해 속에서 징벌적인 테러가 삶을 지배했다. 나는 그곳에서 떠나왔지만 마음 속에서는 그곳에 산다...”
비록 이런 자세한 역사나 정황을 모르더라도, 자유에 대한 미련 자체를 잃고 그저 ‘소시민’으로서 비겁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볼 때의 절망감은 ‘같은 인간’인 저에게도 사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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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께서 어르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을 때 왜 거절하셨어요?”[…]음지 함다니가 한숨을 쉬었다 […] ”그들은 내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어 […] 나는 너를 소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비가 지나가는 것이나 하루의 끝에 해가 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들이 좋아하든 말든 다음날 아침해는 다시 뜬다고. 자유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쓸모 없어질 때도 여전히 너를 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네가 태어난 날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내말 알아듣겠니? 이것은 나한테 하라고 주어진 일이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이것보다 더 자유로운 것을 나한테 줄 수 있겠니?” 유수프는 그것이 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지혜가 담겨있는 건 틀림없었지만 그것은 인내와 무력감의 지혜였다. 그 자체로 찬탄할 만한 것일지 모르지만, 약자를 못살게 구는 자들이 여전히 사람을 깔고 앉아 더러운 방귀를 뀌어대는 한 그렇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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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책 뒤에 실린 탄자니아 역사, 정치적 배경에 대한 해제를 꼼꼼하게 읽고 지금까지는 별 관심이 없던 탄자니아 역사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서 잔뜩 찾아보고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등 ‘더 알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잘 몰랐던 나라에 살던 사람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보고 - 또 그 나라의 고난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일은 좀처럼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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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풍경을 그린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 역시, 독자가 할 일은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따라가면서 ‘일단’ 읽는 것입니다.
이 작품 역시 직접적으로 이집트 혁명, 정치의 극적인 장면이나 학살, 고함, 아비규환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내진 않습니다. 단지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다룰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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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4> 바다에 인접한 잔지바르는 18~19세기 아프리카 본토에서 붙잡아들인 노예 및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억압의 중심지인 동시에 다양한 종교, 인종의 사람들이 어루어져 살아가는 역동적인 다양성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왼쪽) 나기브 마푸즈(1911~2006)는 이집트 사회의 부패를 고발하고, 동성애, 사회주의 등 금기된 주제를 다루기도 했는데요. 종교를 우화적으로 다룬 <우리 동네 아이들> 등은 금서 조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4년 테러리스트에게 목을 찔려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죽을 때까지 경호를 받으며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 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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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통틀어 ‘학살’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건 초반의 딱 한 장면 정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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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아메르, 첫번째 혁명(1919, 영국에 대한 이집트 독립운동)으로 제 첫 남편이 죽었어요. 두번째 혁명(1952)은 내 재산을 빼앗고 친구들을 쫓아냈지요. 왜 그런거죠?” […] 마리아나가 나가고 나는 홀로 앉아 그녀의 첫 남편의 눈을 들여다본다. 도금을 한 액자 안에서 그가 나를 바라본다. 누가, 어떻게 당신을 죽였소? 당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의 동 세대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소? 희생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우리 세대를. 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기브 마푸즈, <미라마르>(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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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소설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젊고 당찬 시골 출신의 여자 심부름꾼을 향한 숙박객들의 구애 및 ‘살인 사건인 줄 알았던 한 남자의 사망 사건’에 대한 것 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극적인 폭력 장면이나 고발이 없더라도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설 속 인물들의 입장에 이입해, 그들의 복잡한 고민과 심정에 치밀하게 공감해볼 수 있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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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중 국가 기관 근무자가, 물건을 몰래 빼돌려 돈을 벌자는 권유를 받은 상황) 나는 알리의 말을 들으면서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날 믿어, 딴 방법은 없어. 합법적으로 성공하겠다는 건 헛된 생각이야. 가끔 승진을 하거나 보너스가 나오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게 뭐야! 그걸론 아무것도 살 수 없어. 달걀 하나가 얼마지? […]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월급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 그리고 인생은 흘러가고 있지…”
