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DF 다이어리> 독자 여러분. ‘철학과 정치’를 짝지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흔히들 ‘철학과 정치’는 활동하는 영역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정치’의 지향점 역시 접점이 없어 보인다고 하고요. 얼핏 보기엔 맞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면, 철학은 왠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현실 세상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드니까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으시거나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아래 글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위 글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면서 건명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인 최진석 교수의 책 속에 나오는 글입니다. 한편을 지키는 일에 안주하지 않는 ‘경계의 철학자’, 낡은 가치를 버리고 주체적 개인으로 사는 '반역의 철학자', 탁월한 사유의 시선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행동하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독립적이고 주체로서의 인간이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각자 지향하는 정치관도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은 분명히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문제죠. 정치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없는 답을 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겪어본 적 없는 세상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정치만이 우리의 생존을 희망적인 방향으로 담보할 수 있음을 더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에게 ‘정치’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일과 철학은 전혀 다른 별개의 일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진 최진석 교수에게. 최진석 교수는 저희 SBS D포럼과도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2015년 SDF에서 ‘호기심’과 관련한 통찰력 깊은 강연으로 많은 공감을 이끌어 낸 적이 있습니다. 햇살 좋은 날(5월11일) 그의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최 교수는 SDF 연사로 강연할 때 입었던 6년 전 옷을 똑같이 입고 왔습니다. 일부러 당시 옷을 찾아 입고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습니다.) “정치의 수준은 말의 수준” Q. 철학은 추상적이지만 정치라는 건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철학과 정치는 별개가 아닌 건가요? A. 현대에 들어와서 혹은 고대 정치가 시작할 때부터 정치는 현실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장치로 등장한 거예요. 그 이전에는 세계의 문제를, 신을 대신한 제사장들이나 무당들이 세계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고 그렇게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은 정신이 깨어나 ‘아, 이제는 신을 대행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겠구나.’라고 깨닫게 되죠.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도전합니다. B.C 6~8세기 정치가 시작됐단 말이에요. 이때 같은 시대에 철학이 시작돼요. 세계를 보는 기본 시각이 이때 형성됩니다.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문명의 주도권을 인간이 신으로부터 빼앗아 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지요. 이제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 대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의 품격을 정하던 시대에 인간은 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용맹함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때는 누가 더 주먹이 센지, 누가 더 싸움을 잘 하냐, 이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인간이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려는 도전이 시작되면서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이제는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 즉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 그 설득력의 수준에 따라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데, 말 잘하는 사람을 레토르(rhetor)라고 그래요. 레토르들이 점점 주도권을 가져갔는데 이들이 바로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것이죠. 이처럼 철학과 정치는 같은 시기에 같이 등장합니다. 레토르는 말을 잘하는 기술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을 레토릭 (rhetoric) 이라고 해요. 지금도 정치가 잘 돌아가는 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의 말은 교과서에 실리죠. 그런데 정치가 잘 안 되는 나라들, 우리나라도 그 예로 들 수가 있겠죠. 그런 나라들에서 정치인의 말은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학생들한테는 좀 들려주기 싫을 정도가 되죠. ‘정치의 수준은 말의 수준’이에요. 철학과 정치가 함께 등장하면서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요체는 ‘말을 적절하게 하는가,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에요. 그러니까 신뢰 있는 말을 하고 그 말을 책임감 있게 지키고 부끄러움을 알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정치의 가장 기본 요체예요. 민주화 이후의 아젠다는? 길을 잃은 대한민국 정치 Q. 지금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현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A. 펜데믹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죠. 우리한테 더 책임성이 있는 것은 정치적인 혼란이에요. 정치의 혼란이 펜데믹의 혼란을 더 가중시킬 것입니다. 정치적인 혼란은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면 잘 해볼 수 있는 일이잖아요. 저는 대한민국 정치의 혼란은 ‘길을 잃은 것이다.’ 이렇게 봐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빨리 크게 발전한 나라잖아요.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요구하는 어떤 목적, 목표, 이상을 잘 수행했다는 뜻이죠. 