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명절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오랜만의 추석 명절입니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6일이나 되어 길기도 하죠. 지난 설날에 이어, 추석을 맞아,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서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2년 6개월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지난 9월 일터로 복귀한 김응준 님이에요. 이번 레터를 통해 아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네요.

김응준 님의 레터로 추석 연휴 인사를 대신드려요. 명절 잘 보내시고요, 남은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올해 초였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 A를 서초동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A는 서초동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최근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나는 그날 서초동에 회의가 있었다. 마침 시간이 서로 맞았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가 벌써 삼십 대 중반이 됐다. 공교롭게 둘 다 5세와 2세 두 딸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짙은 색의 각 잡힌 정장 차림으로 문을 열며 들어온 A는 목이 탔는지 내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내 커피라고 말릴 틈도 없었다. 반쯤 비운 잔을 테이블에 탕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어제 지수 왔었어. 어후 앞으로 딸들 어떻게 키워야 하니.”

지수는 우리가 대학 시절 함께 어울리던 친구다. 갑자기 지수는 왜? 게다가 딸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냐니. 지수는 똑똑한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서울대 로스쿨에 갔다. 우등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대형로펌에 입사했다. 얼마 되지 않아 결혼도 했다. 곧이어 회사마저 그만뒀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굉장한 부잣집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변에 있지. 명문대 로스쿨 나와서 법조인이 되거나 의대 나와서 의사가 된 똑순이 여성들. 스마트한데 예쁘기까지 한 여자들. 의외로 그런 여자들 중에 일찍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어. 부잣집에서 선보고 낚아채듯 데려가거든. 요즘 강남의 부잣집 시어머니들은 공부 안 한 아들에게 똑똑한 여자를 찾아준다니까.”

“… 그럴 수 있지. 지수도 그랬고.”

“그래. 지수. 그 지수가 내 사무실 찾아와서 펑펑 울었어. 결혼하고 아무 연락 없다가 갑자기. 시집가서 연락까지 끊었으면 잘 살아야지 암튼. 내가 서초동에서 이혼 사건 맡아보니 요즘 지수 같은 여자들이 많이 찾아와. 사연도 다 비슷비슷해. 그녀들은 시댁에서 집 장만해 주고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돼서 그런지 결혼하자마자 직장 관두고 쉽게 아이도 낳아. 둘째까지 스트레이트로. 저출산? 그거 걔들한테 딴 나라 얘기야. 이모 비용 대주지, 다달이 용돈 주지 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A는 우리나라 엘리트 여자들이 불행해지는 의외의 코스가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20대 후반에 부잣집으로 시집갔던 똑순이 여자들이 10년쯤 지나면 딱 우리 나이가 된다. 아이들이 크고 여유가 생길 시점이다. 시간적 공백이 생겨나면서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이들이 차근차근 하루를 열심히 채워나가길 기대한다. 하지만 시댁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든 유학만 보내면 된다고 믿는다. 시댁과 교육 방식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남편 역시 통 관심이 없다.

다시 경력을 쌓으려 할 때도 문제다. ‘다 지원해 주는데 허튼짓 말고 집에서 애나 키우라’고 한다. 여자가 나가서 뭘 하겠냐며. 그제야 경제적 풍요가 행복의 모든 걸 담보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을 나열하고 하나씩 해치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던 그녀들 아니던가. 심지어 자신을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꾸역꾸역 직장을 다니더니 이제는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마저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댁의 가세가 기울면 가정생활에 금이 간다. 남편의 폭언과 폭력이 발생할 경우 곪았던 곳은 터지고 만다.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온 그녀들. 이른 결혼을 후회하며 와르르 무너진다고 했다. 본인 커피는 시키지도 않은 채 한참을 일방적으로 떠들던 A의 결론은 그랬다. 아이들을 너무 공부 기계로 만들지만 말자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살면 꼭 다친다며.

물론 A의 말이 다 맞진 않을 것이다. 공부만 열심히 했다거나 결혼 상대가 부잣집이었다는 사실이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을 테니. 하지만 A의 말을 들으며 많은 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들이 평생 시험공부만 하다 세상에 수많은 좋은 것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험 점수받듯 그저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만 끊임없이 바라보다 큰코다치지 않기를. 

돌아오는 길에 고민이 많아졌다. 세상은 실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가령 엘리트 집합소인 법률 시장의 수요는 정체 중인데 공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변호사들조차 먹고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한편 연기자들은 넷플릭스, 디즈니 등 온갖 OTT의 등장으로 수요가 늘었다. 덕분에 급부상하는 배우들이 많아졌다.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지만 그것이 성적순대로 벌어지지는 않고 있다. 최고의 직업도 더 이상 정해진 틀 안에 있지 않다. “저의 직업은 무엇입니다” 보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로 출발해 소셜 미디어 아이디를 공유하고 자기만의 영역을 발굴해 홍보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가는 큰 딸과 걸음마를 시작한 둘째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모든 선택은 각자 몫이겠지만 개인적인 욕심은 있다. 두 딸에게 한 가지 덕목을 길러주고 싶다.

‘자립심’. 나는 자립심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힘’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 왁자지껄한 군중 속이지만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등등. 그런 시간마다 집 앞을 산책하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또는 종이라도 접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꽉 채워 보낼 줄 알면 좋겠다. 하다못해 잠자는 시간만이라도 숙면을 취할 줄 알면 좋겠다. 외롭거나 헛헛해서 괜히 아무거나 집어먹고 체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배워둔 운동 하나, 유년 시절 읽었던 풍부한 이야기들, 이곳저곳 다녔던 여행, 그리고 가족과 함께 공유했던 행복한 기억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급할 때 본능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복주머니에 담겨야 하는 것들. 요약하자면 체력, 상상력, 경험, 풍요로움 등. 그것들이 이상하리만치 뒤섞이면서 탄생시키는 묘한 조합이 자립심 아닐까.

물론 어느 순간 우리 딸들이 대한민국 입시에 빨려 들어가는 구간을 막진 못할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립심 있는 멋진 아이로 키워낸다 한들, 사회가 합의해 놓은 입시라는 프레임 안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결국 또 다른 낙제이며 멋진 아이라는 것도 부모의 주관적 만족 수준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함도 좋지만 약속된 틀 안에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적응력도 중요하다. 다만 그렇게 한 칸 한 칸 올라선 계단의 끝에서 절벽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등이 될 필요가 없다는 상투적인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내 아내도 어느 순간에는 집단에서 1등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었던 경험이 있다. 해보니까 확실히 노력은 아이 몫이고 부모 역할은 곁에 머무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임을 알고 있다. 딸들에게 부모가 곁에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고, 한 번의 성공과 실패가 인생을 결정짓지 않음을 알려주고 싶다. 언제나 자연스럽게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게 말이다. 어떤 경우에나 스스로 절벽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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