* ”말해보세요, 사람들은 왜 서로를 해칠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나이를 먹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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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소설 속 인물들 중 누구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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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옮긴이 해제 등에 따르면 잔지바르는 스페인 식민지(1498~1698), 오만 제국의 속국(1698~1890), 영국 보호령(1890~1963) 시기를 거쳐 1963년 12월 11일에 술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 군주국이 됐는데,혁명이 일어나서 술탄을 몰아내고 혁명주의자들이 정권 탈취. 이후 잔지바르는 탕가니카와 합해져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탄자니아가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만 요약해두어도 얼마나 역동적이고도 복잡한 역사였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의 영향, 뿌리가 뽑혀 이주하는 개인들의 삶에 대한 식민주의의 영향을 시종일관 연민을 갖고 천착했다(2021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사족입니다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한강의 작품 가운데 '그가 직접 겪지는 않은, 한국사의 주요한 사건들(5.18, 4.3)'에 대한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구르나 역시 19세기의 질곡어린 잔지바르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는 잔지바르의 거리를 걷는 연로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낙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링크) 어떤 이야기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로소 쓸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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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학이 ‘고통’을 다루는 복잡하고도 명료한 방법】
소설에는 단지 ‘배경지식 없이도 쉽게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있다’는 차원의 의미만 있는 걸까요?
그보다도 ‘한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편들기’와 왜곡 없이 그대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통상 어떤 기사를 읽을 때 ‘누구 편’인지, ‘제목(핵심 요약)’이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곤 하는데요. 기사에서 대체로 어떤 사람은 ‘파렴치한 민폐’거나 ‘범죄자’거나 ‘영웅’ ‘불쌍한 사람’이거나... 그렇죠. 우리는 우리가 짜맞추어놓은 틀에 맞춰 효율적으로 재빠르게 분노하거나 공감하거나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체로 사람은 복잡합니다.
영웅인 것같았던 사람이 실제로는 사기꾼이기도 하고, 살인자이지만 동물을 사랑하고, 무례한 사람이지만 친절한 말 한마디에 자기를 희생할 정도로 남을 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대체 어디까지가 범죄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좋은 소설은 ‘효율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한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죠. 이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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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도 저널리스트로서 201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목소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문제에 연루된 수백명의 목소리를 그저 귀기울여 듣고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의 조각보같은 글쓰기죠. 그의 글이 구술 채록집과 다른 점은 그가 적극적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편집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작품에선, 항상 작은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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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는 역사가다. 거대한 사건들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 여기 이 작은 사건들, 그러나 작지만 작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이 사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오늘 한 소년(갸냘프고 병약한 모습 때문에 병사처럼 보이지 않는다)이 동료들과 함께 적을 살해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흥분도 되더란다. 적을 향해 얼마나 무섭게 총을 쏘아댔는지 모른단다. 과연 이런 사건이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늘 그렇듯 딱 한가지다. 나는 (책에서 책으로 넘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린다. 역사를 사람의 크기로 작게 만드는 일 [...] 그건 반드시 작고, 개인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건 바로 단 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존재인 그 한 사람이다 […]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정상적인 시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연 소년들>(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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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까지 체르노빌 참사 피해자, 전쟁 참여 여성 등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제가 오늘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읽으려고 가져와 본 책은 <아연 소년들>입니다.