세 단계로 구분하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다음의 가장 큰 아젠다(agenda)는 건국이 될 수밖에 없죠. 건국하고 난 다음에는 산업화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산업화가 완수하고 나면 반드시 사회 주도세력의 교체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사회 경제적 조건이 요구하는 아젠다(agenda)를 잘 설정하고 설정된 아젠다(agenda)를 잘 수행했을 때 국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거든요. 우리나라가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화 다음 아젠다(agenda)가 설정이 안 되고 있어요. 대개 중진국 상위 레벨 정도에서 민주화가 다 완수되거든요. 다음은 필연적으로 선도 국가, 전략 국가, 내지는 선진국, 이런 단계로 넘어가고, 이런 단계를 실현할 수 있는 아젠다(agenda)가 설정이 되어야 되는데 민주화 다음에 그런 아젠다(agenda)가 설정이 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의 혼란은 사실은 길을 잃은 것’이죠. Q.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 이후 필요한 아젠다(agenda)의 부재를 말하는 건가요? A. 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가져야 할 새로운 아젠다가 아니라 이미 다뤄본 적 있는 아젠다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설정하면서 그냥 ‘과거에 갇히게 되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지금 ‘과거를 어루만지는 정치, 과거를 해결하려는 정치’ 이것을 했지, 미래를 여는 정치를 하지 못 하는데, 그건 뭐냐면 아젠다라는 것은 항상 미래적이거든요. ‘우리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이 아젠다를 놓쳤고, 그렇기 때문에 미래적이지 못 했고, 그러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어루만지는 삶을 지금 너무 오랫동안 살고 있다.’ 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치가에 요구되는 덕목은 ‘인격과 식견’ 부끄러움과 염치· 신뢰가 사라진 현실 Q. 정치가에게 필요한 덕목과 자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저는 정치가가 가져야 될 가장 큰 덕목은 인격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인격, 그다음에는 식견. 인격은 무엇 때문에 의미가 있냐면, 정치는 말로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말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냐면 신뢰를 기반으로 해요, 신뢰. 그런데 이 신뢰는 인격이 기능적으로 퇴화되어 있으면 신뢰를 가볍게 여기고 인격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고 있으면 신뢰를 훨씬 크게 생각하죠. 지금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의 신뢰. 그러다 보니 부끄러움과 염치가 사라졌어요. 부끄러움과 염치가 사라지고 신뢰가 훼손되면 어떤 정치도 건강성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말을 해놓고 말을 안 지키고, 말을 안 지킨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자기가 한 말을 계속 지키지 않는 일이 반복되는 거죠. 인격적으로 건강하지 않거나 튼튼하지 않으면 일단 말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신뢰를 지키지 않고 신뢰를 지키지 않는 그 사실을 훼손된 인격으로 계속 유지해야 되니까 부끄러움을 스스로 안 느끼려고 노력해요. 이것은 단지 정치 리더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에요. 유권자들도 말의 신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니까, 그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 리더들도 말의 신뢰 정도는 우습게 보는 것이죠.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이 매우 수준 낮은 정치인이라는 것을 알아야죠. 정치 회복하려면 정치의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시대의 급소를 잡아라” 지금 대한민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회복하려면, ‘정치 공학’이 아니라 ‘정치’를 회복해야 해요. 정치를 회복하려면 정치의 가장 근본 토대로 돌아가야 돼요. 자신이 한 말을 지킬 수 있는 인격적 건강성을 회복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염치를 알게 돼요 부끄러운 일을 안 하게 돼요. 그러면 정치는 많은 부분 정상궤도로 돌아갑니다. 그 다음엔 식견이 있어야 돼요. 식견이라는 것은 뭐냐면 예를 들어 국회의원은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 대통령은 자기가 뭐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가야 돼요. 국가 레벨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될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잡는 거예요. 중요한 문제들에 붙들려 있으면 국가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시대의 급소를 잡아야 한다, 시대의 급소’ 문명사적으로 혹은 우리 민족사적으로 또 우리 역사적으로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높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서 그걸 잡아야 해요 이렇게 하려면 깊고 폭넓은 식견이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데 이 식견이 부족하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잡는 것이 아니라 덜 중요한 문제들, 대한민국이 요구하는 문제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영이 요구하는 문제를 잡아요.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적 감정이나 자기 신념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잡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저는 인격, 그 다음이 식견. ‘식견이 있어야 제대로 된 비전을 잡는다.’ 저는 인격과 식견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정치 영역에서 쌍소리를 하는 사람,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의 정치행위가 잘 되기란 굉장히 어려워요. 인격적으로 손상된 정치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높이와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는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한 단계 도약하는 정치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의 기본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의 본질 대신 ‘정치 공학’이라는 기능적 정치에 사로 잡혀 Q. 정치가 근본 토대로 돌아가기 위해선 ‘정치 공학’이 아닌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A. 정치 공학은 기능적인 거예요. 