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87회 (2022.01.10)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송지현입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선 항상 무얼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데요. 아무래도 하루 중 제일 치열하게 고민하는 순간이 메뉴를 정하는 때인지라 최근 인상적으로 먹은 것들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그날의 술자리는 간단하게 미나리전과 솔송주로 시작하였습니다. 한식집 같았는데 양라구 파스타가 있기에 시켜보았고요, 능이주를 곁들였습니다. 다시 솔송주로 돌아와서 어복쟁반과 참나물 샐러드를 먹었습니다. 솔송주의 작은 크기가 아쉬워 750ml의 감자주를 시켜보았고 석화와 냉이튀김을 먹었습니다.

자리를 마치고 집에 가는 동안 조금 아쉬워져 무가당이라고 유난스레 광고하여 저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는 소주인 ‘새로’를 사서 귀가하였습니다. 포테토칩과 함께 먹었습니다. 포테토칩과 새로를 먹으며 술자리에서 낄낄대며 웃고 울었던 순간들을 복기해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찾아 먹으며 자주 웃고 울면 좋겠다고, 오랜만에 인간이어서 충만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인 것이 조금 좋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이렇듯 늘 먹고 마시는 것에 진심인 제가 오늘 고른 시들은 모두 술을 마시며 읽다가 웃고 또 울었던, 저를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기록할 만한 메뉴들입니다.

💘송지현 소설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안락사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커튼 뒤에서 잃어버린 어제를 찾았죠.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머리맡엔 단단한 구름과 말캉한 악몽이 쌓이고, 기억들을 팡팡 털어도 베개는 풍성해지지 않아요. 부풀어오르지 않아요. 걸어온 길들은 푹 꺼져서 다신 되돌아오지 않아요.

침대는 흰 배를 내놓고 앉아 있어요. 커튼을 치면 종기처럼 별이 돋아나고 터진 잠 속에서 깃털들이 솟구쳐요. 재채기가 나와요. 콧등은 주름지고 우리의 날들도 구겨져요. 지폐를 구기면 낯선 얼굴이 우릴 바라보는 것처럼 구겨진 삶이 우릴 바라보고 웃고 울어요. 그 새침하고 가여운 얼굴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눈물도 흘려요.

바뀐 요일을 입으면 기운이 새로 솟아요. 오늘 자고 일어나면 또 얼마나 열매가 많은 날이 펼쳐질까요. 얼마나 많은 잘린 머릴 목격할까요. 별들이 태어나고 숲이 타오를까요. 이 한잠만 자고 일어나면……

부러진 나무들이 일어나요. 번개가 기지개 켜요. 온 들판에 불이 일고, 우리의 수많은 잠들이, 꿈들이 하나하나 낯익은 얼굴이 되어 찾아와요. 못다 한 인사를 커튼 뒤에 감추고

나는 잠들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하루를 생각해요.

이 시는 어느 새벽, 동생과 술상을 차려놓고 앉아 낭독했습니다. 어쩐지 그날따라 집에 위스키가 있어서 낮은 상에 마주 앉았고 안주를 먹는 대신 한 문장씩 번갈아 읽어내려갔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각각 저희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었고요. 기어이 우리는 울고 말았는데요, 사실 우리는 시인에게 이 시가 쓰인 배경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인의 지인이 키우던 고양이가 오랜 기간 투병을 했고 주인은 결국 안락사를 결정했다고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저의 오랜 밤을 지켜주던 고양이도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고양이를 화장하고 돌아오는 길, 동생과 저는 고양이가 늘 바라보던 뒷산에 올랐습니다. “나는 잠들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하루를 생각해요”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나의 고양이가 가졌던 마지막 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가질 마지막 밤을 상상해보고요. 그 마지막 밤도 우리의 하루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열매가 많은 날들이 펼쳐질”지 아득해집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① 오늘의 시믈리에 송지현 소설가 한국일보문학상, 허균문학상 수상
🏆🏆

_「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에서

송지현 작가가 2021년 출간된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얼마 전 한국일보문학상과 허균문학상을 수상했어요! 가족과 청년 이야기를 두 축으로 삼아 묶은 이번 소설집은 "미래 없음에 대처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정신적 태도와 전략을 사랑스럽게 반영한 서사적 유연성이 눈에 띄는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으로, "주제의식에 짓눌리지 않고 서사에 강박되지도 않으며 거침없는 언어로 청춘의 연대기를 완성해 나간 정확한 ‘현대의 소설’로 보인다”는 평과 함께 제14회 허균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② 김복희 시인 산문집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출간🖋

구독자 님, 김복희 시인을 아시나요? 아마 익숙하실 텐데요. 『희망은 사랑을 한다』를 쓰셨고 이 시집은 박연준 주민현 시인, 박선우 소설가, 쩡찌 작가 등 많은 시믈리에를 통해 소개되었지요. 그리고 바로 어제, 김복희 시인의 신작 산문집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려요. 