이 책은 ‘거대한 실패’이자 ‘소련 몰락의 결정적 계기’로 꼽히는 소련-아프간 전쟁(1979~1989)에 참전했던 소련의 귀환 병사, 전사한 아들을 둔 어머니들의 짤막한 이야기를 나열한 책인데요. ‘아연 소년들’은 전사자들이 아연으로 된 관에 담겨 귀국했으며, 전사자(참전자) 중 상당수가 앳된 소년병이었기 때문에 붙은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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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5> 역사 속 '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왼쪽) <아연소년들>의 영문판 표지. 한 소련 어머니가 소련-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아들의 사진을 들고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 연합뉴스, Amaz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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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대목은, <아연 소년들>이 단순히 ‘소련 편에서’ 소련 전사자들을 애도하고 영광을 되찾아주기 위한 기획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실제로 이 책의 출간 이후 ‘영웅적인 업적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인터뷰했던 병사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게 됩니다)
아프간-소련 전쟁에서 국가의 거짓, 과장 선전으로 멋 모르고 참전해 목숨을 잃고 장애를 입게 된 소련의 소년병, 청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약 1~2만명), 이 아프간에선 민간인만 무려 약 100~20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듣는 것은, 전쟁에서 동료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 뿐 아니라 어떻게 해서 어린 소년들이 전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리 한마리 못 잡던 사람이 전장에서는 ‘살인 기계’로 돌변하게 되는지, 전장에서 어떻게 치약으로 새해 축하 인사를 적고, 낙타에게 별 이유없이 총을 갈기는지, 귀환한 병사들이 어떤 극심한 소외감, 박탈감을 느끼는지, 무엇보다도 왜 이런 살인이 계속 반복되는지 ... 등입니다.
이 책의 너무 많은 부분을 접어가며 읽었기 때문에 모든 구절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그중 일부 제 마음을 이상하게 오랫동안 짓눌렀던 대목들을 몇개 발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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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직접 지원했어요…재미있을 줄 알았거든요…그곳이 어떨지 상상해보곤 했어요. 예를 들어, 나한테 사과 한 개와 두 친구가 있어요. 나도 배가 고프고 두 친구도 배가 고파요, 그래서 내가 사과를 두 친구에게 양보하는 거예요.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싶었어요. 그곳에선 모두들 사이좋게 지낼거라고 생각했어요…나는 바로 그런 우정을 기대하며 그곳으로 떠났어요 [...] 바보! 거기서 신병은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았어요 [...]
-아프간에 다시 가라면 가겠어요? - 네. - 왜죠?
-거기선 친구면 친구고 적이면 적이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요. ‘내 친구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지? 저 배부른 투기꾼들을 위해서?…’ 여기는 다, 모든 게 다 잘못됐어요. 내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져요. (두 다리를 잃은 박격포병)
* 왜 열여덟 열아홉살짜리가 서른살 남자보다 더 쉽게 사람을 죽이는줄 아세요? 그 또래 애들은 동정심이 없거든요 […]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었어요. 여가수가 위문공연 왔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잔뜩 기대를 하면서 기다렸어요. 여가수가 드디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여러분을 만나러 오는 동안 기관총을 쏴보라고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쏴봤는데 정말 즐거웠어요…
그러고는 노래를 시작했고, 후렴구에서 박수를 요청하더군요.
-여러분 자, 박수! 박수치세요, 여러분!
하지만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어요. 고요히 침묵만 흘렀죠. 그러자 여가수는 그대로 무대에서 퇴장해버렸고 공연도 그대로 끝이 났어요. 그여자는 자신이 슈퍼걸이고, 그런 자기가 또 슈퍼보이들을 만나러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어요. 하지만 이 소년들의 막사에서 매달, 적어도 여덟개에서 열개의 침상이 주인을 잃어간다는 게 현실이었죠. (소령, 포병연대 선전원)
* -아들, 꿈에 나타나렴. 엄마 좀 만나러 와줘...
딱 한번 꿈 속에서 관을 봤어요…머리가 놓인 쪽에 작은 창처럼 구멍이 크게 나있더라고요…아들에게 입을 맞추려고 몸을 굽혔죠…그런데 그 안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요? 우리 아들이 아니었어요…까만, 어떤 남자애가…어떤 아프간 소년이 누워 있는데 우리 사샤를 닮은거예요…처음엔 ‘바로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을 죽였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하지만 잠시 후에 다른 생각이 들었죠. ‘이 아이는 죽었잖아. 이 아이도 누군가한테 죽임을 당한거야’ 나는 다시 몸을 굽혀 구멍을 통해 입을 맞췄어요…그러고는 소스라치며 잠이 깼죠.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일이지?’ 누가 다녀간 걸까요…무슨 소식을 전하려고… (아들이 전장에서 사망한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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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들은 분명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신문에서도 반대로 전쟁을 ‘영웅화’하는 목소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낯설고, 헷갈리고, 비효율적이고, 기분이 찝찝해지고 슬픈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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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소년들>의 모든 페이지는 호소한다. “사람들이여, 두번 다시는 이런 피의 악몽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작가를 위한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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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항상 뒤떨어져있다. 시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이것 뿐이다.누군가는 대열에서 뒤쳐져 걸을 수밖에 없다. 객관적 사실들의 의기양양한 행군 속에서 짓밟히고 분실된 것들을 주워담기 위해서는.”-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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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맺음말】
기억이 계속되기 위해선, 기억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새로’ 생겨야 합니다.