정치는 본질을 말하는 거거든요. 기능적인 것은 본질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어요. 예를 들어서 국방부 장관이다 그러면 국방을 제일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거죠. 그런데 기능적으로 생각하면 이 사람이 누구 편인지, 어느 진영에 있는지, 그리고 이 사람이 이 진영의 이익을 잘 대변할 것인지, 이것을 중요하게 따지면 이제 정치 공학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정치 공학에 빠지면 절대 국가를 생각하지 않게 돼요. 우리나라는 진영의 정치지 국가의 정치는 아직 아니에요. Q.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진영논리가 심각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A. 그렇지 않나요? 지금은 선악을 판단할 때도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먼저 따지거든요. 정치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공정도 지금은 선택적 공정이거든요. 인권, 선택적 인권이에요. 정의도 선택적 정의예요. 그러니까 한 쪽에서는 ‘이게 나라냐’라고 그러고 한 쪽에서는 ‘이건 나라냐’라고 그런 일들이 생기는 거죠. 내 편이냐 아니냐, 내 편이면 잘못을 해도 감싸고, 내 편이 아니면 잘못이 작아도 키우고 하는 매우 기능적인 정치에 사로잡혀 있죠. 지금 우리 이 시대에 이런 일들은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많이 횡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능력 사라져.. 유권자들도 진영에 갇혀 ‘맹목적 정치 행위’ Q. 내년에 대통령 선거도 있지만 사실 정치에 대한 불신들이 팽배해 있는 건 사실인데요. A.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건 지도자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해서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유권자들이 표를 줄 때, 그 정치 지도자가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지, 어떤 지도자가 더 잘 준비되어 있는지, 어떤 지도자가 그 아젠다를 실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해왔는지 하는 것을 전혀 살피지 않거든요. 어느 동네 사람이냐, 나하고 어떤 관계냐, 내 이념에 맞느냐 안 맞느냐, 아니면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하는 것으로만 따져서 표를 행사하는 경우가 너무 많잖아요? 저는 이 문제가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과 같다고 보거든요. 유권자들도 진영에 갇혀 있어요. 지도자를 뽑을 때 유권자들이 생각을 하지 않고 뽑아요. 우리가 진영에 갇혀 있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진영 논리는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진영에 갇혀 있으면 그 진영의 논리를 확대하고 재생산만 하면 돼요. 그 다음에 그 진영의 논리에 충성심만 보여주면 돼. 그러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죠. 진영에 갇힌 정치 행위는 사실 맹목적 정치 행위예요. 생각하지 않고 맹목성에 빠져 있으면, 진영 정치를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어요. Q. 진영 논리와 진영 정치를 탈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문제가 되는 것은 진영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생각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준비된 지도자는 누군지, 이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련되지 않은 마음과 느김에 따라 행사되는 표가 너무 많아요. 우리는 정치를 논할 때 대부분 정치인의 문제점만 지적하는데, 지적당하는 그 정치인을 만든 사람이 도대체 누구예요. 유권자들이거든요. 그래서 생각 없는 정치의 토양은 생각 없는 유권자들이에요. 혼란한 정치의 토양이 어디냐면 혼란을 겪고 있는 유권자들이에요. 방향을 잃은 정치의 토양이 어디냐면 방향을 바로 잃은 유권자들이에요. 정치가 한 걸음이라도 진화하기 위해서는 진영에 갇힌 맹목적 감정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리고 생각을 시작해야 됩니다. ‘맹목적 지지’에서 ‘지적(知的) 지지’로 바뀌어야 건강성 회복 Q.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A. 생각한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긴 해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줄곧 남이 한 생각의 결과를 받아서 살아왔거든요.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의 결과를 받은 후 그것을 수행하면서 살았거든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의 결과를 수행하면서 사는 삶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해 버렸어요. ‘따라 하기’라는 것이고, 중진국 상위 레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화를 썼으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영특했나를 보여주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생각의 결과를 받아서 사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했으니까 이제는 다른 방식, 즉 스스로 생각을 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이나 정치나 학문이나 전 영역에서 창의적 생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정치의 영역에서 볼 때, 가장 궁극적으로는 자기한테 물어야 해요. 나는 누구인가? 그러니까 누군가를 지지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걸 물어야 내가 왜 지지하는지가 나오거든요. 최소한 이렇기라도 하면, 맹목적 지지에서 지적(知的) 지지로 바뀔 수 있어요. 지적 지지로 바뀌면 정치의 효율성이 매우 커지고 건강성이 회복되죠. 정치 집단 간의 대결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고 있어야 해요. 이것이 경쟁을 만들어내고 이 경쟁을 통해서 더 진화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이 경쟁이 맹목적이냐 지적이냐 하는 점이죠. 그런데 우리의 대결, 우리의 경쟁은 맹목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맹목적이지 않고 생각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정치 행위를 하든 아니면 표를 던지는 일을 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정치 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궁금해 해야 돼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물어야 돼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는 것을 자기한테 묻기 시작해야 생각이 시작됩니다. 생각은 철저히 인격적 활동이에요. 기능적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을 시작해야 정치가 정상화되고 창의성이 나오고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고 그래서 더 행복을 느끼고 이렇게 살다 갈 수 있는 거죠. Q. 