시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직접 행하는 시인으로서 시에 대해 말해보고자 자신의 일상 위를 둥둥 떠다니거나 한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시적 경험들을 하나씩 채집한 김복희 시인의 산문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를 만나보세요.
💘송지현 소설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혼니 (김현,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사평이 말했다

 

엄마, 바다 화났어?

아직 화났어?

 

사평은 난생처음

바다 보고 꽃게 보고

꽃게처럼 옆으로 걷다가 모래사장에 꽃게를 그리고 그 순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된다

그날 내 가슴에

남들은 모르게

슬픔이 밀려왔다 밀려가지 않았지

아직 어린 나이에 망망대해의 진리를 알 수 없을 텐데도

사평은 짐작했다

 

엄마, 엄마 냄새는 너무 예뻐.

아직, 예뻐.

 

사평은 파도가 높아

부모가 신선해물탕집에서

간장에 고추냉이를 너무 많이 풀어서

알을 먹다가 눈물바람으로

휘청거리는 걸

보고

들었다

 

여보, 이맘때면 자꾸 현이 오빠 생각이 나

그 오빠가 그렇게 쉽게 갈 오빠가 아닌데 어쩌다가 그리 쉽게 가냐 가길

여보, 저기는 참 어두컴컴하다 보이는 게 없네

여보, 이맘때면 자꾸 현이 언니 생각이 나 그 언니 그렇게 쉽게 갈 거면서 뭘 그렇게 어렵게 살았을까

여보, 우리는 모두 연약해 앞뒤가 꽉 막혀서

 

부모가 소주잔을 들고 우두커니 창밖을 보는 사이에 사평은

펄펄 끓는 해물탕에서 꽃게를 꺼내려다가

눈물이 터졌다

인생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 처음으로

부모는 사평 때문에 바다에서 멀어졌다

자러 갔다

꿈에서도 미더덕을 씹어서 입안에 물이 가득했다

 

엄마, 화났어?

아직 화났어?

 

사평은 부모가 신선하게 잠든 사이에

깨어나서

햇빛 창가에 앉아서

부모가 그리워하던 이와 대화했다

너도 부모 되어 알리라

사평은 놀라 검푸른 바다를 마음에 엎지르고

커나가리라

그땐 몰랐으나

사평은 부모의 슬픔

냄새를 그때부터 잊지 못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이었다

김현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쓴 글이라고요. 정확히 인간의 지점에서, 인간의 삶을 찢어지도록 들여다보며, 인간에게 점착된 감정을, 그 찐득한 마음을 시에 붙여두었다고요. 김현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술이 없어도 취해가는 기분입니다. 너무 울고 난 다음날처럼의 어지럼증이 동반됩니다.

 

“바다 보고 꽃게 보고

꽃게처럼 옆으로 걷다가 모래사장에 꽃게를 그리고 그 순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삶이 순간으로 이루어지며, 그 순간들은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서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잊으려 애썼던 순간들이야말로 우리의 장기 하나하나에 새겨질 거라는 것을, 시를 읽고 나서 오래도록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런 문장이 남게 됩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이었다”

 

저는 고작해야 인간으로 살다가 죽겠지만,

시를 읽을 때면 고작 인간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오만한 생각이 듭니다.

고작 점심 저녁 메뉴에 희비하고 마실 술을 고르느라 온힘을 다 쓰는 그런 날들에

시가 있기에 ‘충만하다’는 단어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고 말해보는 오늘입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장강명 소설가입니다. 『재수사』 『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등을 쓴, 날카로운 지성에 거침없는 상상력을 겸비한 올라운더 장강명 소설가가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올해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보통 우시사를 출근길에 읽는데요. 시를 읽고 있는 순간은 만원 버스임을 잊게 돼요.
💬 장옥관 시인의 미니 인터뷰에서 '시인은 오늘 아침에 시를 쓴 사람 입니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남습니다
💬 이번 호 우시사 너무 좋아요 큐레이터님이랑 저랑 시 취향이 잘 맞네요... 이런 귀한 시를 알게되어서 정말 기뻐요!!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시 <우시사>를 못 받은 날이 있다면 스팸 메일함을 한번 확인해주세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나요?
🌱구독자님의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문학동네
jkj110570@munhak.com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TEL. 031-955-1928
수신거부 Unsubscribe