한강 작가는 이전에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관련한 한 강연에서 “이 소설을 젊은 세대 어린 학생들이 읽어서 광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면 '아 너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꿈같은 일이지만...”이라고 말했었는데요.
여기서의 젊은 세대, 어린 학생이란 곧 5.18 이후에 태어나 직간접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겠고요. 이처럼 어떤 일을 직접 겪거나 듣지 않아도, 새로 그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야 그 역사는 딱딱한 기록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꾼’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어갑니다.
이는 꼭 같은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의로, 5.18민주화운동과 4.3사건이 우리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역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꼽힙니다. 실제로 각종 외신에서는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을 알리며 5.18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하기도 했고요.
요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대중적으로 널리 강렬하게 기억되는 데는 소설이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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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의미있는 수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국뽕’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이야기들이 꺼내어지고 이야기되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세계의 사려깊은 독자들이 한강의 작품을 통해 5.18과 4.3을 자신의 고통으로 감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타국의 고통에 더 신경을 쓰고 연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현재진행형의 고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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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왕은철 옮김, 『낙원』, 문학동네, 2022.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레터 본문에서도 소개했듯, 탄자니아의 아름다운 섬 잔지바르 출신 202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데요. 1964년 학살을 피해 열여섯살에 영국으로 이주한 뒤 쭉 영국에서 생활해왔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아프리카를 그간 유럽 작가들이 그려왔듯 '미지'의 땅이라든지 '순수한 야만인의 땅'으로 그린다기보다는 오히려 추악한 모습까지 낱낱이 밝혀 복잡하고 역동적이고 냉철한 필치로 그린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접할 기회는 잘 없는데, 실은 문학 뿐 아니라 아프리카 각 국과 관련된 소식을 기사 등에서도 접하기가 어렵죠. 국제 뉴스는 워낙 얽힌 역사가 복잡해 기사를 읽더라도 제대로 문맥을 이해하기도 어렵고요. - 그렇다고 할 때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것을 통해 복잡한 현실을 조각만큼이나마 - 복잡한 그대로 이해해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새삼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소설을 읽게 되신다면 뒤에 함께 실린 충실한 옮긴이 해제도 함께 읽어보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구르나의 작품은 수상 이후인 2022년 세 권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구르나의 작품이 번역된 것은 한국 최초를 넘어 아시아 최초(!)였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나라가 인구, 독서 규모에 비해 의아할정도로(?) 지나치게 좋은 책들이 그때그때 잘 번역이 되어서 나오는 감사한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한강 작가가 언급한 '한국 문학의 생태계'에 저는 이런 번역본까지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기브 마푸즈, 허진 옮김, 『미라마르』, 열린책들, 2011.