정치의 본질로 회복하기 위해선 깨어있는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A. 그렇죠. 유권자가 실천해야 될 문제기도 하고 정치인 본인한테도 해당돼요. 정치인은 생각하는 정치를 해야 해요. 근데 정치인들은 왜 부끄러움을 모르고, 왜 인격적으로 단단하지 않고, 왜 식견이 높고 넓지 않은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궁금해해야 자신을 돌볼 줄 알죠. 자신을 돌볼 줄 알아야 인격적으로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궁금해 하는 사람만 발전할 수 있죠. 본질을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기능적 태도를 취하는 게 문제 Q. 화음으로 따지면 지금처럼 불협화음의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이 있을까요? A. 불협화음, 이걸 요즘 말로 하면 다양성이죠. 세계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이행했다고 해서 이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인가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이야기예요. 다양성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정치 공학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본질을 지키는 사회는 진화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본질을 외면하고 기능을 택하죠. 입으로는 ‘다양성은 차이를 인정하는 거다’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과 다른 차이는 전혀 인정하지 않아요. 차이를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악으로 보는 거죠. 그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갔다는 것 그 구성원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격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는 거예요. Q. 그런 갭을 줄이기 위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A. 그렇죠. 그런 갭을 줄이고 그러면서 사회가 건강하게 진화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인데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기능적이고 정치 공학적인 활동 능력에 빠져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기능적인 왜곡을 자기가 이용해 버리죠. 지금 우리 사회는 무슨 말이든지 좋게 받아들일 말, 나쁘게 받아들일 말을 가리는 기준을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요. 자기 마음에 드는 말을 하면 박수를 치고, 맞지 않는 말을 하면 욕을 하고. 다 진영에 갇혀서 그래요.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진 까닭이죠. 대통령 되겠다는 의지보다 나라를 살리려는 사명감 큰 후보 뽑아야 Q. 내년 대선을 위해 출사표를 던질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어떤 게 있을까요. A.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나올 말 같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보다, 나라를 살려야 되겠다는 애국심 혹은 사명감이 더 커야 하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싶은 마음을 먼저 가진 후에, 그때부터 부랴부랴 애국심을 장착하고, 정치의 본질을 장착하고, 무언가 배우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정치 지도자는 이런 식으로 등장하거나 양성돼서는 지금 우리의 비판 대상이 되는 정치 지도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요. 항상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현실 문제를 제기하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정해진 현실 너머로 한 발짝도 넘어갈 수 없어요. 이미 현실적으로 정해져 있는 문법 너머로 건널 뜻이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정치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정해진 현실을 다음 단계로 건너가게 하려는 꿈이거든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건너가려는 꿈보다 대통령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내 말이 허약하거나 철모르는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일이 이행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이게 나라냐’와 ‘이건 나라냐’라는 비판을 주고받는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시선의 높이’가 ‘인격적인 높이’ 그러니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마음보다 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이 더 큰 사람이 누구인가를 자세히 살펴야 되는데 이것을 잘 살피는 일이 무시되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우리나라에는 이 이상이 없어요. 왜 그러냐면 ‘시선의 높이’ 때문이에요. ‘시선의 높이’는 ‘인격적인 높이’예요. 이 세상에는 치명적인 원칙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떤 높이의 인격을 가졌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높이의 시선을 가졌는가를 결정하고, 어떤 높이의 시선을 가졌는가가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수준과 내용을 결정하죠.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은 살 수 없어요. 치명적이죠. 1820년대 대분기 이후, 전 세계에서 중진국 상위 레벨까지 도달한 뒤 선진국으로 올라선 나라는 없죠. 우리나라는 지금 중진국 최상위 레벨에 도달한 나라에요. 여기서 벗어나느냐 벗어나지 못 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 도약하지 못하느냐, 이것만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높은 도전이에요.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변환 필요 우리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된다. 너무 자주 해서 이런 말도 이제 식상할 정도에요. 맞는 말이죠. 그런데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와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어요. 바로 인격적 격차예요. 인격적 격차. 이런 인격적 격차 때문에 변환이 어려운 거에요. 패스트 팔로워는 대답하는 기능으로 충분해요. 근데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반드시 질문할 줄 알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에요. 질문은 내면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활동인데, 궁금증과 호기심은 내 인격의 한 특성이죠. 대답과 질문은 동등한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답은 낮게 있고 질문은 높게 있는 거에요. 대답하는 사람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없거나 약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커요. 그런데 이 높이나 크기의 격차가 기능적 격차가 아니라 바로 ‘인격적 격차’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아는 단계와 모르는 단계 차이는 ‘인격적 격차’ 염치를 모르는 단계하고 염치를 아는 단계에서도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 이 격차도 ‘인격적 격차’라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낮은 단계에 있으면 창의적이거나 도덕적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거짓말을 쉽게 하기도 하죠. 자기가 지지했던 지지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염치없는 짓을 하면 지지를 철회하여 벌을 주는 것이 유권자로서는 인격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죠.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도 옳고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하면, 그 사람이 매우 낮은 수준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한 단계 나아진 새 나라를 원한다면 우선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해요. 인격이야 얼마든지 훌륭한 척 할 수 있어요. 근데 그 사람 인격자인가 아닌 가 확인하는 방법이 있어요. 국가 지도자인가 진영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국가 지도자 행세를 하려고 하는가 민족의 지도자 행세를 하려고 하는가,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거짓말을 하는가 안 하는가, 염치를 아는가 모르는가, 사과를 하는가 안 하는가, 언어가 현실을 반영 하는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이것이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단단한가 단단하지 않은가를 증명하거든요. 정치의 한 축인 유권자들이 자기가 감정적으로 지지했던 지도자가 거짓말을 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보면,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죠. ‘거짓말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하는 건 다 옳아.’ 라는 태도라면 정치의 회복은 매우 어렵다고 봐야죠. 최진석 교수와의 만남은 한 편의 강의를 듣는 것과 견줄 만 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국가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집중해 이야기 했습니다. 특히 이제는 우리나라가 정치 공학을 넘어 정치를 복원하고, 민주화를 넘기 위해 시대의 주변부가 아닌 시대의 급소를 잡아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철학과 정치에 대한 철학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느슨했던 둘 사이의 관계가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최진석 교수의 답변은 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사회에 갓 나온 젊은 세대들을 위해 덕담 내지 조언을 부탁드린다는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이런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어느 세대나 세대 간의 갈등은 있다고 생각해요. 왜 그러냐면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대가 다르면 사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인종들이에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에게 제가 말하는 덕담이라는 건 의미가 없고, 내 덕담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스스로에게서 드러나는 욕망을 마음껏 펼치면서 사는 용기만 있으면 돼요. 기존의 질서와 정치 시스템에 너무 쉽게 편입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기성세대하고 어떤 갈등을 겪는다면 그 갈등을 물고 늘어져야 돼요. 절대 패배하면 안 돼. 이겨야 돼요. 너무 일찍 점잖을 필요 없어요. 다만 이미 정해진 기능적인 대답들에 빠지지 말고 자기 몸속을 돌아다니는 자기 피가 자기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요.” 우문현답이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SDF 다이어리는 다음 주 더 알차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SDF DIARY 를 만드는 사람들
류란 기자 :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SBS 보도본부 소속으로 법조팀과 사건팀, 8뉴스부, 영화 담당 기자로 근무했습니다. 이정애 기자 : 다양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으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믿으며 SBS D포럼을 총괄 기획해 오고 있습니다. 사회부, 국제부, 경제부, 시사고발프로그램 ‘뉴스추적’ 등을 거쳤으며 2005년부터 ‘미래부’에서 기술과 미디어의 변화, 그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떻게 다르게 같이 살아가야 할 지 고민해 오고 있습니다.
이종훈 기자 :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 그리고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습니다. 통찰력 있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임세종 촬영감독 : 현재 SDF 팀의 촬영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협업을 중요시하는 프리랜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예진 작가 : 13년째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사, 뉴스, 선거 방송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경험했고 2018년부터 D포럼을 기획‧구성하고 있습니다. 지식 포럼을 조금 더 대중 친화적으로, '가까이 와닿는' 포럼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신소희 아트디렉터 : SDF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공감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제 손이 닿은 곳에서도 공감과 에너지가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SDF 다이어리는 SDF 참가자 중 수신 동의하신 분들과 SDF 다이어리를 구독한 분들께 발송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에) 만나요! 미래를 여는 담대한 도전 SBS SDF sdf@sbs.co.kr 서울시 양천구 목동서로 161 SBS방송센터 보도본부 논설위원실 미래팀 수신거부 Unsubscribe Copyright © 2021 SBS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