-오늘 레터에서 충분히 내용을 다루지는 못했고, 실은 처음엔 2챕터에 구르나의 책만 다루며 충분히 배경 역사 및 소설의 인물, 줄거리를 소개할까도 생각했었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한참 정리하며 쓰다보니 회의감이 들어 길게 적었던 글을 지웠습니다. 왜냐면 2챕터에서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은 '자초지종을 잘 몰라도 읽어가다보면 복잡한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의 경우 요약으로 자세한 소개를 받는 것보다는 직접 읽는 것이 압도적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소 낯선 소설 두 권을 줄거리 설명이 부족한 채 나란히 놓는 소심한 모험을 해보았습니다.(성공적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이 책을 덮고 나서 이집트의 정치와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봤는데요. 확실히 과거엔 흐린눈으로 읽었던 국제 기사가 눈에 훅훅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과거 레터( 💌검색이 데려가지 않는 세상)에서도 다루었던 아즈마 히로키의 <약한 연결>의 핵심 내용은 '검색의 시대엔 '키워드'를 얻는 것이 중요한데, 그 키워드는 욕망에서 비롯되며 - 그 욕망의 시작은, 관광 정도의 미약한 관심이라도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후 그는 '다크투어리즘*'을 기획하기도 하는데요. 저는 소설 독서 역시 작으나마 어떤 것을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을 얻게 되는 계기,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크 투어리즘: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르노빌 원폭 지역 등 재해, 수난 지역을 관광지화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관광 방식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아연 소년들』, 문학동네, 2017.
-독특하게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노벨문학상(2015)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책의 가장 난감하고 심란한 점은 아프간-소련 전쟁에서 소련군은 명백하게 '침략군'이었으며 저자는 '아프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소련군인들(생존자)과 소련소년병의 유가족들의 이야기'만' 들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가 벨라루스 작가(전 소련)라는 점 역시 얼핏 봐서는 그가 마치 '자기 나라 사람들의 피해만 다루었다'고 오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을 계기로 고소당해 법정에 서게 된 점, 그리고 엄청난 국가적 논란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가 단지 '희생된 소련군 병사들이 불쌍하다'라는 점만 이야기하려던 게 아닌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칼날을 밟듯 이 책을 통해 답하려는 질문은 '무엇이 대체 사람들을 전장에서 서로 죽이게 만드는가'입니다.(어쩌면 '가해자의 서사( 링크)'와도 연결될 수도 있겠네요) 그는 선악의 '진부한 틀'에서 벗어나 잔인함,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이 책의 뒤에는 당시의 법정 진술문 및 저자를 지지하는 연대의 성명들도 함께 번역되어 실려있어 이 책의 뜨거운 위험함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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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참고한 논문, 문예지 등
* 임지현. (2017).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침묵으로 기록된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초청 토론회. 문학과사회, 30(3), 338-348.
* 박재원. (2015). 나집 마흐푸즈의 『미라마르』에 나타난 이집트 1952년 혁명. 지중해지역연구, 17(1), 55-75.
* 오길영. (2022). 문학 고정된 믿음은 위험하다 :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바닷가에서』와 J. M.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황해문화,, 285-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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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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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직전의 인터뷰
독서시간: 약 10분 / 글자수: 약 4600자
🖍글 속 한 문장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이 인터뷰는 워낙 SNS 등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계실텐데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9월말), 그 이전부터 편지를 통해 매일경제 김유태 기자가 두 차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엮은 글입니다. 사려깊고 깊이있는 질문, 그리고 그 깊은 질문에서 돌아오는 응답이 인상적인 인터뷰입니다. 특히 중간의 질문 가운데 "애써 희망하시는 일도 아니고, 또 답변하시기도 꺼려지시겠지만 엄연히 다가올 미래라고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질문 드립니다. 저는 10년 안에 ‘소설가 한강’의 이름이 스웨덴에서 호명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흥미롭기도 합니다(기자가 마지막 메일을 열어본 10시간 뒤 스웨덴에서 한강의 이름이 호명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 굉장히 많은 과거 인터뷰, 영상 등이 재발굴되어 공유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의 것이면서도 과거의 어떤 인터뷰보다도 인상적으로 그의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강의 작품을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접해보신 분들이나, 오래 전부터 읽어오신분들이나 모두 읽어볼만한 인터뷰라고 생각합니다. 15일, 기사에 얽힌 생생한 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자협회보 기사도 나왔습니다.( 링크) |
동네책방 주인 한강, 적자 감내한 이유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2600자
🖍글 속 한 문장
한강 작가가 생각하는 독립서점의 가치와 역할은 무엇일까[...]“어떤 대가도 없이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잘 보이도록 매대와 서가에 진열해두면,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얼른 선택하기 어려웠던 그 책들을 손님이 만나게 된다. 그 반가운 순간들이 서점을 운영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우리는 약간의 공간을 현실로부터 임대해 신기루 같은 이곳을 만들었고, 자본의 논리와 상반되는 경영을 한 해씩 연장해가고 있다. 책 판매와 행사 기획을 모두 어렵게 만든 팬데믹 상황이 닥쳐왔을 때는 3개월 동안 휴업도 했는데, 그때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이 서점에 관한 어떤 일도 함부로 실패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우리가 현실의 시공간에 기입해왔고, 지금도 기입해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의 의미를 언젠가 정확히 알게 될 순간까지.”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한강 작가가 아들과 함께 서울 서촌의 동네책방 ‘책방 오늘,’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요.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어 잠시 운영을 중단한 상태라고 합니다. SNS에서는 그가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가 적힌 영수증 등을 인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했죠. 이 책방에서는 연주회, 낭독회 등 많은 행사들도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한강은 '만년 적자'인 동네책방을 계속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책이 독자를 직접 만나는 우연의 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방에 관해서는 만성적자이긴 하지만, 절대로 '실패'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다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책과 사람이 만나는...어떤 종류의 일들을 당연히 '돈'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한강이 지키려 했던 동네책방들은 현재 유통 구조 상의 문제로 인해 정작 한강의 책을 전혀 공급받고 있지 못하며, 한강 신드롬은 대형서점, 인터넷 서점에만 이익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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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과거가 아니다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2600자
🖍글 속 한 문장
“소위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타깃으로 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문화·예술인들이 국제적인 성과를 거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가 블랙리스트 피해자였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윤희 블랙리스트 이후 디렉터는 아직 블랙리스트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블랙리스트 관련 인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좌우로 구분하는 인사들이 요직에 기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언론사, 커뮤니티 등에선 각종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데요. 특히 한강 작가 역시 과거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는 소식이 공유되면서, 과거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문화예술인 가운데 세계적인 성과를 낸 봉준호, 박찬욱 감독, 황동혁(오징어게임) 등이 함께 거론되며 '블랙리스트의 안목'이라는 이야기(농담?)까지 돌고 있는데요.
실은 블랙리스트에 등재되면 번역 지원 등 국가 관련 지원에서 제외되고, 각종 프로젝트나 행사 등에 초청받을 수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예술인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이며,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블랙유머로 소비되어선 안되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강의 블랙리스트 문제는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윤희 디렉터를 지난 14일 미디어오늘이 직접 만나 들은 이야기입니다. |
노벨문학상, 기구한 역사...영광과 운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큰 영광이라고 말할 것이다 . 하지만 상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 아무리 대단한 독서광이라 할지라도 노벨상 수상자들의 우아한 목록에서 생소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01년에 첫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시인이자 수필가인 쉴리 프루돔을 아는가? 아니면 베르너 폰 하이덴스탐(1916), 프란스 에밀 실란패(1939),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1944)은?”
👤김스피의 블라블라
섬네일의 사진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왼쪽부터 헨리크 폰토피단, 쉴리 프루돔, 조수에 카르두치)입니다. 오늘 레터는 어쩌면 노벨문학상 역대 수상자 목록을 보다보니, 의외로 낯설게 느껴졌다!...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제가 느꼈던 이 막연한 감정의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아티클입니다. 노벨이 노벨문학상을 만들면서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생산한 사람"에게 수여하라는 당부를 했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기준이 명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시상 흐름에도 차이가 있었다고 하네요. 1960년대엔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로 인해 노벨문학상 선정이 '내성적'이 되기도 했고, 수상자 목록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 작가 등의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한편, 아무래도 우리가 2024년을 사는 사람이기에 오늘날 '명예의 정전'에 올랐지만 정작 당시엔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던 유명 작가들(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을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노벨문학상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노벨문학상이 모든 것을 판단해주는 것 또한 아닙니다. 결국 아티클의 필자는 '메멘토 모리'라는 타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로 글을 끝맺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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